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시집들과 시 비평서들을 읽고 리뷰하고, 이런 저런 시들을 외우고 시 낭송회에 간 것 외에 내가 시에 들인 정성은 거의 없다.
쓴 적도 없고 강의는 둘째 치고 시에 대한 느낌을 말한 적도 없는 것이다. 물론 논문 같은 리뷰로 몇몇 시인 분의 호평을 받고 리뷰 대회에서 입상을 했지만 대수는 아니다.
몇 년 전 대구의 박 ** 시인의 시집 리뷰를 올린 뒤 가진 당사자와의 통화에서 나는 리뷰를 잘 쓰니 시도 잘 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다독을 필히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갖는 것이라 생각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 리뷰와 시 비평 리뷰의 끝은 시 쓰기라고 생각하신 것인지도.
정신분석 비평을 하는 전기한 시인의 비평집을 다시 들춰본다. 프로이트 전집을 읽고 계시다는 시인.
나 역시 최근 읽은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이란 정신분석 책을 읽고 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느슨한 관심을 다시 팽팽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술할 수 없지만 이 책에 나온 거울 단계, 대타자(大他者) 등의 개념 때문이다.
그런 내가 시와 관련해 “어느 고마운 신이 내린 구원의 인큐베이터“라는 말을 할 만한 상황을 맞았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밤에 열리는 시인들의 시 감상 및 창작 강의를 들으러 가게 된 것이다. 물론 시 창작보다 내가 더 기대하는 바는 시를 이해하는 것.
월 단위로 신청을 받는 이 모임은 2017년 한 해 내내 계속된다. 당월 모임이 끝난 뒤 다음 달 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꽃길이 열린 것이라 할 만하다.
아니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첫 순서가 지난 뒤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참여를 통해 나는 내가 좋아하던 시가 제대로 된 이해에 근거한 것인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고 새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에 매혹될 수도 있다.
강의는 시인들이 하지만 들을 준비를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기꺼이 감내해야 할 가시밭길임은 물론이다.
‘시경(詩經)’을 통해 나무 이름을, 꽃 이름을, 새 이름을 배웠다는 조선의 선비들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