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소장의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는 열 여덟 가지 키워드로
정조(正租)의 시대를 조명한
책이다.
눈여겨 볼 부분은
정조 즉 이산(李祘)이 없었다면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고,
그것을 정조가
알았다는 점이다.
정조는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저주할 상황에 처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철인(哲人)
군주,
학자 군주가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경종(景宗)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이 책은 반대파인 노론에 의해 삭제 또는
추가된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을,
비교적 정조의
육성이 많이 담겨 있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
등 개인 문집에
의거해 이야기를 풀어간 책이다.
정조 독살설을 소설
형식으로 서술해내는 것으로 대장정을 시작한 책은 정조가 선왕(先王)이자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해 갖는 복잡한
심경을 언급하는 데서 하나의 이슈를 던진다.
즉 “영조가 아니었다면
세손(世孫:
정조)은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39
페이지)
이미 서문에서
“역설적으로 손자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었다.”(7
페이지)는 말로 파문(?)을 일으킨 저자이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것이다.
영조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노론 벽파에 대비해 재위 40년 세손을 이복 백부인 효장세자에게
입적(入籍)시켰다.
그런 정조의 즉위
일성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노론은
경악했다.
삼십 초반의
임금(경종)을 협박해 연잉군(영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던 노론은 여든
노군주(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 시키겠다는 것은
도끼에 베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왔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정조는
노론의 온갖 방해를 이기고 스물 다섯의 나이로 즉위했다.
국왕 즉위 방해는
대역죄(大逆罪)였으나 아무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고 정조도
침묵했다.(57
페이지)
영조와 정조에 관한
기막힌 사연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순 여섯의 영조가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 이어
맞이한,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어린 정순왕후 김씨 이야기이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 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78
페이지)
암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세손 시절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던 정조의 습관은 임금이 되어서도 이어졌다.(98
페이지)
정조는 재위
1년 경희궁에서 왕대비,
혜경궁과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는데 이는 자객(刺客)
사건의
여파였다.(100
페이지)
정조가 넘긴 고비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주술로 저주해
죽이려 한 사건이 있었고 반정으로 내쫓은 후 은전군(恩全君:
사도세자와 영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정조의 이복
동생)을 추대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 조선 왕실의
비극이었다.”(1215
페이지)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도 복잡하다.
영조
48년(1772년)
정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한 홍국영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세자시강원의 정
7품직)로 임명받았다.
세손은 혜경궁과
정순 왕후 모두에게 인척이 되는 홍국영이 마땅치 않았지만 설서는 자신이 뽑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을 정치적 지주로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홍국영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
홍국영은 소론
정권의 등장은 반드시 막고 노론이 정권은 계속 잡되 자신이 노론 영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홍국영의
정국 구상에 넘어가 무리수도 두었다.
그 증 하나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왕에게 공이 있는
신하를 그 왕에게 덧붙여 제사지내는 것)하게 한 것이었다.(141
페이지)
정조는 송시열을 천하의
대로(大老)이고 해동의 진유(眞儒)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 역시 홍국영으로
인한 것이었다.
홍국영은 노론 외척
명가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노론의 영수로 나서기 위해서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조를 움직인
것이다.
정조에게 이는
두고두고 부담이 되었다.
노론은
하은주(夏殷周)
시대에는 군주가
스승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재야 학자들에 유학(儒學)의 도통이 계승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임금일
뿐이지 스승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임금이 스승이라는
군사(君師)론으로 정국을 이끌려던 정조에게는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홍국영은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으나 후궁(원빈 홍씨)이 된 여동생이 소생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송덕상을 사주해 후사 즉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하게 했다.
이 역시 홍국영의
무리수였다.
당시 정조 나이
28세였다.
정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신을 차렸다.
드디어 홍국영을
충심 가득한 신하가 아닌 야망으로 가득 찬 인물로 본 것이다.(145
페이지)
홍국영은 원빈 홍씨의 영자로 삼은 완풍군
이담(李裀)을 정조의 후사로 삼으려
했었다.(214
페이지)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을 친척처럼 대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주목받은 인물들이 규장각 검서관들이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리수 등 모두
서얼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검서관 자리에 서얼들을 기용하자고 한 것은 홍국영이었다는 점이다.(178
페이지)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전교(傳敎)를 내렸다.
아녀자의 정사
개입은 금지되어 있으나 종사와 선대왕의 영령(英靈)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다는 말로였다.
정순왕후 김씨가
내세운 명분은 5월의 변(문효세자의 죽음)과 9월의 변(문효세자의 모친 의빈 성씨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는 것으로 지목된 사람은
이담(李裀)이었다.
정조는 정순왕후의 한글 전교가 정순왕후의
사적 복수심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았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나주에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하게 된 전교였다.
물론 김귀주는
사도세자 살해에 많은 역할을 했는데 정조는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른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었다.(240
페이지)
정순왕후는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이인(李䄄)을 죽이려 했다.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라는 것이 정순왕후의 주장이었다.
정순왕후와 노론이 정조를 거칠게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노론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의 최고
원로 구선복의 아들 구이겸이 고변에 연루되어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245
페이지)
구선복은 아들과
조카가 명백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들 구이겸이 상계군과 은언군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낸데다 조카 구명겸은 이율,
홍복영 역모
사건에도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257
페이지)
정조는 하나 남은
이복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단식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정조가 주목한 것은
남인들이었다.
하지만 남인들은
천주교로 발목이 잡혔다.(261
페이지)
노론은 천주교를
남인 제거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정조는 국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을
반대했다.(271
페이지)
정조는
정학(正學)이 바로 서면 사학(邪學)은 사라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학이 성행하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처신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남인
일각에서 천주교를 가장 거세게 공격했다.
정조는 문체반정
정책으로 천주교로 인한 남인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293
페이지)
이것으로
1권은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