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에드먼드 리치의 ‘성서의 구조 인류학’이란 책에서이다.

리치는 이 책에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 vs 이야기의 끝 부분, 누룩을 넣지 않은 빵 vs 포도주, 사회적 예절의 상징 vs 무절제의 상징, 도시의 문화 vs 광야의 자연 등 대립되는 여러 항목들을 제시한다.
세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 즉 이원적으로 선명하게 나뉘는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생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에서도 이원적 대립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독립적인 아름다움 즉 용도(효용성)와 무관한 아름다움을 참된 것이라 생각했다.

칸트는 용도가 있는 아름다움을 의존(依存)적 아름다움, 순수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 정의했다. 칸트는 건축을 용도가 있는 것 즉 의존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고(故) 구본준 건축 담당 기자는 최근 나온 ‘세상에서 가장 큰 집’에서 건축에만 있는 것으로 공공성을 들었다. 구본준 기자는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인 분야라 말한다.

개인을 위한 건물들도 땅에 뿌리박혀 풍경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칸트와 구본준 기자의 관점은 이렇게 대립된다.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칸트는 어쩌면 비구상 예술과 추상 예술이 활짝 꽃피기 1세기 전에 그것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건축을 위한 예술’ 118 페이지)

경복궁 해설을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경복궁(정도전) vs 창덕궁(이방원)은 물론 한스 샤로운 vs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대립항을 알게 되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의도해 지은 궁궐이고, 창덕궁은 이방원이 왕 중심의 세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주조의 형태도 취하지 않고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는 건물로 지었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 - 1981)는 히틀러의 욕망을 눈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건축가이다. 히틀러의 애완 건축가로까지 불린다.

히틀러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진학에 실패한 뒤 건축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교수의 말을 듣고 건축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조금 생소하다.

어떻든 건축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히틀러는 대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건축가를 고르는데 그가 알베르트 슈페어이다.

임기택은 건축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 및 시대에 따른 외적 변수들을 잘 통합하여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인문 및 감성적 요소들을 잘 통합해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한다.(‘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83 페이지)

타당한 말이다. 나는 칸트가 아닌 구본준의,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의, 알베르트 슈페어가 아닌 한스 샤로운의 관점과 선택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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