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랜드 1
모리 코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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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시로 유우는 중학교 때 이지메를 당해 등교거부를 하고, 자살기도까지 했던 소년이다. 평소에는 나약하고, 겁 많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 고전에는 이런 인물을 '닭모가지 하나도 못비틀게 생겼다'라고 묘사하던가. 유우가 딱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질 나쁜 얘들의 이지메에도 걸려들었겠지만.

이지메를 하던 아이들을 피해 집에만 있으면서도 유우는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의 적대적인 얼굴과 그것을 방관하던 이들과 부모의 무책임한 연민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에 점차 가위눌리며 말라가던 유우는 서점에서 우연히 복싱교본을 만난다. 처음에는 무엇에든 열중함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잊기 위해 시작했던 독학이었다. 단순반복을 계속해야 하는 운동은 그에 딱이었을 것이다. 시작은 편집증이었지만, 아마 그랬기 때문에, 유우는 간단한 기술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복싱 중에서도 스트레이트 펀치를 장기로 삼게 된 것이다.

복싱의 기본 기술의 하나인 스트레이크 펀치는 한두 방만 제대로 먹여도 대부분의 사람은 나가떨어지고 만다고 한다. 그만큼 빠르고, 파괴력이 큰 펀치라고. 다른 기술은 어설펐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거리의 불량배들 몇몇을 막아낸 그 기술이 유명해져 유우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거리의 불량배들만 치고 다닌다는 '불량배 사냥꾼'으로 불리게 된다.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은  밤거리에서는 특히 잘 통하는 법칙이었던 것일까.  동료 불량배들을 '치고' 다녔다는 유우의 복싱은 금방 그들의 표적이 된다. 사회에서 밀려나 힘 하나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던 불량배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들만 사냥하고 다닌다는 범생이를 가만둘 리는 없을터. 시작은 자기방어을 위해서였지만 결국 유우의 강함은 밤거리의 깡패들을 자극하고 불러들이게 된다.

약자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되지만 자신의 약함에 머물지 않고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단련하는 사람은 약함에 머무는 사람보다 존경스럽다. 그러나 유우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진짜 파이터가 되어버린다. 약했던 과거때문에 그 반동이 너무 강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공격하던 불량배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아니, 책에서도 그런 변명은 안 한다. 그는 상냥하고 냐악한 외면과는 달리 타고난 싸움꾼이었을 수도 있고, 집과 학교를 제외한 그만의 공간인 거리와 친구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택했을 수도 있다.

자기방어의 정당함이라는 선을 넘어 야수와 같은 싸움꾼이 되어가는 유우. 멈출 수 없게 된 스트리트파이터로서의 운명의 타래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유우의 문제이자, 작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독자로서야 자기를 지킬 수 있게 된 강함도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리얼리티로서는 3권까지가 최고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할 것 없던 누군가에게 끈질긴 훈련과 의지로 찾아온 재능, 실력. 그것의 끝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하필 길거리 복싱이자 싸움이었다는 것은 유우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지만 버릴 수 없는 길의 끝, 그 길의 끝을 보는 것은 유우로서도, 나로서도 포기할 수 없다. 오랜만에 보는 대단한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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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스 페르민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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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소설은 붓으로 점점이 찍은 하나의 산문시다.

글자 하나, 의미 하나, 시 하나가 모여 선남선녀의 사랑이야기로 엮여진 동화이다.

라는 것은 즉, 동화로 받아들일 때에만 이 소설의 빛깔에 젖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동화는 유치하지만 아름다운 것이어서, 동화를 볼 때에는 유치함은 손바닥으로 살짝 가리고 아름다움만 보아야 하니까.

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긴 꼬리를 인간의 다리로 바꾸거나, 마지막에는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인어의 운명적인 사랑이 유치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도 재미없을지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이란 좋게 봐줘도 '시적허용'이나 '동화의 알레고리'의 한계를 넘어버린 것이어서 정신차리고 봤다간 짜증만 날 것이기 때문이다.

단, 고전적인 것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약간의 위로를 받지 않을까. 동화같은 이 소설에 차분한 무게감을 한꺼풀 덮어주는 것은 1800년대의 일본 고전문화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하이쿠, 쌉쌀한 차의 향기, 비단종이, 시인의 내면세계......

한없이 예민하고, 한없이 나약하며, 한없이 정갈한 일본 고전문화와 동화와의 만남.

내 취향은 사실 두 가지 다 별로지만 그래도 이 책은 좋았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찰나와 같은 시간에 여러가지 빛깔을 보고 향기를 맡아 볼 수 있는, 오감을 민감하게 자극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허무한 것은 그 자극이 책을 덮은 후 금방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볼 때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특별한 존재로 느껴지지만 사라져 버리면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 역시 이 책은 눈을 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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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가 1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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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쉬 폐가가 된다고 하던가. 그러고 보면 집이란 인간의 온기와 생활을 양분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인간을 살게 해주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숨쉬는' 무생물. 그러면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이 10년에 걸쳐 지은 집. 그 사람이 스님이라 부처님을 모실 대웅전도 짓고, 수행하는 곳도 짓고, 마지막에는 평화의 종으로 마무리했다는 집. 부처와, 스님과, 찾아오는 손님들이 함께 살 집.

불교에는 인과론이라는 게 있다고 하는데, 무량스님의 경우에도 그런 것 같다. 그가 내성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그의 어머니가  일찍 죽지 않고 끝까지 안정적인 사랑을 쏟아 주었다면 무량 스님은 혹시 출가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지질학을 배우지 않았다면, 숭산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행 중에 대둔산 태고사에 가지 않았다면, 외향적이어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즐겼다면 미국 외진 사막에 한국식 절을 손수 지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그만의 수행방법으로 생각해 낸 집짓기가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사막의 절로 불러모으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무량 스님의 성격을 조금 바꿔놓기까지 했다는 것은 인과의 사슬의 기분 좋은 반전이라고나 할까.

음식의 맛은 정성이 좌우한다는 것은 라면 한 냄비, 죽 한 그릇을 끓여본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음식을 대접받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무량 스님의 태고사도 그렇지 않을까. 그가 절짓기에 들이는 정성은 다른 많은 재주 많은 화가, 목수를 끌어당겨 더 훌륭한 집을 짓게 되었고 많은 수행자와 불자들을 모아들였다. 사람들은 태고사를 짓는 것에 힘을 보태고 그 안에서 수행하면서 정성스레 차려진 음식을 함께 먹는 기쁨을 느겼을 것이다. 아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아무런 가치 있는 인과의 사슬도, 철학도 존재하지 않는 기업산 아파트에 사는 내가 불쌍해졌다.

이 책을 감명 깊게 읽긴 했지만 앞으로 내가 태고사같이 손수 만든 집에 산다거나, 그런 집을 지을 확률은 전혀 없을 것이다. 아마 태고사를 방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평생 아파트 아니면 똑같이 생긴 주택들의 한 곳에 살겠지만 그래도 무량 스님의 태고사는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무량스님 평생의 인과의 사슬들이 탄생시킨 결정체가 태고사라면 나의 인과의 사슬들도 모이고 모여 어떤 멋진 결과물을 '짠!'하고 탄생시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기대를 갖게 했다는 것만으로, 태고사를 구경 못한 나도 무량 스님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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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데 - 고양이 추리소설
아키프 피린치 지음, 이지영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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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양이, 정말 특이하다. 못말리게 강한 호기심, 깍쟁이같고 맹랑한 성격에 신랄한 말투까지, 가장 고양이다우면서도 한편으론 집요하고 논리적인 생각도 할 줄 안다. 게다가 그 말빨이라니. 이런 고양이가 있다면 평생 싱싱한 생선을 바치면서 친구로 삼고 싶지만 안타깝게 이 고양이의 주인은 따로 있다. 덩치 크고 미련한 삼류작가, 고대 이집트 문명에 깊은 지식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황당한 로맨스나 포르노 소설을 팔아먹는 신세라 기르는 고양이에게도 무시 당하는 한심한 사내다.

그 주인이 유서 깊은 낭만적인 집이랍시고 다 쓰러져가는 폐가로 이사했을 때 고양이 프란시스는 집의 모습에 대경실색하는 동시에 그곳에 떠돌고 있는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에서 목이 물어 뜯겨져 죽어 있는 고양이 시체를 발견한다. 고양이 살해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연쇄살인으로 이어졌다. 이 집과 동네는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위험과 미스테리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호기심 많고 머리 좋은 고양이 프란시스는 주인이 집을 고친다며 난리를 피우고 있을 때 동료의 죽음을 추적하는 탐정이 된다.

오랫동안 추리소설을 읽지 않았는데다 원래 눈치가 없는 나는 끝까지 범인이 누군지 눈치채서 못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고양이 전문가라는 저자의 생생한 고양이 묘사도 흥미로웠다. 고양이는, 프란시스도 자신 있게 말하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흥미로운 존재니까.

그러나 살짝 황당했던 것은 시종 유머스럽고 시니컬하게 진행되던 책이 짐짓 심각한 척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나는 프란시스만큼이나 불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책이 갑자기 왜 이러지? 심각함의 요점은 인간과 과학이 휘두르는 무책임함과 잔인함이 초래하는 엄청난 비극과 그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성토였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그 비극이었다.

백번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심각함이 이 책과 겉돌았기 때문이다. 롯데리아에서 단무지를 찾았다는 어느 부부처럼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데도 잘못된 장소에서 했을 때의 황당함. 인간의 잔임함과 동물의 희생이란 소재라면 차라리 일본 만화 '견신'이 한 수 위다. 책을 읽고 시를 좋아하는 속 깊은 개와 눈이 맑은 아이는 비극에 어울리지만 시니컬한 고양이와 미련한 삼류작가는 풍자극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풍자극에 어울리는 인물들을 비극의 무대에 세워놓다니, 어설픈 퓨전요리와 다를 바 없었다. 

끝까지 범인을 눈치채지 못했음에도 크게 궁금하지 않았던 것도 어울리지 않는 장광설이 지겨워서였다.  '견신'을 읽으면서 소위 '인간의 과학적인 호기심'이란 것에 치를 떨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소재의 비극성이 긴박감을 더해주기는커녕 있던 스릴마저 빼앗아 간 상황이라니. 이 책은 시리즈로 나오는 것 같은데 2편부터는 매력적인 고양이 프란시스에게 어울리는 무대가 주어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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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한세상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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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한국에서 달동네촌이 사라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 또한 잊혀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 달동네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당장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었고, 가세가 망한 도시인들이 흘러드는 곳이었으며,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 이웃들은 서로 어울리고, 아이들은 같이 놀고, 때로는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좋은 말도 오갔을 것이다. 그리고 엄연한 한 구역으로써 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나 달동네가 철거되고 주민들은 뿔뿔이 사방의 셋방으로, 지하방으로 흩어지면서 유대감을 나누던 사람들은 이웃 없이 고립된 가난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사회는 그들의 존재를 급속도로 잊어갔다. 달동네를 철거하면서 뿌리 깊은 가난도 같이 철거됐다고 믿어졌다.

이제 가난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희망의 리퀘스트, 러브 하우스,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일시적인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눈물 한 방울과 지폐 한 장을 토해내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이미지로 포장되어서. 그래서 매체에서 퍼트리고 개개인의 머리 속에 고정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갈수록 고정적이고 진부해져서 이제는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하나같이 선하고, 하나같이 무력하며, 어른들은 찌들었고, 아이들은 순수하다.

'멋진 한세상'의 가장 큰 매력은, 잘 쓰여진 글들이 모두 그렇듯, 손쉬운 편견으로 고착된 어떤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한 데에 있다. 여기 임대아파트에 남겨진 남매가 있다. 엄마에 뒤이어 사라진 아빠가 남겨 놓은 끔찍할 정도로 맞춤법이 안 맞는 쪽지의 내용은 부모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사는 법이니 실종신고를 하면 정부보조금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아빠를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빠는 아빠가 남긴 쪽지를 보고, "뭐야 글씨가 엉망이잖아?" 했다.             "글씨 엉망인 편진 다 가짜지, 오빠?"            "그런 게 어딨어. 좀 쪽팔리는 거지."             "우리 이 편지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자."             "미쳤냐, 보여주게. 글씨라도 멋있으면 또 모르지. 어휴, 공부도 되게 못해가지구서는 우리보고는 공부하라고, 내 참, 야, 찢어."

아빠마저 잃은 충격을 딴소리를 주고 받으면서 감추는 남매의 모습은 미디어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작가들의 머리에서도 역시. 이건  "나는 생존을 위하여 소설을 썼을 뿐 소설을 위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내게 소설은 삶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그래서 난 공선옥에게 뻑 갔다.

여러 단편이 엮어져 있는 이 책에서 제일 웃겼던 부분은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라'라는 말이었는데, 이 책의 인물들을 정의해주는 말 또한 그것이다. 대부분은 여성이고, 어려서부터, 아니 부모대에서부터 계속된 가난을 이어받아 악바리처럼 살아가고 있는 30, 40대 엄마들이다. 남편이 없어도 잘 살아가는, 이 아니라, 남편이 없거나 무능력해서 죽도록 고생이지만 남편을 그리워하거나 기대지는 않는 악바리같은 엄마들. 순진할 만큼 젊지도 않지만 삶에 항복할 만큼 힘이 빠지지도 않은, 하지만 이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아 왔던 사람들.

공선옥이 다루는 이런 여성상이 도마 위에 많이 오르는 모양인데, 난 이 여인들이 올바른 여성상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있지만 이만큼 리얼한 여인들은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 진취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왜곡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역시 소시민의 소생인 내가 모골이 송연해질정도로.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의지할 데 없는 두 남자가 잠시나마 해피했던 때는 지구 반대편에 도망가 있을 때였다. 보아하니 '멋진 한 세상'의 인물들은 그럴 형편조차 안 되는 것 같다. 이들의 멋진 세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시 봐도 '운수좋은 날' 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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