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이상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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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의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따라 정의되는 건축의 의미를 천착한 책이다. 이는 일방적이지 않은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 주목했다는 의미이다. 저자에 의하면 길들이기는 양방향적이다. 사람이 집을 자신에 맞게 길들이는 것은 집에 길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에 인용되었듯 처칠은 "우리는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는 말을 했다. 처칠의 이 말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건축을 필요에 따라 자연과 인간의 머무름과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건축은 쉽게 바꿀(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건축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인간에 대한 사회적 이념이 건축적 선택의 기준이 될 때 건축은 인간의 불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36페이지)


그렇기에 길들이는 우리와 길들여지는 우리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백화점 명품관의 경우 빚어내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이고 길들여지는 것은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이다. 저자의 책은 길들이기에 봉사하는 건축(1부)과 인간을 길드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축(2부)에 대해 논한 책이다. 변화를 유연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사람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건물과 도시, 즉 공간을 조작하는 기술이다.(45페이지) 길들이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 어느 일부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가능해진다.(46페이지) 길들이기는 서원과 향교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조선의 교육기관이었던 서원과 향교는 선배 유학자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 곳이다.(64페이지)


서원과 향교의 출입문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영혼이 다니는 길로 나뉜다. 건축은 공간을 조작해 사람을 길들인다. 그것은 다른 문화나 예절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67페이지) 양반집과 서원, 향교는 공간 구조와 건물 형태로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궁궐은 가장 대표적이다.(69페이지)


경복궁은 배산임수에 따라 뒤에 삼각산을 두고 앞에 남산과 인왕산을 두었다.(남산은 안산, 인왕산은 조산. 안산案山은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산, 조산朝山은 그보다 큰 산.) 그런데 경복궁이 뒤로 삼각산을 두고 앞으로는 남산과 관악산을 두었다는 표현보다 경복궁이 삼각산을 등지고 남산과 관악산을 보는 곳에 들어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싶다.


물은 멀리 보이는 한강을 큰 물로 삼았는데 작은 물이 없어 청계천을 파 작은 물을 만들었다.(70페이지) 궁궐도 두 영역으로 나뉜다. 왕과 왕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들며 궐내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영역, 궐내에 기거하지 않으면서 궐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영역(궐내각사闕內各司)이다. 수정전은 대표적인 궐내각사이다. 임금이 자신을 알현하러 온 신하를 맞는 장소는 근정전과 사정전 뿐이다.


그래서 근정전과 사정전으로 가는 길에는 임금의 권위를 드러내고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장치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73 페이지) 임금이라 해서 근정전에 항상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74 페이지) 임금보다 더 높은 사람(가령 중국의 황제)이 나타나면 임금도 신하들처럼 근정전 바깥에서 그를 받들어야 했다.(74 페이지) 물론 중국의 황제가 아닌 그의 궐패(闕牌; 임금을 상징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 가지고 온 사람이다. 신하들이 길들여졌다는 것은 거기에 치밀하고 구체적인 의도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티브이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전각 사이의 골목을 지나 때로 나지막한 통문이나 작은 협문을 지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 오히려 고증을 제법 잘 한 것이라 말한다.(91 페이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푸코가 언급햐 원형감옥 생각을 할 법하다. 길들이는 것은 원형감옥만이 아니라 우리의 건물 그 중에서도 궁궐도 그런 의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양반집과 궁궐은 모두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98 페이지)


물론 길들인다고 하기보다 각인시킨다고 하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신분 질서가 아주 명확하게 반영된 도시다.(98 페이지) 수선(首善)은 한양의 별칭이다. 이는 국가적 예의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유교적 신분 질서를 강제하는 어떤 장치도 눈에 띄지 않는다.(107 페이지) 물론 오늘날의 도시도 사람을 길들인다. 현대 도시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동선의 효율성이다.(108 페이지)


동선의 효율성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생활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양의 총합이 가장 적은 공간을 의미한다.(물론 동선의 효율성이 도시 공간 구조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것 말고 정량화해서 누구라고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240, 241 페이지)

현대인들은 경제적 능력 유무로 나뉘는 공간의 위계적 구조에 길들여지고 있다.(113 페이지) 수도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길들이는 집단과 길들여지는 집단이 달라진다.(115 페이지) 양반집은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를 구분하는 것으로, 향교나 서원은 계단을 통해서, 궁궐은 임금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길들이기가 시도된다.(123 페이지)


서원과 향교에는 두 개의 주요 공간이 있다.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다. 이 가운데 우월한 공간은 대성전이다. (132 페이지)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 앞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 중 동서행각에 여느 행각과 형태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루를 설치해 근정전 앞마당의 우월함을 강조하도록 했다.


이것들은 모두 신분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예들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루는 경회루이다.(137 페이지) 길들임의 의도를 가진 건축에서 거리를 조작할 때는 물리적으로 실제 접근이 가능한 거리에서 심리적 거리만 멀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138, 139 페이지) 건축에서 심리적 거리를 조작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접근성을 통제해 심리적 거리를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영역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건축에서는 시선의 방향과 이동 방향, 좌우와 동서남북을 이용해 우월을 정한다.(146 페이지) 오른쪽보다 왼쪽이 대체로 우월하게 여겨진다. 경복궁의 경우 왕이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세자의 공간을 두고 오른쪽에 신하의 공간을 둔다. 세자의 공간은 동궁이고 신하들의 공간은 궐내각사이다.(146 페이지) 왕은 항상 남쪽을 면하도록 자리를 잡는다. 동양의 예법에서 왕은 남면(南面)하고 신하는 북배(北背)하게 되어 있다.(146, 147 페이지)


건축으로 길들이지 않기(2부)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건축을 길들이기의 도구로 사용해온 한편 그 의도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왔다는 말을 더한다. 저자는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특별한 구조를 언급한다. 이 홀은 형태적으로 대칭이나 주조를 피했다.


주조는 매스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중앙부에 가장 크고 높고 묵직해 보이는 부분을 만들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좌우의 시각적 무게를 비슷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조는 대칭 효과를 통해 균형과 안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시각적 초점을 형성하면서 주조가 다른 자리보다 중요한 위치임을 즉 우월한 위치임을 나타낸다.(208 페이지)


형태적으로 대칭이나 주조를 피했다는 것은 대칭이나 주조를 사용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더 나아가 아주 낮은 기단을 사용해 대칭이나 주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더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대칭이나 주조가 가져다주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를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공연장 내부로 통하는 여러 개의 출입구를 분산 배치했다. 그럼으로써 당연히 여러 개의 작은 로비가 만들어져 함께 분산 배치되었다. 심지어 내부 객석까지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분산 배치하고 이들 구역 간의 물리적 이동이나 시각적 소통을 제한하기까지 한다.


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공연에 집중하는 동안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부딪힘을 최소화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몰려 있음에도 번잡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이런 지향성은 공연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질을 제공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201 페이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설계자는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이다.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주조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연장을 나치 때의 불괘한 기억이 떠오르는 형태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샤로운은 출입구와 로비를 분산시키고 객석을 여러 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누었고, 공연장 안에서는 다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질서 정연하게 한곳을 바라보는 공간 구조가 나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다고 판단한 결과이다.(21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는 한스 샤로운이 나치식의 길들임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역시 또 다른 길들이기의 시작이라 말한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부정하는 길들이기라는 것이다.(212 페이지) 저자는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사회에서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우리사회에서 지극히 필요한 체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때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길들이기의 도구였다고 비판받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의 견해에 반대한다. 사람들이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원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도 의도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치는 이전 시대의 건축물들이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선전을 위한 건축을 구체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체제에 길들이기 위해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즉 적극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반면 한스 샤로운은 나치식의 길들이기가 싫어 그들이 실현시킨 건축 양식을 거부한 것이다. 즉 소극적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두 경우를 같은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길들이기에 초점을 맞춘 결과 길들이기와 새로운 길들이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거론한 사례들 가운데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우리가 공기처럼 숨쉬는 자본주의에 대한 멀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는 예법의 나라이다. 저자는 수도를 옮겨서 길들여짐을 깨운다는 글을 통해 수원 화성(華城)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의 화성 건설은 천도(遷都)에 버금가는 시도였다. 정조가 화성을 짓기로 한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정조는 화성 내에 대규모 상업시설과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정조는 화성으로의 인구 유입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개혁을 하고자 했다. 저자는 정조의 화성 건설을 한양을 중심으로 길들여진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려고 했다.(261 페이지) 다른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이렇듯 길들여진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고자 시도한 임금이 정조 말고 또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대중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습관이나 관습에는 주술적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279 페이지) 이 말에 이어지는 말은 건축가는 길들이기를 위해서만 봉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건축은 길들여진 상태를 흔드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건축은 다른 예술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289 페이지) 건축이 사람을 길들일 수 있고 새로운 가치를 길들임(주입시킴으로써라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말이 불편하면 새로운 가치를 ‘스미게 함으로써‘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건축과 철학 박사 학위를 가진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저자의 논지는 길들이기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하나의 모범 사례로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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