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글을 해석(또는 해설)하는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보이는 아쉬운 점들 중 하나는 니체가 당시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생각만을 나열할 뿐이라는 점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구토이자 권태로 보았다. 그의 말대로 기독교는 현생이 아닌 영생을,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을 원했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는 니체 당시와는 상당히 다르다.

 

환생을 믿는 기독교인들, 천국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 천국이나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돈과 명예, 쾌락 등 현세의 가치들을 탐하는 기독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문한 부정하고 거부하고 체념하는 허무주의가 아닌 영원회귀라는 적극적 허무주의는 사실 그 스스로 경멸해 마지 않았던 관념적인 것과 많이 닮았다. 그의 말대로 영원회귀를 계속하면 초인이 되는가? 니체의 영감은 어떤 시인도 쉽게 따르지 못할 만큼 빛난다.

 

가령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란 말은 영감으로 빛나 아름답기까지 하다. 물론 나는 니체의 저 말을 "반쯤 괴물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괴물을 상대하겠는가."란 카잔차키스의 말('그리스인 조르바'에서)과 비교도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 을 나무를 보려다가 숲은 보지 못한 책, 문학적 비유가 난무하는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책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어쩌면 니체의 전 저서가 문학적 비유와 감성으로 빛나는 책들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니체의 책들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내 문제제기를 의미있는 논란거리로 볼 자신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 이의는 니체의 영감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이 제기하는 문제제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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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좋아하던 성경구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개역개정)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 앞에는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8절),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9절) 등의 구절이 있다.

지금 내 마음에 더 와닿는 구절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란 구절이다. 두 구절은 지금은 고통(불확실)스러우나 미래에는 그것들이 극복되어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 희망 등이 담긴 구절들이라는 점에서 같다. 또한 이 구절들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의 첫 구절(1비가)을 연상하게 한다.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물론 전자는 절망스럽지만 희망을 예기하게 하고 후자는 그냥 절망스럽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10비가)에서 릴케는 ˝그리고 우리, 솟아오르는 행복을 생각하는 우리는 감동을 느끼리라, 행복함이 내려 떨어질 때 우리를 거의 당황하게 하는 감동을˝이란 말로 희망을 전한다.

욥의 말은 거창하다. 바울의 말은 소박하다. 이 차이 때문에 나는 젊어서 좋아하던 구절을 놓고 소박한 바울의 말을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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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10-07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여기지만, 성경은 참으로 인간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인간적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몇 가지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신학자 송기득 박사가 말씀한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의미와 통하는 바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군상들은 어설프고 약하고 질투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벽 서 너시에 눈이 떠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어제 선생님께 홀로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으로 나를 설명했는데 정확한 의미는 나도 잘 알지 못해 고정희 시인의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찾아 본다. "새벽에 깨어 있는 자, 그 누군가는/ 듣고 있다 창틀 밑을 지나는 북서풍이나/ 대중의 혼이 걸린 백화점 유리창/ 모두들 따뜻한 밤의 적막 속에서도/ 손이라도 비어 있는 잡것들을 위하여 눈물 같은 즙을 내며 술틀을 밟는 소리...."  시인은 각 연의 마지막에서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란 말을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마지막 연에는 주의(周衣)라는 말이 나온다. "...그의 흰 주의(周衣)는 분노보다 진한/ 주홍으로 물들고 춤추는 발바닥 포도 향기는/ 떠서 여기 저기 푸른 하늘/ 갈잎 위에 나부끼는 소리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 사전을 찾아 보니 술틀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 송이를 넣고 발로 밟아 짜는 큰 통이라고...고정희 시인의 시에서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은 홀로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하며 애쓴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눈물  같은 즙을 내며 술틀을 밟고 아픈 심지 돋우며 홀로 술틀을 밟는다는...


주의(周衣)는 외투용으로 겉에 입는 한복이라고...나는 홀로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의미로 썼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심하며 준비한다는 의미가 깃든 구절이라 해야겠다. 너무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인... 25주기(週忌).... 살아 계셨다면 내년이 7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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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깨끗하다, 행동이나 행실이 깔끔하고 얌전하다, 외모나 모습 따위가 말쑥하고 맵시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는 조촐하다. 부사형은 조초리. 막연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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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에 성 어거스틴이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아마 착한 사람이지 않겠나, 생각하는 사람들은 몽땅 세례 좀 퍼부어야..라 쓴 분에게 어거스틴과 플라톤을,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결지어 생각하면 될까요? 란 댓글을 달았더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란 글이 달렸다.(새벽 3시 무렵) KBS classic FM에서 네빌 마리너의 타계를 알리는 특집으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을 보내고 있다. 새벽 아니 한 밤에 이런 일도 만들고 누리는(?) 것이 인터넷 공간이다.(아퀴나스를 아우구스티누스로 착각했음. 설령 착각하지 않았다 해도 그 분이 생각한 관계와 내가 생각한 관계는 맥락이 다른 것이라 해아 할 것 같다. 그보다는 사울과 바울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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