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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두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난 이 책에 푹 빠져들 것임을 예감했다. 나는 원래 이런 분위기에 약하다. 조숙한 아이, 그것도 혼자 남겨진 조숙한 아이. 열네살인 야네크는 독일 점령지였던 폴란드 숲 속의 은신처에 혼자 남겨진 소년이다.
전쟁에서는 모두가 전투에 참여해도 장군의 이름만 남듯이, 2차 대전 당시 대독일 항전에 많은 나라가 참여했지만 주로 프랑스와 영국의 레지스탕스 활동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보다 먼저 히틀러의 군대에 자신의 조국을 내주어야 했던 동유럽의 대독일 항전은 한층 눈물겨운 것이었다. 무관심과 열세 속에서 싸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서도 폴란드의 빨치산들과 마을 사람들은 폴란드의 상황보다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촉각을 더 곤두세운다. 러시아에서 독일군이 패퇴한다면 희망이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폴란드는 독일의 지배를 얼마나 더 견뎌야 할 것인가?
강자와 약자의 차이는 모든 걸 걸고 싸울 때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사람과, 모든 걸 걸고 싸워도 혼자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람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조숙한 아이는 더욱 조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디언 책 하나를 품에 안고 아버지가 마련해 준 동굴에 숨어 있던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먹을 게 떨어지거나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거든" 찾아가라는 빨치산에게 가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간다.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그리고 부모가 마련해 준 은신처에서도 벗어나 어른들의 세계에 합류하게 된 야네크는 그들의 전령사 노릇을 하면서 여러 인간군상을 본다. 폐에 총알이 박혀 천천히 죽어가는 젊은 빨치산 대장과 마을에 남겨진 그의 애인, 빨치산과 독일군 양쪽에 뇌물을 바치는 부농, 평화를 갈망하는 이상주의자, 감자 때문에 친구를 팔고, 그런 남편을 또다시 감자 때문에 배신하는 아내 등등등. 그리고 주근깨 소녀 조시아. 어릴 때부터 독일군들에게 강제로 몸을 팔았으면서도 강간 당한 부인들을 위로하는 영리하고 깜찍한 소녀 조시아.
2차 대전이 유럽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쳤다면 스스로 성숙하고 지적인 문명이라 자부해 온 유럽과, 그 문명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 보이며 끔찍한 폭력의 길로 들어선 유럽, 상반되는 두 개의 유럽의 이상과 절망, 선과 악, 성숙과 타락의 이중주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이상주의자 청년 도브란스키같은 인간은 끝까지 사자와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계를 꿈꾸고, 야네크같은 인간은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라고 비관적인 예견을 한다. 평화를 꿈꾸는 인간은 꾀꼬리처럼 아름답게 노래부르지만,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추위와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야네크는 이상주의자 도브란스키를 비웃지 않는다. 빤히 보이는 비정한 역사를 지적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세상이 던진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 중 누가 살아남았건 살아남은 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건 사라지지 않지만, 말해지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중요한 것일수록, 쉽게 말해버리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 되기 때문에. 다만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사냐를 통해 죽은 이에 대한 도리를 다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