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일주일만)에 서점에 들렀습니다.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비벌리 엔젤),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데이비드 리코) 등 탐나는 사랑(심리학) 책이 눈에 띄었지만 철학 책들을 놓아두고 사기는 어려워 한번 훑어보고 말았습니다. 앞의 책은 자존감 없이 사랑에 휘둘리는 여자들에 대해 조언을 한 여성 심리 치유사의 책이고, 뒤의 책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성숙한 사랑을 위한 팁을 제시한 심리학자("융 심리학과 신화학에 해박")의 책입니다.
여성들에 대해 조언하는 책이어서가 아니라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에 더 마음이 갑니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가 어느 날 이런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결코 내 것이었던 적 없고 앞으로도 내 것일 수 없는 사람. 그는 그저 자신일 뿐..”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떠올리며 쓴 일기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강하고 담대했던 프리다도 디에고에 대해서만은 자존감 낮은 사랑을 했습니다.
프리다는 남편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과 불륜 사이인 것을 알고도 환상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보호와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소아마비로 마음이 약해진 것이 그런 사랑을 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가슴 아픕니다.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가 수긍할 만한 것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융 심리학 이야기를 했지만 몇 년 전 존 샌포드의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란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을 악마처럼 대하는 히스클리프는 여자의 개성화를 유도하는 아니무스를 상징한다는...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냥 폭풍처럼 몰아친 파괴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을까요?
신경정신의학자이자 비교행동학자인 보리스 시륄니크는 ‘사랑과 애착의 자연사(自然史) - 관계’에서 애착은 매우 값진 것이지만 애착의 부재는 더욱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파괴적으로 애착(이라기보다 집착이라 해야 옳을 것 같지만)했던 ‘워더링 하이츠’의 히스클리프를 두고 이런 인용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 않습니까? 신에 대한 사랑에도 에로티시즘적 요소가 있다는 시륄니크의 말을 들으며 그러니 필요한 것은 수행(修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토 케른버그는 ‘남녀관계의 사랑과 공격성’에서 자기애적 정신병리를 가진 커플이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무심한 채 그녀를 자기중심적으로 착취하는 경우는 자기애적 정신병리가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상호작용을 탐색해 보면 아내가 자신의 가학적(加虐的) 초자아를 무의식적으로 유발해 남편에게 투사(投射)하는 경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벌리 엔젤은 이런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토 케른버그는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각각 심리치유사와 정신분석가이기 때문일까요?
케른버그는 자기애성 성격은 사랑받기보다 감탄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파트너의 감탄은 거대자기의 자기 이상화를 지탱하고 재확인시켜줍니다. 에리히 프롬 역시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 필연적으로 잘못된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프롬은 문제를 풀 수 없는 곳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시지프스의 신화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절망시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20 페이지)
프롬은 분석을 하는 것은 유치한 외상적 기억이나 어떤 다른 원시적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여는 것, 내 안의 온갖 비이성적인 면을 향해 끊임없이 나를 열어보여서 마침내 나의 환자를 이해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프롬은 정신분석이란 하나의 비판적 사고 방식이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려는 의도로서 개인의 이익과 갈등을 빚는 사실상 매우 어려운 일이라 말합니다.(‘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35 페이지) 이 말을 들으며 생각하는 것은 샌포드의 분석 사례입니다.
만일 샌포드가 말했듯 ‘워더링 하이츠‘와 비슷한 사례를 겪는 커플을 보며 여자를 악마처럼 대하는 남자는 여자의 개성화를 유도하는 아니무스를 상징한다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일어나는 것은 갈등 이상이겠지만 그냥 갈등이라고만 하지요. 물론 이런 갈등은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해서라기보다 무리하게 해석을 한 까닭에 빚어지는 갈등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현장에서 건져올린 사례들을 분석해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니마 - 아니무스라는 이론을 무리하게(연역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의미입니다.
프롬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약화된 형태일망정 무력감을 느낀다는 가정이 옳다면 정신분석 의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170 페이지) 이 경우 의사는 직업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낙관론을 보이지만 근저에는 깊은 불신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샌포드를 공격하는 것이 주지(主旨)는 아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무리한 연역적 시각과 무기력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분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아니무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무의식‘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프롬의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들보다 앞선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를 결정론자로 볼 수 있겠다는 글입니다.
하지만 프롬에 의하면 이들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했고 인간이 인간 현존의 자연적, 역사적 조건 안에서 최대의 자유에 도달하기를 바랐습니다.(‘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59 페이지) 여기서 자유를 사랑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단 ‘최대의‘를 ’최선의‘로 함께 바꾸면서 말입니다.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니체, 베르그손과 함께 기쁨의 철학자로 부른 스피노자.(’철학, 기쁨을 길들이다‘) 그렇게 기쁨의 철학자이지만 사랑의 철학자라 해도 좋을 스피노자... 이 가을 스피노자를 읽으러 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