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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동물원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김경수 그림 / 물병자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이다. 그래서 동물 세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가끔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동물 세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아주 가끔이지만 너무 '인간적'이다. 이 때의 '인간적'인 특징이란 동시에 '비자연적'인 것이어서 인간이 자연서식지로부터 일탈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이고 '비자연적'인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것은 도시, 그중에서도 인구과밀형 현대 도시이다. 이 발명품은 인간에게 꿀이자 독이다. 현대 도시인의 운명이란, 영리하긴 하지만 세계를 진정으로 소유하기에는 너무 유치한 아기같은 존재가, 아기에게 꿀이 달콤한 영양가임과 동시에 독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달콤함에만 취해 계속 핥고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도시 문명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지만 도저히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도시에서 인간은 편리하고, 안전하며, 위생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갖가지 병과 스트레스, 자기와 타인에 대한 미움에 시달린다.
이것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입장과 놀랄 만큼 유사한 것이다. 동물들을 야생상태에서라면 하지 않을 갖가지 강박적인 행동들을 동물원에서 보여주는데, 인간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에게 삶이 힘든 것은 이 사회가 '밀림'이어서가 아니라 '동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살벌한 야생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협소한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족과 초부족, 지위와 초지위, 섹스와 초섹스, 내집단과 외집단, 각인과 잘못된 각인..."이란 목차들이 보여주다시피 동물적인, 혹은 2만년전에 형성된 소규모 원시 부족적인 인간의 본능이 너무 빨리 발달해버린 도시에서 어떤 부적응을 겪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본능이 어떻게 여전히 발휘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초부족'은 자연스런 부족 상태를 벗어난 도시 문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초지위나 초섹스'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지위와 계급을 구분하는 방법이나 섹스하는 방법은 동물과 너무나 흡사하지만, 동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분화시키고, 다양화시키고, 확장시켰다.
가령 '권력자로서 지위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십계명은 비비원숭이 대장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열가지 법칙과 동일하지만 인간은 더 교활해야 하고, 더 영리해야 한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망설이지 않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강력한 지도자가 이따금 그릇된 결정을 내리고도 위엄 있고 강력한 결정을 내린 덕분에 살아남은 경우는 많지만, 결단성이 없는 우유부단한 지도자가 권력을 유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라는 법칙은 동물보다는 인간계에 적용될 때 더 큰 영향력이 있다. 마치 시오노 나나미를 연상시키는 이같은 분석은 책을 읽는 내내 유지된다.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 때문에 낄낄거리게 되면서도 씁쓸하기도 하다. 막연히 존경했던 이의 느닷없는 나체를 맞닦드렸을 때처럼 말이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인간이 외계인의 노예가 되어 우리에 갇힌 신세가 된다는 영화가 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영화는 그렇게 참신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영화였다. 인간은 이미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있었으니까. 다만 그 동물원에 인간을 가둔 것이 인간 자신이었기 때문에 갇힌 상태를 명확히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점에선 '혹성탈출'보다 더 웃긴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 셈이랄까.
저자는 이런 과밀도 질식 상태에 대해 '자연으로 돌아가자'같은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문명에 대한 개념과 역사적 경험이 거의 전무한 서양인의 분석이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자연과의 조화상태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던 부족과 문명들은 모두 궤멸했거나 '인간동물원'의 문명에 합류해 자신의 지난 경험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험과 자극을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본능이 있으니 그같은 특징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좀 찜찜하다. 인간의 식욕은 자연스러우니 식욕을 억제하는 다이어트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체중조절을 위해서는 최첨단 런닝머신에서 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단순한 식단 줄이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문명은 더 이상 다이어트를 미룰 수 없는 뚱뚱한 신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