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을 부르는 미술관 - 착시와 환상, 신비감을 부여하다
셀린 들라보 지음, 김성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셀린 들라보의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의 표지를 장식하는 그림은 페레 보렐 델카소의 ‘비평에서 도망가기’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트롱프뢰유(trompe - l'oeil: 대상을 실물로 착각하게 할 만큼 생생하게 표현하는 미술 기법) 즉 착시 효과만 노리는 그림은 미술 비평가들의 조롱을 산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비평에서 도망가기’란 제목의 그림은 소년이 창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겁에 질린 채 도망치는 소년은 계속되는 비평에 질려 활동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화가의 불편한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들라보의 책이 예시한 미술에서의 기막힌 거짓말은 트롱프뢰유만이 아니다. 대상을 변형시켜 묘사하는 왜상화법, 이중적이거나 숨겨진 이미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원근법 등도 책이 소개하는 주요 기법이다. ‘눈을 속이다‘, ’또 다른 의미를 담아내다‘, ’형체를 만들다‘, ’시각을 탐구하다‘, ’현실을 초월하다‘ 등 다섯 챕터로 이루어진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은 ’착시와 환상, 신비감을 부여하다’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폼페이 신비의 별장에 있는 유명한 연작 벽화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의식을 연출한 것으로 장면과 장면은 그림 속 기둥에 의해 구분되어 있는데 워낙 기둥이 교묘하게 그려져 있어 현실 공간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야기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트롱프뢰유로 볼 수 있는 사례는 기원전 7세기 에트루리아(이탈리아)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자유(grisaile) 기법은 착시 효과를 내는 뛰어난 기법이다. 이는 채도가 낮은 한 가지 색의 농담(濃淡)과 명암만으로 조각 같은 입체감을 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면서도 예를 갖추어 표현해야 하는 종교적 인물을 묘사하기에 특히 적합했다. 얀 반 에이크는 석상처럼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그리자유 기법에 더해 벽감(壁龕) 같은 구조물을 흉내낸 그림을 더해 입체감을 끌어올렸다.


착시 효과의 대가로 빼놓을 수 없는 화가가 미켈란젤로이다. 그가 뛰어난 천장화(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비결은 시점(視點)을 하나로 두지 않고 연속적인 다수의 소실점(消失點)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감상자는 착시 효과를 사방에서 받음으로써 그림 속 장면들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존 드 안드레아의 ‘마그다(Magda)’는 주목할 만하다. 실물 크기로 실제 사람과 비슷한 그의 작품은 이상적 인체 비례에 관한 법칙과 상관 없이 모델에 따라 인체 비율이 달라진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미지에 전적으로 휘둘리는 사회 속에서 사진의 거짓된 면이 진실의 근거가 되어버렸음을 지적하는 한편 촛불을 극사실주의적 방식으로 묘사해 바니타스(vanitas; 세속적인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유리잔, 거울, 촛불, 깃털 등을 그리는 것) 장르를 조롱하기도 했다. 르네 비르츠는 사물을 10배로 크게 그림으로써 관람객을 착각의 함정에 걸려 들게 하면서도 그 사실을 곧바로 알려주는 기법을 썼다.


스티커, 포스터, 스텐실, 도자기 등을 이용한 새로운 거리 미술을 주목하게 된다. 이는 그래피티에 비해 회화적인 성격은 크고 그래픽적인 성격은 덜해 때로는 거대한 트롱프뢰유를 연출했다. 독일 화가 에드(1968 - )가 뮐러가 대표적이다. 카예타노 페러(1981 - )는 단순한 형태의 사물을 그것이 전시된 장소나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이상 ‘눈을 속이다’)


대상의 모습을 변형시켜 묘사하는 왜상(歪象) 화법은 그림 실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와 권력을 풍자하는 이상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에르하르트 쇤이 대표적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代謝)들’은 바니타스의 의미를 띤다. 이 그림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언급된 유명한 그림이다. 유명한 윌리엄 힐의 ‘아내와 장모’는 심리 테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마녀처럼 보이는 노파의 이미지를 교묘히 병치시킨 이 그림은 두 형태를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래 들여다 보면 그림이 저절로 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이는 시각 현상이란 원래 기만적이라는 사실과 관계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이용한 착시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합리적인 현실을 초월하고 전복시키는 세계,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전능함을 격찬하는 이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는 살바도르 달리였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저자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해독하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을 따라가 보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정신분석의 자유연상을 생각해보게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언어, 자유연상을 강조했다. 자유연상은 환자로 하여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 감정, 바람, 감각, 이미지, 기억 등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하는 정신분석 기법이다.(이상 ‘의미를 부여하다’)


미국의 사진 작가 신디 셔먼(1954 - )은 스스로 사진 모델이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을 작품에 바로 삽입하되 의상과 과도한 분장, 인공 보철구, 조악(粗惡)한 보석 등을 이용해 생명이 없는 마네킹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보는 사람이 곧 알아차릴 수 있는 인위적인 속임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여성의 미를 숭배하는 고상한 예술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것이다. 조각가이자 사진작가인 에반 페니(1953 - )는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속임 효과를 가진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는 실물과의 유사성을 추구하는 미술의 전통과 우리가 인간의 형체를 지각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마크 젠킨스(1970 - )는 거리의 미술가이다. 그는 공공장소에 엉뚱하면서도 시적인 방식의 작품을 남김으로써 타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의 설치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트롱프뢰유라 할 수 있다.“(113 페이지) 일본의 미술가 기미코 요시다(Kimiko Yoshida: 1963 - )는 사진 자화상을 정체성을 숨기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는 이런 작업을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사라지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란 말로 요약했다. 이는 라캉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이상 ’형체를 만들다‘)


조르주 쇠라의 분할화법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유명하다. 그랑자트란 커다란 잔(盞)을 의미한다, 섬이 잔 모양이기 때문이다. 물감을 혼합하지 않고(분할해서) 원색의 점을 캔버스에 찍어 그린 이 작품은 제작에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쇠라는 결이 있는 캔버스 표면에 순색의 작은 섬을 수없이 찍는 방식으로 그림의 각 부분을 표현함으로써 멀리서 봤을 때 서로 다른 색의 빛들이 섞여 원하는 색깔이 나타나게 했다. 색깔은 팔레트가 아닌 그림을 보는 사람의 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124 페이지)


척 클로스(1940 - )는 40년 넘게 사진에 담긴 얼굴만을 그렸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 사이의 간극(間隙)을 탐구해온 것이다. 재현은 결국 가공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조르주 루스(1947 - )는 르네상스 대가들의 눈 속임 그림과는 반대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그림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야요이 쿠사마(1929 - )는 감상자에게 작가 자신의 환각을 엿보고 체험하게 하는 작품들을 남겼다.(이상 ’시각을 탐구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폭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정해놓은 사물의 이름은 꼭 그것일 필요는 없으며 더 적합한 이름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마그리트에게 있어서 미술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실적인 재현의 외관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158 페이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 속 풍경은 원근법의 법칙을 정확히 따른 것처럼 보이며 오로지 규칙에만 집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풍경임을 알 수 있다.(164 페이지) 호안 폰트쿠베르타(1955 - )의 작품에서 사진은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세상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166 페이지)


마우리치오 카텔란(1960 - )은 착시 현상을 무례함과 불복종의 도구로 활용한다. 그의 작품들은 모든 형태의 권력과 제도화, 신성화를 조롱하는 새로운 형식의 바니타스라 할 수 있다.(이상 ’현실을 초월하다‘)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은 착각을 부르는 여러 기법들을 일람(一覽)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작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타 작가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기법을 고안해내는 데 상당한 노고와 철학적 마인드가 필요했으리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저자의 의도가 닿지 않아서이겠지만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복되는 바이지만 기원 전 7세기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발견된 트롱프뢰유 기법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림과 문화 유물 등이 전시된 곳(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양가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효과적이란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