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가?” 릴케가 한 젊은 시인에게 던진 물음을 생각한다. 진정성과 필연의 사유를 갖추었을 때만 글을 쓰라는 말이지만 이 말을 나무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잘 알다시피 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펄프의 원료로 쓰인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나무의 가치는 여럿이지만 글 읽는 사람에게, 그리고 책 쓰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을 보면 나무는 원 모습 그대로 수많은 글자를 받아준 소중한 바탕이 되어 주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장경에 쓰인 나무는 정교한 조정을 거쳤다.

각 경판(經板)들의 크기 편차가 0.2에서 0.5 cm의 길이, 0.1에서 0.6 cm의 너비에 지나지 않는다(‘문화 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131 페이지)고 하니 놀랍다.

세상의 저자들은 자신이 왜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도 하다. ‘사기’를 쓰기 위해 시간 즉 목숨 보전이 필요해 궁형(宮刑)의 수치(羞恥)를 감내한 사마천을 생각해본다.

암이 뇌로 전이되어 감마선 치료를 받을 때도 치료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안경을 벗지 않았던 일본의 실험물리학자 도쓰카 요지(戶塚洋二: 2008년 7월 타계)도 그렇다. 그 결과 나온 책이 ‘과학의 척도‘이다.

책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갖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의적절할 것 같지만 지리멸렬의 초라한 생각과 어법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배울 바가 있겠는가, 란 생각을 하게 하는 ‘박근혜의 말’이 나왔다.

선택(구입)을 포기하며 이런 생각들을 해보는 아침이다. 저자가 진정성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상 역시 그래야 한다. 아니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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