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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평점 :
정조는 조선이 성리학 유일 사상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13 페이지) 정조는 천주교가 성행한 근본적인 이유로 문체를 들었다.(29 페이지) 정조는 자신이 없었다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라 자책하며 평생을 산 인물이었다.(42 페이지) 노론은 유학의 최고 이념인 삼강오륜마저 자당(自黨)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받아들였다.(48 페이지)
정조는 사도세자 사건을 거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처단할 것이라는 영조의 유훈을 받들자니 아버지의 원혼이 울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니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불효손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서 해법을 찾았다.(53 페이지) 정조의 삶 자체가 그런 묘수 찾기의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조가 택한 것은 사도세자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을 다른 명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할아버지의 유명(遺命)도 거역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조는 피눈물이 흐르는 한(恨)을 간직한 임금이었다.(57 페이지) 구천(九泉)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고 있는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길로 정조가 택한 것은 천장(遷葬)이었다.(70 페이지) 양주 배봉산 갑좌(甲坐) 언덕에 자리한 아버지 장현세자(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긴 것이다. 정조는 이곳을 현륭원이라 이름했다.(81 페이지)
정조는 조선의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으면 사도세자의 비극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비극을 막으려면 수원성 즉 화성(華城)을 중심으로 새 질서를 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용의주도했다. 무작정 왕명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10년에 걸친 천도(遷都) 계획을 염두에 두었다.
정조는 화(華)나라의 봉인(封人: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세 가지 축원을 한 것(화봉삼축)을 기억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며 화(花)와 화(華)는 서로 통용된다고 설명했다.(96 페이지) 정조는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고도 거대한 성을 지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정조는 축성(築城)이 소비가 아니라 생산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1 페이지)
정조는 화성과 그 일대를 시범지역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게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본받게 하려고 했다. 모든 백성들이 굶주림 없이 풍요롭게 생활하는 조선을 만들려는 정조의 꿈이 실현될 장소는 사도세자의 도시 화성이 될 것이었다.(115 페이지) 화성은 미래 계획도시였다.(127 페이지)
정조에게 정순왕후 김씨(자신보다 일곱 살 더 많을 뿐인 법적인 할머니)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다. 물론 정순왕후 김씨 역시 정조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그것은 정조가 오라비 김귀주를 탄핵해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죽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순왕후의 원한은 인과관계를 무시한 것이었다. 정조가 김귀주를 탄핵한 것은 처벌 차원의 당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153 페이지)
그런 정순왕후를 정조는 매일 문안해야 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 역시 정조에게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노론의 당론에 따라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했으나 정조의 즉위에는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정조를 어떤 인물이라 불러야 할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낸 임금이라 하고 싶다. 정조가 처한 상황은 정신병 발병으로 이어질만한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손이 있었기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고 어머니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버릴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159 페이지)
정조는 지금의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승 사업을 하지 않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새 왕을 모시고 추승 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생각했다. 전자는 영조에 대한 의리이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의리였다.(161 페이지)
정조는 독서 군주였다. 정조는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책을 읽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외기(外氣)가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177 페이지) 또한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라는 말도 했다.(178 페이지) 모두 ‘일득록(日得錄)’에 전하는 바다. ‘일득록‘은 정조가 경연(經筵) 등 제반 행사에서 대신·각료·유생들과 나눈 대화와 전교(傳敎)를 수록한 책이다.
정조는 즉위 당시 만 24세에 불과했으나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학문은 어느 노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는 모두 동궁 시절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83 페이지)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밤을 자주 새우곤 했다.
정조는 경연(經筵)을 통해 주자학에 경도된 신하들의 좁은 시야를 넓게 틔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경연관들의 수준이 정조에 미치지 못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도 구체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193 페이지) 경연관들의 수준이 미흡하자 정조는 한 가지 방안을 강구했다. 미리 공부(예습)하게 한 것이다. 정조는 경연에서 강학(講學)해야 할 부분에서 미리 문목(問目: 의문형으로 뽑은 문제)을 뽑았다.(193 페이지)
정조는 재위 21년(1797년) 6월 정약용을 동부승지로 임명했는데 정약용은 사직상소를 올려 자신이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서학에 빠졌었다고 시인하며 체직(遞職)을 요청했다. 정조가 사임하지 말라고 명했으나 정약용은 끝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노론은 정약용을 관직에 천거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231, 232 페이지)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내린다. 5월 30일 경연에서 중요한 하교를 내린 것인데 이날이 그믐이기 때문에 호회연교라 불린다. “모든 신료들이 자기 조부와 부친이 선조(先朝: 영조)를 위해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어찌 모년(某年)의 의리를 범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232 페이지) 사도세자 사건을 언급한 것이다.
정조는 이 전교에서 자신의 재상 기용 원칙을 천명했다. 정조가 8년을 주기로 번갈아 등용한 세 정승은 남인 채제공, 노론 김종수, 소론 윤시동이었다. 오회연교 이후 정조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가슴 속의 화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어 정조를 괴롭히는 것이다. 정저는 스스로 처방하고 조제했는데 이는 정조의 의학 지식이 어느 어의(御醫) 못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주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236 페이지)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우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48 페이지)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마주칠 수 없다는 법도 때문이었다.(246 페이지)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252 페이지) 반동(反動)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교 탄압, 남인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그토록 살리려고 했던 동생 은언군 이인도 사사(賜死)되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이 빈발했다. 정조 재위 때에는 민란이 없었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선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 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다.(27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