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름다울 가(佳)자와 빚을 온(醞)자를 넣어 만든 시가온(詩佳醞)이란 시 창작 동호회에 참여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를 빚는다는 표현은 참 아름다운데 도자기에 대해서도 쓰이는 다의적인 빚는다란 단어를 잘 택했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았듯 시를 빚는다는 말을 풀면 어떤 단어가 적당할까? 제작, 창조, 생산 가운데 어떤 것에 해당할까? 제작이나 생산에 비해 창조는 의미가 참 거창해 보인다.
물론 시를 제작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은 시를 거듭되는 수정과 퇴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란 말에는 종교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순간적 감흥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낭만적 의미와 함께. 시가온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보고 책을 찾다가 유종호 교수의 ‘시란 무엇인가‘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눈에 띈 부분은 산문작가도 문체에 주력하는 한 창조적 구사를 수행하게 마련이기에 문체는 산문의 시라고도 할 수 있고 언어예술가라는 점에서 모든 문인은 시인이라 할 수 있다는 글(263 페이지)이다.
유종호 교수가 그렇게 볼 수 있는 글로 든 것이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이란 소설이다. 유종호 교수는 이 소설 속 한 문장을 제시한다.
˝우리를 만들어준 것은 알렉세이 아스타체프의 ‘폭력의 시학; 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였다˝
유종호 교수는 이어 이 우리라는 말이 소설 속 인물들인 그들만이 아닌 글을 읽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효과를 낸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물론 덧붙여 우리에게는 다정하고 세심한 반폭력의 시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지었다.(275 페이지)
어떻든 나에게 흥미를 주는 점은 필요한 것은 폭력의 시학인가 반폭력의 시학인가가 아니다. 소설의 내용이 내 관심거리이다.
유신시대를 배경으로 한 ‘회색 눈사람‘은 당시의 고난마저 낭만과 서정으로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빛을 발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발단은 이렇다. 강하원이라는 가난한 여자 대학생이 학기가 끝나면 교재를 내다 팔고 다음 학기 교재를 구입하는데 청계천의 한 헌책방에서 바로 그 아스타체프의 책을 구입하게 된다.
금서를 산 것인데 강하원은 이 반복되는 일을 하며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면 다시 팔아야 했기에 그것은 저금의 의미를 띤 행위였다.
몇달이 지난 어느 날 강하원은 그 책을 누군가 찾는다는 헌책방 주인의 말을 듣고 그들과 접촉을 시도해 문화혁명회라는 지하운동 단체와 관계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음을 흔든다.
이는 문화혁명회와 관계한 지 20년 정도가 지난 당시를 회고하며 강하원이 남긴 말이다.
소설에 나오는 단체이지만 내력을 밝히면 문화혁명회는 발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된다. 상처와도 같은 빛 운운하는 문장은 내가 몇 차례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 관심사는 아스타체프의 책이 계기가 되어 강하원과 문화혁명회가 만나게 된 것에 닿아 있다.
오후에 군 도서관 기증 도서(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코너에서 봉화 정씨 문헌공종회가 펴낸 삼봉학 국제 학술대회 기록물인 ‘정도전과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이란 책자를 보고 집으로 가져왔다.
4개월 전 발간된 것인데 우리 군 도서관에서 그 자료를 보게된 것은 순수한 기증의 결과일까, 아니면 차마 쓰레기처럼 처리할 수 없어 투기(投棄)하듯 던진 결과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있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자료집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원론적이지만 모든 책은 소중한 인용 가치를 지닌다.
나는 다만 내 인연이 ‘회색 눈사람‘에서와 같은 식으로 펼쳐지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이기에 ‘아픈 바로 그 곳‘을 뜻하는 한의학의 아시혈저럼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기야 그런 미련 때문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들도 사온 것이다. 한소식 하기를 기다리는 선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