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을 부르는 미술관 - 착시와 환상, 신비감을 부여하다
셀린 들라보 지음, 김성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셀린 들라보의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의 표지를 장식하는 그림은 페레 보렐 델카소의 ‘비평에서 도망가기’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트롱프뢰유(trompe - l'oeil: 대상을 실물로 착각하게 할 만큼 생생하게 표현하는 미술 기법) 즉 착시 효과만 노리는 그림은 미술 비평가들의 조롱을 산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비평에서 도망가기’란 제목의 그림은 소년이 창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겁에 질린 채 도망치는 소년은 계속되는 비평에 질려 활동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화가의 불편한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들라보의 책이 예시한 미술에서의 기막힌 거짓말은 트롱프뢰유만이 아니다. 대상을 변형시켜 묘사하는 왜상화법, 이중적이거나 숨겨진 이미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원근법 등도 책이 소개하는 주요 기법이다. ‘눈을 속이다‘, ’또 다른 의미를 담아내다‘, ’형체를 만들다‘, ’시각을 탐구하다‘, ’현실을 초월하다‘ 등 다섯 챕터로 이루어진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은 ’착시와 환상, 신비감을 부여하다’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폼페이 신비의 별장에 있는 유명한 연작 벽화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의식을 연출한 것으로 장면과 장면은 그림 속 기둥에 의해 구분되어 있는데 워낙 기둥이 교묘하게 그려져 있어 현실 공간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야기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트롱프뢰유로 볼 수 있는 사례는 기원전 7세기 에트루리아(이탈리아)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자유(grisaile) 기법은 착시 효과를 내는 뛰어난 기법이다. 이는 채도가 낮은 한 가지 색의 농담(濃淡)과 명암만으로 조각 같은 입체감을 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면서도 예를 갖추어 표현해야 하는 종교적 인물을 묘사하기에 특히 적합했다. 얀 반 에이크는 석상처럼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그리자유 기법에 더해 벽감(壁龕) 같은 구조물을 흉내낸 그림을 더해 입체감을 끌어올렸다.


착시 효과의 대가로 빼놓을 수 없는 화가가 미켈란젤로이다. 그가 뛰어난 천장화(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비결은 시점(視點)을 하나로 두지 않고 연속적인 다수의 소실점(消失點)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감상자는 착시 효과를 사방에서 받음으로써 그림 속 장면들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존 드 안드레아의 ‘마그다(Magda)’는 주목할 만하다. 실물 크기로 실제 사람과 비슷한 그의 작품은 이상적 인체 비례에 관한 법칙과 상관 없이 모델에 따라 인체 비율이 달라진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미지에 전적으로 휘둘리는 사회 속에서 사진의 거짓된 면이 진실의 근거가 되어버렸음을 지적하는 한편 촛불을 극사실주의적 방식으로 묘사해 바니타스(vanitas; 세속적인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유리잔, 거울, 촛불, 깃털 등을 그리는 것) 장르를 조롱하기도 했다. 르네 비르츠는 사물을 10배로 크게 그림으로써 관람객을 착각의 함정에 걸려 들게 하면서도 그 사실을 곧바로 알려주는 기법을 썼다.


스티커, 포스터, 스텐실, 도자기 등을 이용한 새로운 거리 미술을 주목하게 된다. 이는 그래피티에 비해 회화적인 성격은 크고 그래픽적인 성격은 덜해 때로는 거대한 트롱프뢰유를 연출했다. 독일 화가 에드(1968 - )가 뮐러가 대표적이다. 카예타노 페러(1981 - )는 단순한 형태의 사물을 그것이 전시된 장소나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이상 ‘눈을 속이다’)


대상의 모습을 변형시켜 묘사하는 왜상(歪象) 화법은 그림 실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와 권력을 풍자하는 이상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에르하르트 쇤이 대표적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代謝)들’은 바니타스의 의미를 띤다. 이 그림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언급된 유명한 그림이다. 유명한 윌리엄 힐의 ‘아내와 장모’는 심리 테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마녀처럼 보이는 노파의 이미지를 교묘히 병치시킨 이 그림은 두 형태를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래 들여다 보면 그림이 저절로 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이는 시각 현상이란 원래 기만적이라는 사실과 관계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이용한 착시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합리적인 현실을 초월하고 전복시키는 세계,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전능함을 격찬하는 이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는 살바도르 달리였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저자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해독하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을 따라가 보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정신분석의 자유연상을 생각해보게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언어, 자유연상을 강조했다. 자유연상은 환자로 하여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 감정, 바람, 감각, 이미지, 기억 등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하는 정신분석 기법이다.(이상 ‘의미를 부여하다’)


미국의 사진 작가 신디 셔먼(1954 - )은 스스로 사진 모델이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을 작품에 바로 삽입하되 의상과 과도한 분장, 인공 보철구, 조악(粗惡)한 보석 등을 이용해 생명이 없는 마네킹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보는 사람이 곧 알아차릴 수 있는 인위적인 속임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여성의 미를 숭배하는 고상한 예술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것이다. 조각가이자 사진작가인 에반 페니(1953 - )는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속임 효과를 가진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는 실물과의 유사성을 추구하는 미술의 전통과 우리가 인간의 형체를 지각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마크 젠킨스(1970 - )는 거리의 미술가이다. 그는 공공장소에 엉뚱하면서도 시적인 방식의 작품을 남김으로써 타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의 설치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트롱프뢰유라 할 수 있다.“(113 페이지) 일본의 미술가 기미코 요시다(Kimiko Yoshida: 1963 - )는 사진 자화상을 정체성을 숨기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는 이런 작업을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사라지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란 말로 요약했다. 이는 라캉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이상 ’형체를 만들다‘)


조르주 쇠라의 분할화법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유명하다. 그랑자트란 커다란 잔(盞)을 의미한다, 섬이 잔 모양이기 때문이다. 물감을 혼합하지 않고(분할해서) 원색의 점을 캔버스에 찍어 그린 이 작품은 제작에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쇠라는 결이 있는 캔버스 표면에 순색의 작은 섬을 수없이 찍는 방식으로 그림의 각 부분을 표현함으로써 멀리서 봤을 때 서로 다른 색의 빛들이 섞여 원하는 색깔이 나타나게 했다. 색깔은 팔레트가 아닌 그림을 보는 사람의 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124 페이지)


척 클로스(1940 - )는 40년 넘게 사진에 담긴 얼굴만을 그렸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 사이의 간극(間隙)을 탐구해온 것이다. 재현은 결국 가공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조르주 루스(1947 - )는 르네상스 대가들의 눈 속임 그림과는 반대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그림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야요이 쿠사마(1929 - )는 감상자에게 작가 자신의 환각을 엿보고 체험하게 하는 작품들을 남겼다.(이상 ’시각을 탐구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폭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정해놓은 사물의 이름은 꼭 그것일 필요는 없으며 더 적합한 이름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마그리트에게 있어서 미술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실적인 재현의 외관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158 페이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 속 풍경은 원근법의 법칙을 정확히 따른 것처럼 보이며 오로지 규칙에만 집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풍경임을 알 수 있다.(164 페이지) 호안 폰트쿠베르타(1955 - )의 작품에서 사진은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세상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166 페이지)


마우리치오 카텔란(1960 - )은 착시 현상을 무례함과 불복종의 도구로 활용한다. 그의 작품들은 모든 형태의 권력과 제도화, 신성화를 조롱하는 새로운 형식의 바니타스라 할 수 있다.(이상 ’현실을 초월하다‘)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은 착각을 부르는 여러 기법들을 일람(一覽)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작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타 작가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기법을 고안해내는 데 상당한 노고와 철학적 마인드가 필요했으리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저자의 의도가 닿지 않아서이겠지만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복되는 바이지만 기원 전 7세기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발견된 트롱프뢰유 기법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림과 문화 유물 등이 전시된 곳(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양가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효과적이란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양국간 문화 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일본에서 온 여고생 쇼코가 ‘나’의 집에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가 편지를 보내는 설정,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어지는 상황이 추리소설적 흥미를 유발한다. 일본어 통역을 했던 할아버지와 나에게 쇼코는 각각 다른 상황과 분위기의 편지를 보냈다. 할아버지에게는 늘 밝은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는 어두운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쇼코를 보며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일 거라 생각한다.

 

쇼코는 자신의 삶으로 절대 침입할 수 없는 사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어야 그를 친구라 불렀다.... 소설 읽기가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는 도입부의 낯선 정경과 사람들에게 쉽게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쇼코를 찾아 나선 ‘나’는 쇼코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자신이 그에게 어떤 의미이기를 바란다. 마음 한쪽이 부서져버린 쇼코를 보며 ‘나’는 이상한 우월감에 흽싸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태민- 최순실 부녀의 등장은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에 나오는 히스클리프의 등장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아버지 히스클리프씨에게 발견되어 워더링 하이츠(저택)에 오게 된 것이고 최 부녀는 자발적으로 접근한 것이니 경우가 다르다.

 

하지만 파격과 충격적인 양상은 너무 닮았다. 출신을 알 수 없는, 집시로 추정되는 히스클리프는 온갖 파격과 기행을 연출하며 범죄라 불러 마땅한 집요한 복수를 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건다.(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힌 힌들리(캐서린의 오빠)에 대한 복수, 캐서린을 빼앗아간 에드거에 대한 복수...)

 

히스클리프씨의 딸이자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공이고 히스클리프에게 반해 파멸의 길을 걸은 캐서린은 ˝나 자신이 히스클리프˝라는 말을 남긴다. 이 부분이 ‘워더링 하이츠’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히스클리프는 ˝곡기를 끊고 밤마다 히스 들판을 정처 없이 헤매며 캐서린의 영혼이 편재하는 자연과 합일하듯 죽어˝(야마모토 시로 지음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학’ 70 페이지)간다. 픽션보다 더한 현실이라 해야 하는지 현실과 픽션의 닮은 꼴이라 해야 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하기 그렇지만 지난 주 선정릉 수업 시간에 나는 선생님께 정현왕후, 단경왕후 등이라 말하지 않고 정현왕후 윤씨, 단경왕후 신씨 등이라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입니까란 질문을 드렸다. 다행히(?) 그렇지 않다는 답이 돌아욌다. 사실 예의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명성황후 민씨라 하지 않고 민비(閔妃) 식의 호칭을 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가령 정조(正祖)라고는 해도 그의 이름인 이산(李蒜)을 이용해 그를 산왕(蒜王)이라고는 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불평등은 너무 많다. 이른 아침 강남순 교수님의 글을 읽었다. 대통령을 비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대부분 남자들)의 발언에 성차별 및 여성혐오적 감정이 강하게 섞여있는 것을 우려하고 새로운 전환을 촉구하는 글이다. 역시 좋은 글은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고 그에 답하는 형태로 글을 쓰게 하는 하는 힘이 있는 글이다. 평소 생각하는 바이지만 사람들은 남자가 잘못하면 그 사람 개인 문제로 사태를 대하지만 여자가 잘못하면 역시 여자는 안된다는 식의 말을 한다.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의 정서는 판도라의 상자(또는 항아리)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도 강화된다. 가령 ‘최** 판도라의 상자 열리는가‘ 식으로. 판도라는 온갖 불행을 넣어둔 상자(또는 항아리)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열었다고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최초의 여자이다. 하지만 김상준의 ’심리학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판도라는 헤시오도스에 의해 실상이 왜곡된 피해자이다.

 

남성신들이 득세함으로써 기존에 자리를 잡고 있던 여성신들은 남성신들에게 자리를 뺏기거나 격하되고 심지어 판도라처럼 악명높은 여자로 전락한 것이다. 헤시오도스 사태는 어쩌면 니체가 말한 소크라테스 - 에우리피데스에 의한 비극의 죽음 만큼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여성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닌 대통령에 방점을 두는 바른 참전(參戰)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이상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현의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따라 정의되는 건축의 의미를 천착한 책이다. 이는 일방적이지 않은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 주목했다는 의미이다. 저자에 의하면 길들이기는 양방향적이다. 사람이 집을 자신에 맞게 길들이는 것은 집에 길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에 인용되었듯 처칠은 "우리는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는 말을 했다. 처칠의 이 말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건축을 필요에 따라 자연과 인간의 머무름과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건축은 쉽게 바꿀(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건축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인간에 대한 사회적 이념이 건축적 선택의 기준이 될 때 건축은 인간의 불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36페이지)


그렇기에 길들이는 우리와 길들여지는 우리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백화점 명품관의 경우 빚어내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이고 길들여지는 것은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이다. 저자의 책은 길들이기에 봉사하는 건축(1부)과 인간을 길드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축(2부)에 대해 논한 책이다. 변화를 유연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사람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건물과 도시, 즉 공간을 조작하는 기술이다.(45페이지) 길들이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 어느 일부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가능해진다.(46페이지) 길들이기는 서원과 향교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조선의 교육기관이었던 서원과 향교는 선배 유학자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 곳이다.(64페이지)


서원과 향교의 출입문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영혼이 다니는 길로 나뉜다. 건축은 공간을 조작해 사람을 길들인다. 그것은 다른 문화나 예절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67페이지) 양반집과 서원, 향교는 공간 구조와 건물 형태로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궁궐은 가장 대표적이다.(69페이지)


경복궁은 배산임수에 따라 뒤에 삼각산을 두고 앞에 남산과 인왕산을 두었다.(남산은 안산, 인왕산은 조산. 안산案山은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산, 조산朝山은 그보다 큰 산.) 그런데 경복궁이 뒤로 삼각산을 두고 앞으로는 남산과 관악산을 두었다는 표현보다 경복궁이 삼각산을 등지고 남산과 관악산을 보는 곳에 들어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싶다.


물은 멀리 보이는 한강을 큰 물로 삼았는데 작은 물이 없어 청계천을 파 작은 물을 만들었다.(70페이지) 궁궐도 두 영역으로 나뉜다. 왕과 왕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들며 궐내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영역, 궐내에 기거하지 않으면서 궐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영역(궐내각사闕內各司)이다. 수정전은 대표적인 궐내각사이다. 임금이 자신을 알현하러 온 신하를 맞는 장소는 근정전과 사정전 뿐이다.


그래서 근정전과 사정전으로 가는 길에는 임금의 권위를 드러내고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장치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73 페이지) 임금이라 해서 근정전에 항상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74 페이지) 임금보다 더 높은 사람(가령 중국의 황제)이 나타나면 임금도 신하들처럼 근정전 바깥에서 그를 받들어야 했다.(74 페이지) 물론 중국의 황제가 아닌 그의 궐패(闕牌; 임금을 상징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 가지고 온 사람이다. 신하들이 길들여졌다는 것은 거기에 치밀하고 구체적인 의도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티브이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전각 사이의 골목을 지나 때로 나지막한 통문이나 작은 협문을 지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 오히려 고증을 제법 잘 한 것이라 말한다.(91 페이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푸코가 언급햐 원형감옥 생각을 할 법하다. 길들이는 것은 원형감옥만이 아니라 우리의 건물 그 중에서도 궁궐도 그런 의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양반집과 궁궐은 모두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98 페이지)


물론 길들인다고 하기보다 각인시킨다고 하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신분 질서가 아주 명확하게 반영된 도시다.(98 페이지) 수선(首善)은 한양의 별칭이다. 이는 국가적 예의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유교적 신분 질서를 강제하는 어떤 장치도 눈에 띄지 않는다.(107 페이지) 물론 오늘날의 도시도 사람을 길들인다. 현대 도시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동선의 효율성이다.(108 페이지)


동선의 효율성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생활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양의 총합이 가장 적은 공간을 의미한다.(물론 동선의 효율성이 도시 공간 구조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것 말고 정량화해서 누구라고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240, 241 페이지)

현대인들은 경제적 능력 유무로 나뉘는 공간의 위계적 구조에 길들여지고 있다.(113 페이지) 수도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길들이는 집단과 길들여지는 집단이 달라진다.(115 페이지) 양반집은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를 구분하는 것으로, 향교나 서원은 계단을 통해서, 궁궐은 임금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길들이기가 시도된다.(123 페이지)


서원과 향교에는 두 개의 주요 공간이 있다.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다. 이 가운데 우월한 공간은 대성전이다. (132 페이지)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 앞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 중 동서행각에 여느 행각과 형태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루를 설치해 근정전 앞마당의 우월함을 강조하도록 했다.


이것들은 모두 신분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예들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루는 경회루이다.(137 페이지) 길들임의 의도를 가진 건축에서 거리를 조작할 때는 물리적으로 실제 접근이 가능한 거리에서 심리적 거리만 멀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138, 139 페이지) 건축에서 심리적 거리를 조작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접근성을 통제해 심리적 거리를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영역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건축에서는 시선의 방향과 이동 방향, 좌우와 동서남북을 이용해 우월을 정한다.(146 페이지) 오른쪽보다 왼쪽이 대체로 우월하게 여겨진다. 경복궁의 경우 왕이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세자의 공간을 두고 오른쪽에 신하의 공간을 둔다. 세자의 공간은 동궁이고 신하들의 공간은 궐내각사이다.(146 페이지) 왕은 항상 남쪽을 면하도록 자리를 잡는다. 동양의 예법에서 왕은 남면(南面)하고 신하는 북배(北背)하게 되어 있다.(146, 147 페이지)


건축으로 길들이지 않기(2부)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건축을 길들이기의 도구로 사용해온 한편 그 의도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왔다는 말을 더한다. 저자는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특별한 구조를 언급한다. 이 홀은 형태적으로 대칭이나 주조를 피했다.


주조는 매스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중앙부에 가장 크고 높고 묵직해 보이는 부분을 만들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좌우의 시각적 무게를 비슷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조는 대칭 효과를 통해 균형과 안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시각적 초점을 형성하면서 주조가 다른 자리보다 중요한 위치임을 즉 우월한 위치임을 나타낸다.(208 페이지)


형태적으로 대칭이나 주조를 피했다는 것은 대칭이나 주조를 사용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더 나아가 아주 낮은 기단을 사용해 대칭이나 주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더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대칭이나 주조가 가져다주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를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공연장 내부로 통하는 여러 개의 출입구를 분산 배치했다. 그럼으로써 당연히 여러 개의 작은 로비가 만들어져 함께 분산 배치되었다. 심지어 내부 객석까지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분산 배치하고 이들 구역 간의 물리적 이동이나 시각적 소통을 제한하기까지 한다.


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공연에 집중하는 동안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부딪힘을 최소화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몰려 있음에도 번잡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이런 지향성은 공연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질을 제공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201 페이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설계자는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이다.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주조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연장을 나치 때의 불괘한 기억이 떠오르는 형태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샤로운은 출입구와 로비를 분산시키고 객석을 여러 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누었고, 공연장 안에서는 다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질서 정연하게 한곳을 바라보는 공간 구조가 나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다고 판단한 결과이다.(21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는 한스 샤로운이 나치식의 길들임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역시 또 다른 길들이기의 시작이라 말한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부정하는 길들이기라는 것이다.(212 페이지) 저자는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사회에서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우리사회에서 지극히 필요한 체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때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길들이기의 도구였다고 비판받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의 견해에 반대한다. 사람들이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원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도 의도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치는 이전 시대의 건축물들이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선전을 위한 건축을 구체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체제에 길들이기 위해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즉 적극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반면 한스 샤로운은 나치식의 길들이기가 싫어 그들이 실현시킨 건축 양식을 거부한 것이다. 즉 소극적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두 경우를 같은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길들이기에 초점을 맞춘 결과 길들이기와 새로운 길들이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거론한 사례들 가운데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우리가 공기처럼 숨쉬는 자본주의에 대한 멀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는 예법의 나라이다. 저자는 수도를 옮겨서 길들여짐을 깨운다는 글을 통해 수원 화성(華城)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의 화성 건설은 천도(遷都)에 버금가는 시도였다. 정조가 화성을 짓기로 한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정조는 화성 내에 대규모 상업시설과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정조는 화성으로의 인구 유입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개혁을 하고자 했다. 저자는 정조의 화성 건설을 한양을 중심으로 길들여진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려고 했다.(261 페이지) 다른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이렇듯 길들여진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고자 시도한 임금이 정조 말고 또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대중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습관이나 관습에는 주술적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279 페이지) 이 말에 이어지는 말은 건축가는 길들이기를 위해서만 봉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건축은 길들여진 상태를 흔드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건축은 다른 예술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289 페이지) 건축이 사람을 길들일 수 있고 새로운 가치를 길들임(주입시킴으로써라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말이 불편하면 새로운 가치를 ‘스미게 함으로써‘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건축과 철학 박사 학위를 가진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저자의 논지는 길들이기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하나의 모범 사례로 기억할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