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름다울 가(佳)자와 빚을 온(醞)자를 넣어 만든 시가온(詩佳醞)이란 시 창작 동호회에 참여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를 빚는다는 표현은 참 아름다운데 도자기에 대해서도 쓰이는 다의적인 빚는다란 단어를 잘 택했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았듯 시를 빚는다는 말을 풀면 어떤 단어가 적당할까? 제작, 창조, 생산 가운데 어떤 것에 해당할까? 제작이나 생산에 비해 창조는 의미가 참 거창해 보인다.

물론 시를 제작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은 시를 거듭되는 수정과 퇴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란 말에는 종교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순간적 감흥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낭만적 의미와 함께. 시가온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보고 책을 찾다가 유종호 교수의 ‘시란 무엇인가‘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눈에 띈 부분은 산문작가도 문체에 주력하는 한 창조적 구사를 수행하게 마련이기에 문체는 산문의 시라고도 할 수 있고 언어예술가라는 점에서 모든 문인은 시인이라 할 수 있다는 글(263 페이지)이다.

유종호 교수가 그렇게 볼 수 있는 글로 든 것이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이란 소설이다. 유종호 교수는 이 소설 속 한 문장을 제시한다.

˝우리를 만들어준 것은 알렉세이 아스타체프의 ‘폭력의 시학; 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였다˝

유종호 교수는 이어 이 우리라는 말이 소설 속 인물들인 그들만이 아닌 글을 읽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효과를 낸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물론 덧붙여 우리에게는 다정하고 세심한 반폭력의 시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지었다.(275 페이지)

어떻든 나에게 흥미를 주는 점은 필요한 것은 폭력의 시학인가 반폭력의 시학인가가 아니다. 소설의 내용이 내 관심거리이다.

유신시대를 배경으로 한 ‘회색 눈사람‘은 당시의 고난마저 낭만과 서정으로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발단은 이렇다. 강하원이라는 가난한 여자 대학생이 학기가 끝나면 교재를 내다 팔고 다음 학기 교재를 구입하는데 청계천의 한 헌책방에서 바로 그 아스타체프의 책을 구입하게 된다.

금서를 산 것인데 강하원은 이 반복되는 일을 하며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면 다시 팔아야 했기에 그것은 저금의 의미를 띤 행위였다.

몇달이 지난 어느 날 강하원은 그 책을 누군가 찾는다는 헌책방 주인의 말을 듣고 그들과 접촉을 시도해 문화혁명회라는 지하운동 단체와 관계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음을 흔든다.

이는 문화혁명회와 관계한 지 20년 정도가 지난 당시를 회고하며 강하원이 남긴 말이다.

소설에 나오는 단체이지만 내력을 밝히면 문화혁명회는 발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된다. 상처와도 같은 빛 운운하는 문장은 내가 몇 차례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 관심사는 아스타체프의 책이 계기가 되어 강하원과 문화혁명회가 만나게 된 것에 닿아 있다.

오후에 군 도서관 기증 도서(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코너에서 봉화 정씨 문헌공종회가 펴낸 삼봉학 국제 학술대회 기록물인 ‘정도전과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이란 책자를 보고 집으로 가져왔다.

4개월 전 발간된 것인데 우리 군 도서관에서 그 자료를 보게된 것은 순수한 기증의 결과일까, 아니면 차마 쓰레기처럼 처리할 수 없어 투기(投棄)하듯 던진 결과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있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자료집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원론적이지만 모든 책은 소중한 인용 가치를 지닌다.

나는 다만 내 인연이 ‘회색 눈사람‘에서와 같은 식으로 펼쳐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이기에 ‘아픈 바로 그 곳‘을 뜻하는 한의학의 아시혈저럼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기야 그런 미련 때문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들도 사온 것이다. 한소식 하기를 기다리는 선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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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영조(英祖)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노론에 초점을 두고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식에 한몫 한 것들 중 하나가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들이 강한 나라라는 것이다.

 

영조가 노론의 공세와 협박일 수 있는 강경 주장을 물리쳤다면 비극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다소 애매하고 절충주의적인 눈으로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관계를 보아온 것이다.

 

사도세자가 미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책이 김태형 님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저자에 의해 개진된 바 사도세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음은 물론 살신성인적 인물이라는 글은 설득력면에서 최고이다.

 

사도세자가 살인성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과 무관한 소론 전부를 마구잡이로 죽이려 한 영조와 노론에 맞서 살신성인적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심리적 병에 기인해 극단적으로 수직상승하던 영조의 폭주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서서히 하강했다.

 

영조의 미친 학살의 만행에 죽음을 무릅쓰고 제동을 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너무 다른, 희생양을 자처한 의인이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가 비슷한 처지의 연산군과 달리 개혁군주, 학자군주가 된 것을 훌륭한 부모 밑에서 생애 초기와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으로 보는 등의 정조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분석 역시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영조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숱한 괄시(恝視)와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 기반한 종() 여성적 태도 및 남성 불신(마마보이적 인간 유형)과 열등감을 가졌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외향감각적 정체성도 가졌다. 영조는 "경이 비록 백번 머리를 깨트리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같은 말을 상시적으로 할 만큼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노론과 한 패가 되어 경종(景宗)을 핍박해 후계자로 등극한 죄책감(저자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 장희빈의 아들'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심증을 제시한다)도 영조가 보였던 주요 특징이다.

 

영조는 돌려치기, 떼쓰기, 변명과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흔히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죄의식과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아들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억울함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도세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노론이 난리를 쳤지만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결국 영조였다. 교활(狡猾; 간사하고 나쁜 꾀가 많음)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노론에 책임을 전가했다.

 

"중증 환자" 영조는 아들을 죽인 죄를 씻고 아들을 죽이게 만든 노론에게 복수하는 길로 세손 정조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택했다. 영조는 혜경궁 홍씨(한중록에 남편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기록한, 정조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종() 여성적 태도를 보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열다섯에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그리고 자신 앞에서만 그랬다고 썼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갑작스런 발병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직 한 사람(혜경궁 홍씨) 앞에서만 증세를 보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했던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 살해에 책임이 있는 친정의 무고함을 강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해 '한중록', 그것도 젊어서가 아닌 노회한 나이에 의도적으로 썼다.

 

혜경궁 홍씨가 택한 것은 남편을 버리고 임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아들 산(; 정조의 이름)이었다. 심리학자가 개인 또는 개별 사건에 대한 미세하고 정치(精緻)한 분석에 능하다면 역사학자는 큰 틀을 잡고 사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능한 것일까?

 

어떻든 적어도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등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가 최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특별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정서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면 무의식적 억압을 통해 당시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그는 영락 없이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이라는 지적(61 페이지)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원인보다 자각할 수 없는 원인이 야기하는 감정적 에너지가 더 큰 심리적 병으로 이어진다. 정조는 공정함에 목숨을 걸고 역사왜곡을 극도로 싫어한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잘못도 솔직히 인정하는 건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65 페이지)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발걸음은 조선을 개혁해나가는 노정(路程)과 일치했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뜨거워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더해갔다. 정조가 개인적인 복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사회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67 페이지)

 

정조는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된 아이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정조는 놀라운 감정 통제 능력과 인내심을 소유하고 있었다. 저자는 그런 정조의 놀라운 면을 이야기하며 생애 초기에 다져진 이런 능력은 바로 사도세자가 정신병자가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라고 말한다.

 

또한 성선설을 믿은 정조의 면모 역시 정상인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가해자는 자아가 병들어 자기 혐오감을 갖고 그로 인해 분노 감정이 잔인성을 띤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도세자와 정조가 전략가 유형으로 함께 분류된다고 말한다. 감정적 친밀감이 상당했으리란 생각을 할 수 있다.(76 페이지) 저자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숨막히는 순간 누구도 사도세자를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상황에 정조가 눈물로 호소한 정조를 이야기한다.

 

별군직(別軍職)이 세손을 데리고 나가라는 영조의 명을 거행하기 위해 세손을 손으로 안으려 하자 사도세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별군직에게 호통을 친 것을 상기시키며 사도세자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면 심리적 공황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웠기에 아들을 대하는 별군직의 무례함에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78 페이지)

 

만일 사도세자가 자기 목숨만을 중시하는 소인배였다면 이 시점에서 어린 아들을 이용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들을 결사적으로 부둥켜안은 채 못 간다. 이 아비를 두고 어딜 가느냐? 이제 네가 영락 없이 아비 없는 신세가 되겠구나하며 한바탕 곡을 했을지도 모른다.(78, 79 페이지)

 

사도세자는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터였다. 단지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런 죽음은 아버지의 이름에, 아버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불효가 되기 때문이다.(79 페이지)

 

정조는 안정된 정서와 뛰어난 감정통제 능력,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 적은 양의 분노 감정, 자기반성 능력, 자신감과 자부심, 공정함과 신중함, 독립성 등을 가진 강철 같은 의지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전략가로 분류된다.

 

정조를 일러 다혈질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하며 저자는 다혈질이란 감정기복이 심하거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정조는 감정기복이 크지 않았고 분노 감정도 매우 잘 통제했으므로 다혈질이라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다혈질은 영조이지 정조가 아니다.(93 페이지)

 

정조는 천주교 문제로 노론이 계석 남인들을 공격하자 노론 영수인 이이명의 문집 소재집에 수록된 서양인 소림대와 진현하다란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해 신하들을 제압했다. “천주교와 유교가 비슷한 점이 있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입 다물라는 것이었다.(95 페이지)

 

조정의 수구보수세력에게 겹겹이 포위된 정조는 개혁에 장애가 되는 낡은 정치판을 뒤바꾸기 위해 정치공작을 진행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신사임당은 부모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자랐기에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감정적으로 밀착된 아들이었지 마마보이는 아니었다.(147 페이지) 신사임당과 이이의 관계는 아주 건강한 모자 관계의 전형이다.

 

반면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힘겨운 속세에서 벗어나 신선놀음을 하고 싶어 한 은둔자, 마음씨가 착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나며 개방적이고 온화한 사람이었다.(149 페이지) 저자는 이이가 한편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한테 혼나면서 살아가는 답답한 아버지에게 화가 났을 것이라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처럼 세상에서 후퇴하려고만 한 무능력하고 비겁한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사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화목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어느 일방만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객관적으로 아버지에게 잘못이 많다고 보면서도 동시에 어머니도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주기를 원한 듯 하다.(156 페이지)

 

어머니의 역할이 있고 아버지의 역할이 있는데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아버지 같은 어머니였음에도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을 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영향력을 무의식적으로 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든지.

 

이이는 당쟁을 조장하면서 서로 상대 당을 심하게 공격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이준경이 조정에 붕당(朋黨)의 조짐이 있다는 상소를 올리자 이이는 이를 강력 비난했다. 이이가 잘못 본 것인데 이는 후에 실제로 붕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당쟁을 없애려면 무조건 덮어둘 것이 아니라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가려야 하는데 이이는 그런 언급 자체를 싫어한 것 같다.

 

이는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불화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158 페이지) 이이는 어머니가 죽자 사회에 대해 불안을 느끼며 크게 방황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아버지가 좀처럼 뚫고 나가지 못한 사회 진출에 대해 심한 불안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160 페이지)

 

이이는 가공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진 전략가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이는 감각형인 신사임당을 통해 직관형이 가질 수 있는 비현실성, 지나친 추상성 등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이이는 그런 까닭에서인지 추상적인 이론을 다루는 성리학에도 능통한 동시에 항상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 대안도 제시할 수 있었다.(165 페이지)

 

이이와 선조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외다리에서 아들과 아버지로서 숙명적으로 만났다. 선조는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와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선조는 이이기 아버지상을 투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운명적인 인물이었다.(175, 176 페이지)

 

이이는 처음에는 선조와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이후 선조에 대해 잦은 비판을 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선조에 대한 이이의 비판은 상당히 과격했으나 열등감이 심한 선조로서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을 삭였을 것이다.(177, 178 페이지) 이이의 심한 선조 비판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이이는 빈번하게 조정을 들락거렸다. 이이의 반복되는 진퇴는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이가 나뿐 결과를 초래할 것이 예견되는데도 진퇴를 거듭한 것은 왜일까? 하나는 이이의 사회 불안, 다른 하나는 무의식에 각인된 이원수 신사임당 관계 때문이다. 이이는 아버지로 인해 사회불안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은둔을 했다.

 

또한 이이가 정신적 아버지로 여긴 이황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더욱 불행하게도 선조는 아버지와 매우 비슷했다. 신사임당은 자신이 이원수에게 가한 충고와 비판이 먹히지 않으면 냉전으로 맞섰다. 이런 유형이 이이에게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185 페이지) 부부 사이에서는 줄다리기가 바람직하지만 사회에서의 그런 점은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이이가 친여성적이고 성인(聖人)을 지향했기에 여성에 대해서는 그런 책략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남성인 아버지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186 페이지)

 

허균은 어머니의 건강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당한 채 자랐다. 그의 아버지 또한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아주 엄격하기만 했다. 그 결과 허균은 생의 에너지가 부족해 몹시 우울해졌고 성품이 괴팍한 반항적인 인물이 되었다. 저자는 허균의 의식이 진보적인 사상을 적극 수용했지만 병약한 무의식은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 결과 한 길을 올곧게 갈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205 페이지)

 

허균은 한평생 꾸준히 일기를 썼고 피난을 가서도 날마다 글공부를 했으며 틈만 나면 독서를 하고 독후감을 썼다. 또한 지속적으로 글이나 시를 지었으며 주기적으로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엮는 등 매우 꼼꼼하고 성실했다.

 

허균 같은 유형은 학문이나 예술에 뛰어나고 언어능력이 출중하다. 이공계 쪽에는 별 흥미가 없다. 비상한 기억력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허균은 학문 수준도 높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시나 소설을 직접 창작했을 뿐 아니라 타인의 작품들을 높은 안목으로 비평했다.(232, 233 페이지)

 

지도자 유형은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다. 타인의 동기(動機)나 의도를 탁월하게 간파하여 적절한 정서반응을 할 수도 있다. 허균은 그런데 분노가 많고 자제력이 부족했으므로 상대방의 좋지 못한 동기나 의도를 읽어내면 바로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지도자는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한다.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대가로 타인들과 갈등관계를 형성해놓고도 초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허균은 그러지 못했다. 저자는 중종반정을 털끝 만큼도 예측하지 못해 하루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아이 연산군, 이이첨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가 배신당해 손쓸 사이도 없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지도자 허균의 말로(末路)는 그들의 성격 특성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설명한다.(234 페이지)

 

허균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그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는 어린 허균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단지 엄하게만 대한 아버지를 미워하는 한편 그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 마음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240 페이지) 그런데 허균과 같은 처지(어머니의 건강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당한 채 자랐고 아버지는 엄격하기만 해서 사랑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답은 무엇일까?

 

허균은 무엇을 해야 했는가? 저자는 허균이 사회개혁을 위해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반항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어린 시절의 부모와의 관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면서도 결국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듯 하다.

 

물론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허균은 어떤 길을 걸어야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하기에 그런 것일까? 계속 소급해 올라가야 하기에 그래서인지 저자는 어린 시절 그런 환경을 만든 부모의 책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허균은 자아가 약한 사람이어서 반성 능력이 없었고 불안과 공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말한다.(259 페이지) 저자가 인용한 이덕일 소장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허균이 진정 혁명을 의도했는지에 대해 확언을 하지 않았다. 반면 저자는 허균은 성격적으로는 혁명을 지도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26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허균은 생의 에너지가 부족하고 정서가 불안정했으며 자아가 약해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한 인물이다.(262 페이지) 나는 물론 저자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허균이 혁명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주장한 것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균은 때로 맑은 정신이 들면 머리로는 개혁을 주장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백성들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개혁을 추진하지도 않았다.

 

저자는 어머니 관계가 나쁜 사람은 혁명의 낙오자가 되지만 아버지 관계가 나쁜 사람은 혁명의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저자는 부모 복이란 말을 한다. 허균이 부모 복을 타고 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271 페이지) 이 말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책임을 물을 것도 없고 허균 자신을 탓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연산군 편이다. 허균과 비슷한 유형이다. 연산군은 훌륭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체취를 제대로 맡아보지도 못한 채 자랐다. 마마보이인 아버지(성종)가 할머니들의 사주(使嗾)를 받아 죄 없는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이다.(275 페이지)

 

왕이 될 때까지 생존위협에 시달린 불우한 경험은 연산군의 마음 깊숙한 곳에 불신감을 심어놓았고 그의 심리를 병적으로 왜곡시켰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불신감 외에 정서불안, 애정결핍, 자신감 결여, 방어적 태도, 의존심, 심한 분노, 어린 아이 같은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 하루 아침에 정신병에 걸릴 수 없듯 폭군도 하루 아침에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277 페이지) 저자는 연산군이라는 인물을 조형한 역사의 뿌리는 짧게 보더라도 수양대군의 쿠데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278 페이지)

 

저자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충신의 시대가 저물고 간신이 날뛰는 부정의한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세조 시절에 무수히 양산된 새로운 집권층인 훈구파나 공신은 권력을 틀어쥔 채 변화와 개혁을 한사코 외면하며 갖가지 음모를 꾸며낸 조선조 최초의 집단적 보수반동세력(이이화 선생의 표현)이라 말한다.(279 페이지)

 

세조의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 중 한명회가 있다. 이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 세력들과 정희왕후가 성종 시기의 정치를 좌우했다.(286 페이지)

 

비록 훈구파 권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기는 했으나 성종은 기본적으로 허수아비 왕이었다.

 

저자는 독재자 어머니 때문에 마마보이가 된 아들은 의식적으로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 있다고 말한다.(29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마마보이 성종은 유약했기에 감히 어머니에게는 어쩌지 못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성종의 심한 여성편력도 어머니 관계의 반영이다.

 

성종이 폐비 윤씨(연산군의 어머니)에게 보인 극에서 극으로의 감정의 폐해가 연산군에게 갔을 것이다.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는 폐비 윤씨를 핍박했고 그의 지지를 받은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 윤씨를 미워했다.

 

또한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는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폐비 윤씨를 질투했을 것이다. 성종은 내시 안중경을시켜 궁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소혜왕후에게 매수된 안중경은 페비 윤씨가 연산군이 자라나면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 그녀를 죽게 만드는 빌미를 만들었다.

 

마마보이와 결혼한 죄로 한때 왕비였던 윤씨는 사약을 마시고 억울하게 죽었다.

 

윤씨는 성종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정희왕후(할머니), 소혜왕후(어머니), 안순왕후(사망한 예종의 부인)의 모략으로 칠거지악 중 하나인 투기를 저지른 왕비에서 공갈협박범, 반란수괴, 독살범으로 몰려 궁에서 쫓겨났으며 결국 사약을 마시고 억울하게 죽었다.(305 페이지)

 

연산군은 생애 초기에 자칫 잘못하면 어머니처럼 죽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냈다. 사자우리 속에서 자라야 했던 유약한 아이 연산군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유일 선택은 자발적 순종을 통해 사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강고하게 형성된 대비들 - 연산군의 병적 관계는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았았다.(315 페이지)

 

대비들의 잘못된 행동(숭유억불의 나라에서 계속 불교숭상, 연산군에게 지나친 재물 바침, 부정부패 저지르거나 범죄자들 비호, 부당 인사청탁)을 일방적으로 두둔한 연산군은 신하들의 뭇매를 맞았다.

 

연산군은 여러가지 심리적 병을 앓았다. 애정 결핍과 자신감 부족, 극단적 방어 태도, 감정 통제 능력 상실과 극단적 분노 등이다.

 

저자는 연산군의 비극을 부모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한다. 연산군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어린 아이 같은 성격을 지녔다.

 

연산군은 변명과 자기합리화, 배째라 전술, 신하들 모욕하기 등의 방어기제를 선보였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상 각자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있다. 선대로부터 받은 업보를 현실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내향(Introvert) - 외향(Extrovert), 감각(Sensation) - 직관(iNitution), 감정(Feeling) - 사고(Thinking), 실천(Judgement) - 인식(Perception) 등의 대립항을 근거로 조합한 16가지 성격 유형에 바탕을 둔 책이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모든 성격 유형이 좋은 점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는 법이라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렇기에 발전 가능성, 개인의 책임의 여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지옥도 아니고 천국도 아닌 세상이다. 바람직한 국가와 사회, 부모, 개인의 조합은 참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 저자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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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노론에 초점을 두고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식에 한몫 한 것들 중 하나가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들이 강한 나라라는 것이다.

영조가 노론의 공세와 협박일 수 있는 강경 주장을 물리쳤다면 비극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다소 애매하고 절충주의적인 눈으로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관계를 보아온 것이다.

사도세자가 미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책이 김태형 님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저자에 의해 개진된 바 사도세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음은 물론 살신성인적 인물이라는 글은 설득력면에서 최고이다.

사도세자가 살인성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과 무관한 소론 전부를 마구잡이로 죽이려 한 영조와 노론에 맞서 살신성인적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심리적 병에 기인해 극단적으로 수직상승하던 영조의 폭주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서서히 하강했다.

영조의 미친 학살의 만행에 죽음을 무릅쓰고 제동을 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너무 다른, 희생양을 자처한 의인이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가 비슷한 처지의 연산군과 달리 개혁군주, 학자군주가 된 것을 훌륭한 부모 밑에서 생애 초기와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으로 보는 등의 정조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분석 역시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영조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숱한 괄시(恝視)와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 기반한 종(從) 여성적 태도 및 남성 불신(마마보이적 인간 유형)과 열등감을 가졌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외향감각적 정체성도 가졌다.

영조는 ˝경이 비록 백번 머리를 깨트리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같은 말을 상시적으로 할 만큼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노론과 한 패가 되어 경종(景宗)을 핍박해 후계자로 등극한 죄책감(저자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 장희빈의 아들‘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심증을 제시한다)도 영조가 보였던 주요 특징이다.

영조는 돌려치기, 떼쓰기, 변명과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흔히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죄의식과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아들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억울함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도세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노론이 난리를 쳤지만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결국 영조였다. 교활(狡猾; 간사하고 나쁜 꾀가 많음)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노론에 책임을 전가했다.

˝중증 환자˝ 영조는 아들을 죽인 죄를 씻고 아들을 죽이게 만든 노론에게 복수하는 길로 세손 정조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택했다.

영조는 혜경궁 홍씨(한중록에 남편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기록한, 정조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종(從) 여성적 태도를 보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열다섯에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그리고 자신 앞에서만 그랬다고 썼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갑작스런 발병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직 한 사람(혜경궁 홍씨) 앞에서만 증세를 보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했던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 살해에 책임이 있는 친정의 무고함을 강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해 ‘한중록‘을, 그것도 젊어서가 아닌 노회한 나이에 의도적으로 썼다.

혜경궁 홍씨가 택한 것은 남편을 버리고 임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아들 산(蒜; 정조의 이름)이었다.

심리학자가 개인 또는 개별 사건에 대한 미세하고 정치(精緻)한 분석에 능하다면 역사학자는 큰 틀을 잡고 사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능한 것일까?

어떻든 적어도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등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가 최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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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시집들과 시 비평서들을 읽고 리뷰하고, 이런 저런 시들을 외우고 시 낭송회에 간 것 외에 내가 시에 들인 정성은 거의 없다.

쓴 적도 없고 강의는 둘째 치고 시에 대한 느낌을 말한 적도 없는 것이다. 물론 논문 같은 리뷰로 몇몇 시인 분의 호평을 받고 리뷰 대회에서 입상을 했지만 대수는 아니다.

몇 년 전 대구의 박 ** 시인의 시집 리뷰를 올린 뒤 가진 당사자와의 통화에서 나는 리뷰를 잘 쓰니 시도 잘 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다독을 필히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갖는 것이라 생각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 리뷰와 시 비평 리뷰의 끝은 시 쓰기라고 생각하신 것인지도.

정신분석 비평을 하는 전기한 시인의 비평집을 다시 들춰본다. 프로이트 전집을 읽고 계시다는 시인.

나 역시 최근 읽은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이란 정신분석 책을 읽고 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느슨한 관심을 다시 팽팽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술할 수 없지만 이 책에 나온 거울 단계, 대타자(大他者) 등의 개념 때문이다.

그런 내가 시와 관련해 “어느 고마운 신이 내린 구원의 인큐베이터“라는 말을 할 만한 상황을 맞았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밤에 열리는 시인들의 시 감상 및 창작 강의를 들으러 가게 된 것이다. 물론 시 창작보다 내가 더 기대하는 바는 시를 이해하는 것.
월 단위로 신청을 받는 이 모임은 2017년 한 해 내내 계속된다. 당월 모임이 끝난 뒤 다음 달 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꽃길이 열린 것이라 할 만하다.

아니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첫 순서가 지난 뒤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참여를 통해 나는 내가 좋아하던 시가 제대로 된 이해에 근거한 것인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고 새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에 매혹될 수도 있다.

강의는 시인들이 하지만 들을 준비를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기꺼이 감내해야 할 가시밭길임은 물론이다.

‘시경(詩經)’을 통해 나무 이름을, 꽃 이름을, 새 이름을 배웠다는 조선의 선비들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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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해설 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맞는 말이지만 관심이 있는 만큼 찾아나선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제 심정을 대변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북촌,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종로 3가 뒷편의 익선동과 종묘 옆 봉익동 등 아담한 동네의 내력을 밝힌 책이 나왔습니다.

20세기 초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1888 ~ 1965)이란 분과 그 분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 이야기를 담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년 2월 1일 출간)란 책입니다.

구한말 일본 공사관이 있던 예장동에서 충무로 1가의 진고개 일대에 이르던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청일전쟁 승리 이후 남대문로 일대로, 러일전쟁 승리와 국권침탈 이후로는 청계촌 남쪽 대부분으로 확대된 데 이어 북촌마저 잠식될 위기에 처했을 때 위력을 발휘한 분들이 바로 조선인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업자)들이었지요.

이 분들은 가회동과 익선동 등의 필지를 쪼개 오밀조밀 붙은 작은 한옥들을 지었습니다. 이 분들에 의해 북촌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히 일본인들의 진출은 막히게 된 것이었지요.

북촌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정세권이란 분은 부동산 개발업자였지만 이익에 눈먼 자본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서민들을 위해 월세나 전세 형태로 집을 제공하기도 한 이 분은 신간회를 후원했고 조선 물산장려회의 실질적 성공을 이끌었고 조선어학회에는 건물과 토지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강탈 당하기까지 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했던 정세권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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