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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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선이 성리학 유일 사상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13 페이지) 정조는 천주교가 성행한 근본적인 이유로 문체를 들었다.(29 페이지) 정조는 자신이 없었다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라 자책하며 평생을 산 인물이었다.(42 페이지) 노론은 유학의 최고 이념인 삼강오륜마저 자당(自黨)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받아들였다.(48 페이지)

정조는 사도세자 사건을 거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처단할 것이라는 영조의 유훈을 받들자니 아버지의 원혼이 울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니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불효손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서 해법을 찾았다.(53 페이지) 정조의 삶 자체가 그런 묘수 찾기의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조가 택한 것은 사도세자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을 다른 명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할아버지의 유명(遺命)도 거역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조는 피눈물이 흐르는 한(恨)을 간직한 임금이었다.(57 페이지) 구천(九泉)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고 있는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길로 정조가 택한 것은 천장(遷葬)이었다.(70 페이지) 양주 배봉산 갑좌(甲坐) 언덕에 자리한 아버지 장현세자(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긴 것이다. 정조는 이곳을 현륭원이라 이름했다.(81 페이지)

정조는 조선의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으면 사도세자의 비극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비극을 막으려면 수원성 즉 화성(華城)을 중심으로 새 질서를 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용의주도했다. 무작정 왕명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10년에 걸친 천도(遷都) 계획을 염두에 두었다.

정조는 화(華)나라의 봉인(封人: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세 가지 축원을 한 것(화봉삼축)을 기억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며 화(花)와 화(華)는 서로 통용된다고 설명했다.(96 페이지) 정조는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고도 거대한 성을 지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정조는 축성(築城)이 소비가 아니라 생산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1 페이지)

정조는 화성과 그 일대를 시범지역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게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본받게 하려고 했다. 모든 백성들이 굶주림 없이 풍요롭게 생활하는 조선을 만들려는 정조의 꿈이 실현될 장소는 사도세자의 도시 화성이 될 것이었다.(115 페이지) 화성은 미래 계획도시였다.(127 페이지)

정조에게 정순왕후 김씨(자신보다 일곱 살 더 많을 뿐인 법적인 할머니)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다. 물론 정순왕후 김씨 역시 정조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그것은 정조가 오라비 김귀주를 탄핵해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죽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순왕후의 원한은 인과관계를 무시한 것이었다. 정조가 김귀주를 탄핵한 것은 처벌 차원의 당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153 페이지)

그런 정순왕후를 정조는 매일 문안해야 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 역시 정조에게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노론의 당론에 따라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했으나 정조의 즉위에는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정조를 어떤 인물이라 불러야 할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낸 임금이라 하고 싶다. 정조가 처한 상황은 정신병 발병으로 이어질만한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손이 있었기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고 어머니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버릴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159 페이지)

정조는 지금의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승 사업을 하지 않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새 왕을 모시고 추승 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생각했다. 전자는 영조에 대한 의리이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의리였다.(161 페이지)

정조는 독서 군주였다. 정조는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책을 읽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외기(外氣)가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177 페이지) 또한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라는 말도 했다.(178 페이지) 모두 ‘일득록(日得錄)’에 전하는 바다. ‘일득록‘은 정조가 경연(經筵) 등 제반 행사에서 대신·각료·유생들과 나눈 대화와 전교(傳敎)를 수록한 책이다.

정조는 즉위 당시 만 24세에 불과했으나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학문은 어느 노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는 모두 동궁 시절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83 페이지)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밤을 자주 새우곤 했다.

정조는 경연(經筵)을 통해 주자학에 경도된 신하들의 좁은 시야를 넓게 틔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경연관들의 수준이 정조에 미치지 못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도 구체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193 페이지) 경연관들의 수준이 미흡하자 정조는 한 가지 방안을 강구했다. 미리 공부(예습)하게 한 것이다. 정조는 경연에서 강학(講學)해야 할 부분에서 미리 문목(問目: 의문형으로 뽑은 문제)을 뽑았다.(193 페이지)

정조는 재위 21년(1797년) 6월 정약용을 동부승지로 임명했는데 정약용은 사직상소를 올려 자신이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서학에 빠졌었다고 시인하며 체직(遞職)을 요청했다. 정조가 사임하지 말라고 명했으나 정약용은 끝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노론은 정약용을 관직에 천거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231, 232 페이지)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내린다. 5월 30일 경연에서 중요한 하교를 내린 것인데 이날이 그믐이기 때문에 호회연교라 불린다. “모든 신료들이 자기 조부와 부친이 선조(先朝: 영조)를 위해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어찌 모년(某年)의 의리를 범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232 페이지) 사도세자 사건을 언급한 것이다.

정조는 이 전교에서 자신의 재상 기용 원칙을 천명했다. 정조가 8년을 주기로 번갈아 등용한 세 정승은 남인 채제공, 노론 김종수, 소론 윤시동이었다. 오회연교 이후 정조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가슴 속의 화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어 정조를 괴롭히는 것이다. 정저는 스스로 처방하고 조제했는데 이는 정조의 의학 지식이 어느 어의(御醫) 못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주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236 페이지)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우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48 페이지)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마주칠 수 없다는 법도 때문이었다.(246 페이지)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252 페이지) 반동(反動)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교 탄압, 남인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그토록 살리려고 했던 동생 은언군 이인도 사사(賜死)되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이 빈발했다. 정조 재위 때에는 민란이 없었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선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 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다.(2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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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시인의 ‘리샨‘이란 시에서 육삭(肉爍)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찢어진/ 머리가락을 휘날리는 병든 신부여, 피 흐르는 소리에 밤새/ 뒤척이는 우리는 육삭(肉爍)을 앓는 식물들입니다...˝

육삭(肉爍)은 양열(陽熱)이 지나치게 성해 진액이 졸아 살이 마르는 것을 말한다. 위장이 좋지 않아 뜸을 뜨는 내가 늘 염두에 두는 바이다.

정끝별 시인의 작품들 중 ‘춘수(春瘦)‘가 있다. 춘수(春瘦)는 봄 춘(春)과 여윌 수(瘦)를 쓰는 말이다. 육삭과 달리 시인이 만든 말이다. 봄 여윔 정도의 말이다. 수(瘦)는 수척(瘦瘠)하다고 할 때의 그 수이다.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정끝별 시인의 시에 공감한다. 내 이야기라 해도 좋은 이야기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마음이 황량해지고 입이 마르고 몸이 마를 일은 얼마든지 있다.

부끄럽고 안타깝지만 나는 마음이 몸이나 주변 환경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보살펴야 할 마음... 무엇으로? 명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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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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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소장의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는 열 여덟 가지 키워드로 정조(正租)의 시대를 조명한 책이다. 눈여겨 볼 부분은 정조 즉 이산(李祘)이 없었다면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고, 그것을 정조가 알았다는 점이다. 정조는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저주할 상황에 처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철인(哲人) 군주, 학자 군주가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경종(景宗)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이 책은 반대파인 노론에 의해 삭제 또는 추가된 정조실록이나 일성록등을, 비교적 정조의 육성이 많이 담겨 있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등 개인 문집에 의거해 이야기를 풀어간 책이다. 정조 독살설을 소설 형식으로 서술해내는 것으로 대장정을 시작한 책은 정조가 선왕(先王)이자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해 갖는 복잡한 심경을 언급하는 데서 하나의 이슈를 던진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세손(世孫: 정조)은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39 페이지) 이미 서문에서 역설적으로 손자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었다.”(7 페이지)는 말로 파문(?)을 일으킨 저자이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것이다.

 

영조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노론 벽파에 대비해 재위 40년 세손을 이복 백부인 효장세자에게 입적(入籍)시켰다. 그런 정조의 즉위 일성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노론은 경악했다. 삼십 초반의 임금(경종)을 협박해 연잉군(영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던 노론은 여든 노군주(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 시키겠다는 것은 도끼에 베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왔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정조는 노론의 온갖 방해를 이기고 스물 다섯의 나이로 즉위했다. 국왕 즉위 방해는 대역죄(大逆罪)였으나 아무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고 정조도 침묵했다.(57 페이지) 영조와 정조에 관한 기막힌 사연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순 여섯의 영조가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 이어 맞이한,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어린 정순왕후 김씨 이야기이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 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78 페이지)

 

암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세손 시절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던 정조의 습관은 임금이 되어서도 이어졌다.(98 페이지) 정조는 재위 1년 경희궁에서 왕대비, 혜경궁과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는데 이는 자객(刺客) 사건의 여파였다.(100 페이지) 정조가 넘긴 고비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주술로 저주해 죽이려 한 사건이 있었고 반정으로 내쫓은 후 은전군(恩全君: 사도세자와 영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조의 이복 동생)을 추대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조선 왕실의 비극이었다.”(1215 페이지)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도 복잡하다. 영조 48(1772) 정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홍국영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세자시강원의 정 7품직)로 임명받았다. 세손은 혜경궁과 정순 왕후 모두에게 인척이 되는 홍국영이 마땅치 않았지만 설서는 자신이 뽑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을 정치적 지주로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홍국영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 홍국영은 소론 정권의 등장은 반드시 막고 노론이 정권은 계속 잡되 자신이 노론 영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홍국영의 정국 구상에 넘어가 무리수도 두었다. 그 증 하나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왕에게 공이 있는 신하를 그 왕에게 덧붙여 제사지내는 것)하게 한 것이었다.(141 페이지)

 

정조는 송시열을 천하의 대로(大老)이고 해동의 진유(眞儒)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 역시 홍국영으로 인한 것이었다. 홍국영은 노론 외척 명가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노론의 영수로 나서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조를 움직인 것이다. 정조에게 이는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노론은 하은주(夏殷周) 시대에는 군주가 스승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재야 학자들에 유학(儒學)의 도통이 계승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임금일 뿐이지 스승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임금이 스승이라는 군사(君師)론으로 정국을 이끌려던 정조에게는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홍국영은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으나 후궁(원빈 홍씨)이 된 여동생이 소생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송덕상을 사주해 후사 즉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하게 했다. 이 역시 홍국영의 무리수였다. 당시 정조 나이 28세였다. 정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신을 차렸다. 드디어 홍국영을 충심 가득한 신하가 아닌 야망으로 가득 찬 인물로 본 것이다.(145 페이지)

 

홍국영은 원빈 홍씨의 영자로 삼은 완풍군 이담(李裀)을 정조의 후사로 삼으려 했었다.(214 페이지)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을 친척처럼 대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주목받은 인물들이 규장각 검서관들이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리수 등 모두 서얼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검서관 자리에 서얼들을 기용하자고 한 것은 홍국영이었다는 점이다.(178 페이지)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전교(傳敎)를 내렸다. 아녀자의 정사 개입은 금지되어 있으나 종사와 선대왕의 영령(英靈)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다는 말로였다. 정순왕후 김씨가 내세운 명분은 5월의 변(문효세자의 죽음)9월의 변(문효세자의 모친 의빈 성씨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는 것으로 지목된 사람은 이담(李裀)이었다.

 

정조는 정순왕후의 한글 전교가 정순왕후의 사적 복수심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았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나주에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하게 된 전교였다. 물론 김귀주는 사도세자 살해에 많은 역할을 했는데 정조는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른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었다.(240 페이지) 정순왕후는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이인(李䄄)을 죽이려 했다.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라는 것이 정순왕후의 주장이었다   

 

정순왕후와 노론이 정조를 거칠게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노론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의 최고 원로 구선복의 아들 구이겸이 고변에 연루되어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245 페이지) 구선복은 아들과 조카가 명백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들 구이겸이 상계군과 은언군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낸데다 조카 구명겸은 이율, 홍복영 역모 사건에도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257 페이지) 정조는 하나 남은 이복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단식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정조가 주목한 것은 남인들이었다. 하지만 남인들은 천주교로 발목이 잡혔다.(261 페이지) 노론은 천주교를 남인 제거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정조는 국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을 반대했다.(271 페이지) 정조는 정학(正學)이 바로 서면 사학(邪學)은 사라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학이 성행하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처신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남인 일각에서 천주교를 가장 거세게 공격했다. 정조는 문체반정 정책으로 천주교로 인한 남인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293 페이지) 이것으로 1권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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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양자(量子) 뿐 아니라 과학에 별 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에 평행 우주를 소재로 한 아즈마 히로키의 장편 소설인 ‘퀀텀 패밀리즈(quantum families)‘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한 때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때 면도날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는 도구를 상징한다.

반면 브레너의 빗자루는 스스로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먼저 과감히 발표한 뒤 미해결되거나 채 이해되지 않은 것은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버리면 된다는 생각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 오컴(Ockham)과 분자생물학자 브레너(Brenner).

과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대립이 책 읽기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현 국면에 바로 도움이 되는 이슈 분석을 위해 소용이 되는 책들만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대비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들이라도 다소 헤프고 무분별하게 읽을 것인가, 이다.

그런데 현재만을 보거나 미래만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슈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을 것인가, 가 아닐지?

하지만 이 역시 현명한 문제 설정이 아니다. ‘나‘는 사회 속의 존재이고 사회의 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사회비평서인 ‘동물화하는 포스트 모던‘에서 시도한 오타쿠 분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오타쿠를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규어(figure: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입체조형물) 등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아즈마는 오타쿠들이 허구를 중시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그들이 허구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해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허구와 현실을 저울질한 결과라 설명한다.

책은 어떤가? 허구와 현실의 중간? 아니면 두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 알 수 없다.

* 이 글에 예스24 블로거의 한 과학 교수께서 오컴의 면도날과 브레너의 빗자루를 책읽기에 비유한 것이 신선하다고 하며 그러나 두 개념이 대립되는 개념이라 생각해오지 않았는데 (내가 그런 글을 쓰니) 그런가 싶기도 하네요란 댓글을 달았다.

이에 나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며 두 개념이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두 개념 모두 결국 불필요한 것들을 소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하나로 수렴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란 답을 했다.

이 분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대결(제논의 역설)과 중간화석에 관한 진화론자와 창조론자의 대립을 연결지어 설명한 내 글에 참신하다는 댓글을 다셨던 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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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담하게 죽은 것이 친부살해적 광기와 적대감을 보이기까지 하다가 부왕 군주 영조에 의해 당한 죽음이 아니라 나주벽서사건으로 전권을 장악한 노론이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이후 정식으로 왕으로 즉위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사실을 조작하고 모함해 일으킨 정치권력 차원의 죽임임을 주장한 이주한 지음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불 속에 들어가 밤을 줍는 즉 화중취율(火中取栗)의 심정으로 읽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 ‘종달새‘라도 들려올 듯한 맑고 무연한 하늘을 감상하시니 부러운 마음이 커 유신시대에 단 하나의 혈육이던 이모에게서 대학 등록금을 훔쳐 상경한 ‘나‘ 강하원이 생활비 마련이 시급해 우연히 인쇄소에서 잡일을 하게 된 뒤 그 인쇄소를 근거로 지하운동을 하던 문화혁명회의 일을 돕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을 주조로 하는 최윤 작가의 작품인 ‘회색 눈사람‘의 한 구절인 ˝어쩌면 이 계절의 하늘은 이토록 무연히 맑을까.˝란 문장을, 문화혁명회의 한 멤버인 안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일할 때 가끔 틀어놓던, 높낮이도 없고 비슷비슷하게 연결되어 하오의 잠 같기도 하다고 강하원이 회고한 에릭 사티의 음악과 함께 읊어보니 마치 시화(詩畫)전이 아닌 설악(說楽)전에라도 온 듯 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계기로 이렇듯 사는 것은 스스로 위안을 찾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런 긴 호흡의 문장을 쓴 것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284자에 이르는 긴 문장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숭산. 충청남도 예산에 솟은 산이다. 높지 않다. 해발 495m. 그래서다. 선원도 정상에 바투 자리하고 있다.˝ 같은 짧게 이어지는 문장들로 채워진 어느 필자의 책이 싫어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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