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한세상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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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한국에서 달동네촌이 사라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 또한 잊혀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 달동네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당장 몸을 뉘일 수 있는 곳이었고, 가세가 망한 도시인들이 흘러드는 곳이었으며,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 이웃들은 서로 어울리고, 아이들은 같이 놀고, 때로는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좋은 말도 오갔을 것이다. 그리고 엄연한 한 구역으로써 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나 달동네가 철거되고 주민들은 뿔뿔이 사방의 셋방으로, 지하방으로 흩어지면서 유대감을 나누던 사람들은 이웃 없이 고립된 가난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사회는 그들의 존재를 급속도로 잊어갔다. 달동네를 철거하면서 뿌리 깊은 가난도 같이 철거됐다고 믿어졌다.

이제 가난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희망의 리퀘스트, 러브 하우스,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일시적인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눈물 한 방울과 지폐 한 장을 토해내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이미지로 포장되어서. 그래서 매체에서 퍼트리고 개개인의 머리 속에 고정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갈수록 고정적이고 진부해져서 이제는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하나같이 선하고, 하나같이 무력하며, 어른들은 찌들었고, 아이들은 순수하다.

'멋진 한세상'의 가장 큰 매력은, 잘 쓰여진 글들이 모두 그렇듯, 손쉬운 편견으로 고착된 어떤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한 데에 있다. 여기 임대아파트에 남겨진 남매가 있다. 엄마에 뒤이어 사라진 아빠가 남겨 놓은 끔찍할 정도로 맞춤법이 안 맞는 쪽지의 내용은 부모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사는 법이니 실종신고를 하면 정부보조금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아빠를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빠는 아빠가 남긴 쪽지를 보고, "뭐야 글씨가 엉망이잖아?" 했다.             "글씨 엉망인 편진 다 가짜지, 오빠?"            "그런 게 어딨어. 좀 쪽팔리는 거지."             "우리 이 편지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자."             "미쳤냐, 보여주게. 글씨라도 멋있으면 또 모르지. 어휴, 공부도 되게 못해가지구서는 우리보고는 공부하라고, 내 참, 야, 찢어."

아빠마저 잃은 충격을 딴소리를 주고 받으면서 감추는 남매의 모습은 미디어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작가들의 머리에서도 역시. 이건  "나는 생존을 위하여 소설을 썼을 뿐 소설을 위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내게 소설은 삶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그래서 난 공선옥에게 뻑 갔다.

여러 단편이 엮어져 있는 이 책에서 제일 웃겼던 부분은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라'라는 말이었는데, 이 책의 인물들을 정의해주는 말 또한 그것이다. 대부분은 여성이고, 어려서부터, 아니 부모대에서부터 계속된 가난을 이어받아 악바리처럼 살아가고 있는 30, 40대 엄마들이다. 남편이 없어도 잘 살아가는, 이 아니라, 남편이 없거나 무능력해서 죽도록 고생이지만 남편을 그리워하거나 기대지는 않는 악바리같은 엄마들. 순진할 만큼 젊지도 않지만 삶에 항복할 만큼 힘이 빠지지도 않은, 하지만 이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아 왔던 사람들.

공선옥이 다루는 이런 여성상이 도마 위에 많이 오르는 모양인데, 난 이 여인들이 올바른 여성상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있지만 이만큼 리얼한 여인들은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 진취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왜곡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역시 소시민의 소생인 내가 모골이 송연해질정도로.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의지할 데 없는 두 남자가 잠시나마 해피했던 때는 지구 반대편에 도망가 있을 때였다. 보아하니 '멋진 한 세상'의 인물들은 그럴 형편조차 안 되는 것 같다. 이들의 멋진 세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시 봐도 '운수좋은 날' 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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