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연유로 아미의 ‘터치‘라는 가스펠 송이 크리스찬도 아닌 내게 다가와 내 애청(愛聽)곡이 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예수의 옷깃을 만지면 자신의 아픈 몸이 나을 수 있으리라 간절히 믿는 신약 성경 속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이 곡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간절함과 애틋함이 좋아서일 뿐이다.

이런 정서에 해당하는 곡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나 b 단조 미사 중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정도를 들 수 있다.
통렬과 간절은 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칸타타를 짓기도 한 바흐. 한 동안 그의 음악을 듣지 못했다.

바흐는 세속 칸타타, 그리고 기악곡도 종교적이고 성스럽다. 오늘 드디어 종묘에 다녀왔다. 그 신당을 보며 바흐의 곡들을 떠올렸다.

지난 200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맞아 일본의 한 사찰에서 열린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를 떠올리기도 했다.

바흐의 곡들이 다시 생각나는 것은 내가 그 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위로 받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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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 중 창덕궁,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종묘, 수원 화성, 종묘제례악, 훈민정음 등 조선의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이 가는 것은 왜일까?

우리시대와 가까운데다 내가 지금 조선 중심의 문화유산 공부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서울 인근에 살고 있기에 서울과 깊은 관계를 갖는 조선을 집중 공부하게 된 까닭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내가 경북 지역에 살고 있다면 도시 전체가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역사지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주는 조선에 함께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나는 조선의 문화유산들 가운데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이고 이야기거리가 풍부한 것으로 종묘(宗廟)를 꼽는다.

최근 내가 읽은 세 권의 역사, 건축 서적에 모두 종묘가 나온다. 구본준의 ‘세상에서 가장 큰 집‘, 장인용의 ‘주나라와 조선‘, 최준식 등이 쓴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등이 그 책들이다.

이 세 책들을 통해 알게 된 종묘는 처음에는 시조(始祖)에 해당하는 다섯 임금만 모시려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훌륭한 임금들이 나오게 되자 수평 증건(增建)된 세계 유일의 건축물이다.

또한 중국 주(周)나라의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라 경복궁 좌측에 세워진 건물로 사직(社稷)과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중국의 은(殷)나라의 경우 좌묘우궁(左廟右宮)이다. 좌묘우사는 큰 나라 은(殷)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주(周)가 취한 방편이다. 궁 오른쪽에 은나라의 조상의 묘당(廟堂)을, 왼쪽에 자국 조상의 묘당을 세운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묘에 의미심장한 두 개의 길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신이 다니는 길인 신도(神道), 다른 하나는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御道)이다.

신령은 정신만 있을 뿐 몸이 없기에 신도의 폭은 좁게 설정되었다.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길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길이고 곧게 뻗은 길이 아니라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하게 하는 길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종묘의 퇴칸(원래의 칸살 밖에 별도의 기둥을 세워 만든 조금 좁은 칸살)은 외부에 비하면 어둡고 내부에 비하면 밝은, 중간 밝기의 공간이다.

건축가 김봉렬은 종묘를 죽은 자를 위한 살아 있는 건축으로 표현했다. 내가 만일 경복궁이 아닌 종묘를 해설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다소 막막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들이 소란스러운 공간인데 비해 종묘는 엄숙한 공간이다.

이제 이향우의 ‘종묘로 떠나는 힐링 여행‘을 읽을 생각이다. 컬러풀한 사진들을 보며 종묘 여행을 할 것이다. 힐링 플러스 공부를 오롯이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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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지음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는 경주역사지구,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고려대장경과 장경각,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석굴암과 불국사(이상 세계유산),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이상 세계기록유산), 종묘제례악(세계무형유산) 등을 다룬 책이다.


경주역사지구편에서 최준식은 신라의 문화는 한반도 전체를 융섭(融攝)한 것이라는 관점을 취한다.(14 페이지) 경주는 도시 전체가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는 유럽에서 시작된 실크로드의 동쪽끝 종착역이다.(18 페이지)


건축가 김봉렬은 종묘편에서 경복궁이 서울의 한 중심이었다면 다른 한편의 중심은 종묘와 그 뒤의 창덕궁이라는 말을 한다.(53 페이지) 종묘는 정전과 영명전이라는 두 중심 건물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중심도 어도와 신도라는 길들로 연결된다. 영혼인 혼(魂)을 위해서는 사당인 묘(廟)를 세우고, 육신인 백(魄)을 위해서는 무덤인 묘(墓)를 만드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것이다.(유교는 영혼인 혼과 육신인 백의 결합체를 사람으로 본다.)


경복궁이 왕권의 직접적인 통치수단이었다면 종묘는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은유적 상징이었다.(58 페이지) 영녕전에 모신 임금들은 추존왕이거나 단명한 임금들로서 신위를 옮긴 분들이다.(61 페이지)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것이다.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는 종묘의 의미심장한 두 길이다. 신도는 혼령이 다닌다고 믿어진 길이고 어도는 제사 담당자인 임금과 세자가 이동하는 의례의 길이다.(74 페이지)


어도는 동문만을 출입할 수 있게 설치되어 임금이라도 남쪽 신문(神門)을 지날 수 없다. 종묘에서 중요한 것은 의례를 위한 길들이며, 일상적인 길은 길이 아니다. 어도는 전돌이나 거친 넓적돌로 포장되어 있다. 길은 바닥면이 거칠고 돌이 울퉁불퉁하게 조합되어 있어 도저히 빨리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보다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76 페이지)


흔히 기념비 건축은 위압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작위적인 폭력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종묘는 초월적이며 신성한, 전혀 다른 건축의 세계로 인도한다.(83, 84 페이지)


우동선, 조재모는 창덕궁편에서 결혼 사진이나 찍으러 궁궐에 갈 것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인 목적으로 볼 만도 한데 궁궐을 값싼 세트장 정도로 생각하는 요즘 현실이 종종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말한다.(88 페이지) 창덕궁은 경복궁 영건(營建) 후 10년만에 지어졌다. 태종이 창덕궁을 영건한 것은 경복궁을 소홀히 하여 폐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91 페이지) 창덕궁은 집무 공간보다 생활 공간의 성격이 더 강했다.(91 페이지)


경복궁이 광화문에서 신무문에 이르는 축을 중심으로 정전 근정전, 편전 사정전, 침전 강령전, 교태전 등의 모든 전각들을 늘여놓은 것과는 달리 창덕궁은 여러 개의 축에 따라 전각들이 횡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로 인해 창덕궁은 한국적 궁궐의 전형으로 꼽힌다.(109, 110 페이지) 동궐(東闕)은 창덕궁과 창덕궁 후원 뿐 아니라 창경궁까지 한데 어우러져 있다.(113 페이지)


지금은 돈화문을 창덕궁의 정문으로 삼고 있지만 옛날에는 돈화문을 인정전의 가장 바깥문이라 했다. 임금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기 때문이다.(117 페이지)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 경덕궁의 정전 숭정전 등은 이름이 비슷하다. 정(政)이란 글자 때문이다.(물론 덕수궁은 중화전으로 정(政)이란 글자와 무관하다.) 정조 6년인 1782년에 인정전에 처음으로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 정원 건축의 대표작이다. 비원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오직 임금만을 위해 깊숙한 곳에 조성된 곳으로 금원(禁苑)이라고도 한다.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넓지 않은 궁역 내에서도 다채롭고 풍성한 건축 공간을 만들었고 독창적인 조경 기법을 탄생시켰다.(126 페이지) 창덕궁은 고종조 경복궁의 중건으로 정궁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왕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궁궐이었다.


양윤식은 수원 화성편애서 수원 성곽으로 불리다가 1997년 1월 화성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그해 12월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내력을 말한다. 화성 건설 200년만이다. 화성(華城)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옮기는(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봉遷峰) 데에서 시작되었다. 화성 설계는 당시 31살의 신진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맡았다. 화성 건설의 실재를 살피는 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공사 보고서에 해당하는 ‘화성성역의궤’이다.(144 페이지)


실학 시대의 두드러진 성과인 수원 화성은 정치, 행정, 군사, 생산, 소비 기능을 결합한 계획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전통적 지식과 외래 지식까지 모두 포괄하는 당대의 지적 성과와 과학기술을 집약한 결과물이다.(146 페이지) 조선 후기 미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배후 도시로 탄생한 수원 화성은 당대가 요구하는,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성곽으로서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146 페이지)


김종명은 ‘고려대장경’과 장경각편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주제들을 살펴나간다. 고려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는 법보(法寶) 사찰로 불린다. 김종명은 대장경 판각의 배경을 호국(護國)으로 보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고려대장경의 총 글자수는 52, 382, 960자로 조선왕조실록의 총 글자수인 5300만자와 비슷하다.(161 페이지) 고려대장경 한 자를 새길 때마다 절을 한 번 했다.


고려대장경에도 오자(誤字), 탈자(脫字)는 있다. 물론 다른 것들에 비하면 상당히 정확하다.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목조 건물인 장경각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창고 건물이다.(166 페이지) 고려대장경의 보관 장소로 해인사가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의 총 분량은 8톤 트럭 30대분이다. 장경각의 총 기둥수는 108개이다. 108 번뇌를 상징함과 동시에 번뇌의 집 속에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을 넣어 둠으로써 번뇌 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69 페이지)


송호정은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족편에서 한국의 고인돌만큼 성격 규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177 페이지) 우리 역사에서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회상과 초기 국가의 출현 모습, 나아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데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181 페이지) 한국 고대사회에서 지배자들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이 고인돌이다.(191 페이지) 고인돌에는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 잘 살기를 비는 마음과 남은 후손을 위한기도의 마음이 함께 깃들어 있다.(191 페이지)


거대한 규모의 고인돌을 축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기술력과 노동력을 보유한 당시에는 지역간의 전파와 교역을 담당하는 전문가 집단 및 이들을 통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했다. 고인돌은 지배 계층 또는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정치적 능력을 지닌 자들의 공동묘지이다.(208 페이지)


권지연, 최준식은 석굴암과 불국사편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이라는 주장과 석가모니불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223 페이지)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웠다.(229 페이지) 김대성은 중시(中侍)의 권력을 지닌 고위 계급이었다.


신병주에 의하면 총 문자량 2억 4천만 자에 달하는 승정원 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물이다.(250 페이지) 조선왕조실록(5300만자)과 승정원일기라는 두 가지의 국가 공식 연대기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조선사대 기록 문화가 탁월했음을 증명한다.(251 페이지) 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한다.(253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은 편찬이 완료된 후 지방의 史庫(사고)에 봉안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열람할 수 없었다. 반면 승정원일기는 실록보다 내용이 훨씬 상세하고 주요 전례나 국방, 외교상의 현안이 있을 때 전대의 것을 참고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는 매일매일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승정원일기가 모든 정보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 왕이 주관하지 않은 의식이나 지방의 하건 기록에 대해서는 오히려 조선왕조실록보다 간략하게 서술했다.(270 페이지)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보완하여 이용할 때 자료로서의 가치가 커진다. 정조 이후 국왕의 일기 형식의 글인 일성록도 좋은 보완 자료이다.(271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성계에서 철종에 이르는 472년의 사건을 5300만자에 담은 기록물이다.(277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에 정치적 사실만이 담긴 것은 아니다. 왕실과 정치, 경제, 대외관계, 중요 인물에 대한 기사, 법률, 천문, 의약, 음악, 예술, 종교, 사회, 문화, 풍습, 일반 백성의 생활까지 망라된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280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은 기록 대상이 되는 인물 또는 후계자들의 영향 아래 편찬(編纂)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자연 현상이나 문화적 기록들도 그 자체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요소와 역할 때문에 기록된 것도 그렇다. 사관 실명제로 인해 대다수 사관들이 본인 신변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용감하게 기술하지는 못했다는 점도 그렇다.(283 페이지)


조선 후기에 당쟁이 심해지면서 사관들의 당파나 개인적 의견에 의한 편견도 많이 작용했다. 사관을 구성하는 주요 관직이 집권당에 의해 독점되어 실록 편찬의 공정성이 훼손되었다. 정권이 바뀌면 수정 또는 개수(改修) 실록이 다시 편찬되었다.(283 페이지) 물론 이런 예는 일부에 한한다. 중국 명나라의 실록 수정과는 달리 원래의 실록과 수정 실록을 함께 보존하여 후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할 수 있게 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더해준다.(283 페이지) 실록은 유교권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284 페이지)


백운화상초록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에 억류된 한국의 보물이다.(298 페이지) 금속활자는 1200년대 초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 1400년대 중반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는 정보의 전파력으로 인해 언론에 의해 선정되었다.


훈민정음이 발명된 것은 세종 25년이다.(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발명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국민들이 문자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즉 국민을 사랑해서이다.(334 페이지) 오늘날 종묘제례에서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이 친히 작곡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창작품이다.(351 페이지) 조선시대는 새 왕조가 일어나면 새로운 음악을 제정했다.(354 페이지)


1960년 이집츠 정부는 나일강의 범람을 조절하고 농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강 하류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댐이 건설되면 강 상류의 누비아 유적지와 이 일대의 역사유물이 침수되어 고대 세계 문명의 발상지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국제 사회에 호소했고 유네스코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1972년 세계문화유산 보호협약을 채택했다.(381 페이지)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는 개별 내용들을 하나의 전문서들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 해설 공부를 하지만 여전히 생소하고 어려운 것이 문화재이고 역사이다. 나의 경우 관심이 조선에 치우쳐 있다. 개인적으로 종묘와 창덕궁,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훈민정음 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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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투지오 수도원 입구에 있는 표지판
- 침묵지대(Zone de Silence)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봉쇄수도원

여행객들은 왜 침묵을 엿보려 하는가
수도사들의 침묵과 고독을 넘보려 하는가
카르투지온들의 하얀 언어를 훔치고 싶어 하는가˝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의 도입부이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생피에르 드 샤르트뢰즈에 있다.

해발 1300미터에 있는 수도원까지 가는 길은 전나무 숲이 장관이라고...

월정사의 전나무 숲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카톨릭에는 봉쇄(封鎖) 수도원이 있다.

고독과 명상 속에서 신과 자신의 내면만을 향하도록 된 수도원이다. 신 역시 내면을 향해야 만날 수 있으니 결국 문제는 자신의 내면. 불교의 무문관(無門關)과 비교할 수 있을까?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철학자 출신의, 아우슈비츠 순교 성인인 카톨릭 수녀가 쓴 책을 읽은 기억을 되살려본다.

이해인 수녀께서 봉쇄수녀원 내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무리가 있다는 말을 했듯 그 봉쇄 시설에서도 나름의 기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점을 알고 싶어하는 것일까? 시인이 말하듯. 에디트 슈타인 역시 그런 고독과 유폐 속의 기쁨을 말한 바 있다.

아니 어쩌면 기쁨은 그런 유폐의 처소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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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 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담론‘의 서문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독자가 텍스트가 말하는 세계를 넘어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이때부터 텍스트는 없고 독자가 부여한 의미만 남는다.˝ 이는 철학자 리쾨르의 말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며 나는 인터넷 글에 대한 반응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미는 쓰는 사람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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