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아키텍처 - 현대건축과 공간 그리고 철학적 담론
박영욱 지음 / 향연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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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의 '필로 아키텍처'는 철학자의 책이다. 저자는 건축에 대한 전공 지식이 없었으며 지금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신이 건축 철학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현대건축이 무성한 담론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의 의도는 현대 건축이 쏟아내는 철학적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한 비판에 있다. 저자는 공간을 사물들 간의 관계의 집합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닌 사회적 소통과 관련있는 배치임을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적 공간론은 공간을 일상적인 주관적 체험과 분리시키고 객관적 차원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조형적 외관만을 추구하는 건축은 결국 나르시시즘적이다.(나는 이를 자폐적이라 말하고 싶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다.) 반면 자기표현이나 유희에만 탐닉하는 눈은 대상에 대한 친밀감을 상실해 허무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25 페이지) 건축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공간(장소)이다.


공간은 항상 공간화하는 공간 즉 동사적 공간이다.(27 페이지) 저자는 건축한다는 것과 거주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임을 주장한다. 현대건축은 투명성에 대한 반발로 해석될 수 있다.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그것의 건축적 버전인 르코르뷔지에의 합리적 건축은 투명성을 지향했다.(39 페이지) 메를로 퐁티는 우리의 삶에서 기하학적인 공간 또는 객관적인 세계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세계를 현상적 장(場)이라 불렀다. 우리가 파란색에서 갖게 되는 느낌을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교감할 수 있는 공통된 체험에서 나온다.(55 페이지) 중요한 것은 공통된 체험이란 말이다. 이 말 때문에 객관적 지평이란 말이 가능하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의 활동이란 의미를 창출하는 체험의 근원적 활동이다.(57 페이지)


기하학적 공간 이전에 체험된 공간이 있다. 따라서 공간과 관련된 건축의 임무는 단지 기하학적 공간 창출에만 주목하지 않고 더 근원적인 공간인 일상의 체험 공간 즉 현상학적 공간 창출에 주목해야 한다. 경험주의자들은 인간과 상관 없이 공간적 질서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지성주의자들은 우리가 거주하는 이 공간이 우리들로부터 독립된 질서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60 페이지)


메를로 퐁티는 이 두 대립된 세계관을 비판한다. 두 입장은 공간이 구체적인 맥락 속에 있는 대상의 상황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순수한 위치를 지닌다고 가정한다.(60, 61 페이지) 메를로 퐁티는 심리학자 스트랜튼의 실험을 토대로 위, 아래와 같은 공간의 순수한 위치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61 페이지) 메를로퐁티는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주의자들의 공간도 아니고 지성주의자들의 공간도 아닌 제3의 공간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65 페이지)


메를로퐁티의 핵심적인 주장은 공간이란 사물 또는 내용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65 페이지)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우리에게 공간이란 우리 몸의 체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에 정박(碇泊)된다. 공간은 우리의 몸이 정박해 있는 질서의 표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몸은 미리 주어진 공간에 정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은 우리의 몸이 정박하고 있는 방식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68 페이지)


엘리자베스 그로츠(Elizabeth Grosz)는 곤충학자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의 곤충의 보호색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공간론과 관련해 설명하는데 그에 따르면 곤충이 몸 색깔을 환경과 일치시키는 것은 신경쇠약의 표현이다.(69 페이지) 어린 유충이 자신의 공간적 위치를 파악할 수도 없을 뿐더러 공간적 방향을 지닐 수 없으므로 그런 불안의 표현으로 환경에 자신의 몸 색깔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곤충이 보호색을 띠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런 현상으로 오히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카유아는 이를 위험한 사치라 부른다.(68, 69 페이지)


메를로퐁티가 강조하는 것은 공간이란 우리의 지각 경험과 동떨어져서 미리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며 우리 지성의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71 페이지) 공간은 우리 몸이 이 세상과 관계 맺는 양태이다.(71 페이지) 물론 메를로퐁티가 공간이 우리 바깥의 실재세계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분명 우리 몸의 외부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공간은 우리에게 빈 껍데기나 공간 자체로 나타날 수 없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현상은 객관 자체도 아니고 주관 자체도 아닌 객관과 주관의 만남이다.(71, 72 페이지) 의미란 방향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이때 방향은 기하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향적 태도(지향성)에 의해 만들어진다.(73 페이지) 모든 공간적 체계는 우리의 일상적 체험의 표현이자 우리의 몸이 세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가능적 조건이다.(79 페이지) 현상학적 공간론의 취지는 기하학적 공간을 유일한 실재 공간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입장에 대한 거부에 있다.(79 페이지)


건축 디자인과 시공은 없던 공간을 갑자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변형하여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건축이란 원래 주어진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과거와 다른 공간적 체험을 만드는 것이다.(80 페이지) 공간 디자인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체험 공간과 추상적인 기하학적 공간은 상보적이며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81 페이지)


스티븐 홀(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건축에 응용한 건축가)은 건축이란 그저 텅 빈 공간에 건물을 만들어 그곳에 세우는 일이 아니라 말한다. 건축이란 특정 대지에 건물을 세움으로써 하나의 맥락을 창출하는 것이다.(83 페이지) 스티븐 홀은 공간의 느낌을 항상 변하게 하는 빛을 중시했다. 그는 빛을 공간의 효과로 본 것이 아니라 공간을 빛의 효과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다.(87 페이지)


스티븐 홀은 하나의 단일한 시점(소실점)을 전제한 원근법을 거부한다. 원근법이란 2차원적인 평면에 3차원적인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데 이미 3차원적인 공간을 다루는 건축에 2차원적 회화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91 페이지)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근대 공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을 보편적인 공간으로 상정함으로써 사실상 장소로서의 공간이 갖는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의미를 완전히 박탈한다는 것이다.(157 페이지)


스티븐 홀은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조망을 전제하는 모더니즘 건축이 아닌 상이하고 다양한 부분적인 조망의 중첩(重疊)으로 이루어지는 건축을 긍정했다. 건축에서 미학이나 철학적 가치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미학적 가치나 철학적 가치가 건축의 일차적인 목표가 될 경우 자칫 일상을 위한 공간이 아닌 담론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될 수 있다.(102 페이지) 근대 건축의 추상성은 공간을 철저하게 시각적인 어떤 것으로만 봄으로써 발생했다.


모더니즘 건축은 기능주의를 표방했지만 사회적 의미, 심리적 의미, 미학적 의미에서의 기능 등은 고려하지 않고 기능을 역학적 의미나 경제적 의미로 환원하고 추상화했기 때문에 문제적이었다. 저자는 장소의 상실(비장소화: 실체성이 없고 아무 특이성이 없는 공간이 되는 것, 획일화, 몰개성화)이 지나치게 기능이나 합리성에 치중하는 근대건축에 바탕을 근대적 공간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144 페이지)


전근대 도시와 근대 도사를 비선형성과 선형성으로 구분하고 선형적 체계를 구현한 건물이야말로 바람직한 건축의 이상으로 본 르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 건축은 세계의 모든 도시 공간을 획일화했다.(157 페이지) 건축에서 모더니즘 공간에 대한 거부는 기능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158 페이지) 건축에서 다이어그램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주어져 있지 않다.


대략 느슨하게 정의한다면 프로그램의 정량적 분석 또는 직관적인 해석을 시각화한 결과 유사한 의미를 암시할 뿐인 무분별한 이미지, 순수하게 자율성만을 갖는 기하학적 단위, 전체의 구성을 지배하는 형식의 틀, 구체성을 갖지 않는 모든 종류의 도면을 의미한다.(175 페이지) 들뢰즈에게서 다이어그램은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이지만 ‘감각의 논리’라는 저서 외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177 페이지)


들뢰즈는 푸코에게서 다이어그램이란 용어가 유래했다고 말한다. 푸코에게서 다이어그램이란 권력을 실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눈에 보이는 명확한 제도나 장치와 같은 거시적 모델이 아닌 미시적 권력이 작동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틀 또는 배치 관계를 의미한다. 들뢰즈는 푸코가 말하는 다이어그램은 칸트적 도식론에 대한 유비(類比)라고 말한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칸트의 도식론은 재현주의 또는 동일성의 사유를 피하기 위한 사유의 방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재현은 현실에 있는 차이를 다 제거하는 폭력성을 띠는 논리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재현의 논리란 모든 존재를 개념으로 포섭하는 동일성의 논리이다.(178 페이지) 들뢰즈는 동일성에 의한 재현의 논리에 갇히지 않고 존재가 지닌 다양체로서의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종합의 범주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들뢰즈는 동일성에 의한 폭력적 종합이 아닌 차이를 긍정하는 종합적 범주의 가능성을 칸트의 도식론에서 발견했다,


칸트의 도식은 개념에 의한 종합이 아닌 감성적인 종합의 형식으로 제시된다.(181 페이지) 개념은 지성의 산물이지만 도식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우리는 삼각형이란 개념을 알고 있어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상상할 수 없으면 삼각형을 알 수 없다.(182 페이지) 도식은 개별적 이미지가 아니라 삼각형 일반에 대한 이미지이다. 도식은 개별적인 삼각형의 이미지이기보다 삼각형의 이미지를 생성하는 규칙을 의미한다.


도식이란 다양한 차이와 변종을 포함한 느슨한 종합이다.(모든 삼각형은 개념적으로 동일하지만 이미지로 상상할 수 있는 삼각형은 무수히 다양하다.) 지성이 아닌 지각의 수동적 종합에 의해 얻어진 느슨한 체계를 들뢰즈는 계열이라 부른다. 도식은 확고하게 틀지어진 동일성의 체계가 아닌 변이와 다양, 체계의 일탈적 요소를 자체에 담고 있는 느슨한 체계이다.(185 페이지)


베이컨의 회화가 다이어그램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현실 세계의 흔적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과의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88 페이지) ‘필로 아키텍처’는 어려운 개념들에 대한 정리가 돋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어려운 개념들을 다루어서인지 건축과 철학 사이에서 맴돈다는 느낌을 준다. 스토리가 있는 건축 이야기를 기대한 내 선택 오류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난해한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건축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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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가?” 릴케가 한 젊은 시인에게 던진 물음을 생각한다. 진정성과 필연의 사유를 갖추었을 때만 글을 쓰라는 말이지만 이 말을 나무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잘 알다시피 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펄프의 원료로 쓰인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나무의 가치는 여럿이지만 글 읽는 사람에게, 그리고 책 쓰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을 보면 나무는 원 모습 그대로 수많은 글자를 받아준 소중한 바탕이 되어 주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장경에 쓰인 나무는 정교한 조정을 거쳤다.

각 경판(經板)들의 크기 편차가 0.2에서 0.5 cm의 길이, 0.1에서 0.6 cm의 너비에 지나지 않는다(‘문화 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131 페이지)고 하니 놀랍다.

세상의 저자들은 자신이 왜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도 하다. ‘사기’를 쓰기 위해 시간 즉 목숨 보전이 필요해 궁형(宮刑)의 수치(羞恥)를 감내한 사마천을 생각해본다.

암이 뇌로 전이되어 감마선 치료를 받을 때도 치료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안경을 벗지 않았던 일본의 실험물리학자 도쓰카 요지(戶塚洋二: 2008년 7월 타계)도 그렇다. 그 결과 나온 책이 ‘과학의 척도‘이다.

책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갖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의적절할 것 같지만 지리멸렬의 초라한 생각과 어법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배울 바가 있겠는가, 란 생각을 하게 하는 ‘박근혜의 말’이 나왔다.

선택(구입)을 포기하며 이런 생각들을 해보는 아침이다. 저자가 진정성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상 역시 그래야 한다. 아니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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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독서 이후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공감하고 또 공감하며 읽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그의 후속작들을 읽지 못했다.

감동하면 전작주의자가 되려는 즉 가능한 한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으려는 내 성향, 그리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내 입장을 감안하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물론 그의 글쓰기 정체성이 페미니즘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은 여성주의를 지향하지만 바른 앎과 삶을 추구한다. 최근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논한 글을 읽었다. 은유(隱喻)가 거의 없고 예쁘게 쓰려 하지 않는다는 글이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 오늘 그의 글을 읽었다.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거나 무식해서라는 글이다.

공감한다. 말이 없는 남자는 위험하다는 그의 일갈(一喝) 역시 인상적이다. 곁가지를 과감하게 치고 예외를 괄호치는 그의 쾌도난마는 지나치게 보일 수 있지만 그의 불찰(?)은 ˝예외가 있지만˝ 같은 말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렇게 진의를 헤아리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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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8일 북촌(北村)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 중 두 가지가 관심을 끈다. 하나는 종로구 계동에 자리한 유심(惟心)이라는 인쇄소(발행소) 이야기이다. ‘유심(惟心)‘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발행한 불교 잡지이다.(惟心社는 ‘유심‘지를 발행하는 곳이다.)

불교 잡지이니 오직 유(唯)를 쓸 법한데 사유할 유(惟)를 쓴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惟는 사유할 유 외에 오직 유와 다만 유로도 쓰이니 생각과 오직을 두루 의미하는 말이다. 유(惟)는 유(唯)이다.

유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불교의 일체유심조를, 들뢰즈가 말한 욕망과 힘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맥락에서 욕망은 활동을 하게 하는 추진력을 의미하고, 힘은 그것을 실행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임기택 지음 ‘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57 페이지)

불교에서 마음은 시동(始動)을 걸 뿐 실제 에너지가 될 수 없다. 한 유식(唯識) 전공자도 유식(唯識)을 일체유심조로 보는 것은 오해라 말한다.(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146 페이지)

다른 하나는 합각 이야기이다. 합각은 지붕 위 양옆의 박공(牔栱)으로 ㅅ자 모양을 이루는 각이다. 박공지붕은 책을 펼쳐 엎어놓은 모양(삼각형)을 한 지붕이다. 합각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은 스팬드럴(spandrel)이다.

스팬드럴은 아치의 양편과 위쪽에 있는 3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스팬드럴은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해 유명해졌다.

(스팬드럴과 합각을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유사한 지점에 유사하게 위치하는 두 가지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수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굴드는 스팬드럴의 그림 또는 모자이크가 멋이 있기에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볼만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계된 것이 아니라 무거운 돔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란 의미이다.

마음은 전부가 아니고 인간은 우연한 진화의 산물이란 말이 실망스러운가? 겸허하게 받아들일 진실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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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에드먼드 리치의 ‘성서의 구조 인류학’이란 책에서이다.

리치는 이 책에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 vs 이야기의 끝 부분, 누룩을 넣지 않은 빵 vs 포도주, 사회적 예절의 상징 vs 무절제의 상징, 도시의 문화 vs 광야의 자연 등 대립되는 여러 항목들을 제시한다.
세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 즉 이원적으로 선명하게 나뉘는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생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에서도 이원적 대립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독립적인 아름다움 즉 용도(효용성)와 무관한 아름다움을 참된 것이라 생각했다.

칸트는 용도가 있는 아름다움을 의존(依存)적 아름다움, 순수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 정의했다. 칸트는 건축을 용도가 있는 것 즉 의존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고(故) 구본준 건축 담당 기자는 최근 나온 ‘세상에서 가장 큰 집’에서 건축에만 있는 것으로 공공성을 들었다. 구본준 기자는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인 분야라 말한다.

개인을 위한 건물들도 땅에 뿌리박혀 풍경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칸트와 구본준 기자의 관점은 이렇게 대립된다.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칸트는 어쩌면 비구상 예술과 추상 예술이 활짝 꽃피기 1세기 전에 그것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건축을 위한 예술’ 118 페이지)

경복궁 해설을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경복궁(정도전) vs 창덕궁(이방원)은 물론 한스 샤로운 vs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대립항을 알게 되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의도해 지은 궁궐이고, 창덕궁은 이방원이 왕 중심의 세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주조의 형태도 취하지 않고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는 건물로 지었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 - 1981)는 히틀러의 욕망을 눈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건축가이다. 히틀러의 애완 건축가로까지 불린다.

히틀러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진학에 실패한 뒤 건축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교수의 말을 듣고 건축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조금 생소하다.

어떻든 건축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히틀러는 대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건축가를 고르는데 그가 알베르트 슈페어이다.

임기택은 건축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 및 시대에 따른 외적 변수들을 잘 통합하여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인문 및 감성적 요소들을 잘 통합해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한다.(‘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83 페이지)

타당한 말이다. 나는 칸트가 아닌 구본준의,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의, 알베르트 슈페어가 아닌 한스 샤로운의 관점과 선택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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