看盡百花正可愛(간진백화정가애); 온갖 꽃을 만나 정히 느껴보았고

縱橫芳草踏烟霞(종횡방초답연하); 안개 속 꽃다운 풀 이리저리 다 누볐다

一樹寒梅將不得(일수한매장부득); 한 나무 매화꽃은 아직 얻지 못했는데

其如滿地風雲何(기여만지풍운하);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 어찌할 것인가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서대문 감옥에 갇힌 만해 한용운(1879 - 1944) 스님이 함께 운동에 참여한 최린(崔麟; 1878 - 1958)에게 지어 보낸 ‘증고우선화(贈古友禪話)‘란 시다.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 어찌할 것인가란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친다.

칸트, 파스칼, 뉴턴, 헤겔 등의 서양 지성에도 정통했고 한시에도 능했던 만해의 예지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해의 우려대로 최린은 결국 변절하고 말았다. 3.1독립운동이 있은 지 약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가 있다.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들이 여전히 유효하듯.

어떻든 천지에 가득한 눈바람이란 구절이 일제의 탄압 또는 회유로 해석되지만 이는 실존적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고정희 시인이 ‘화육제 별사‘에서 말한 ˝잡초보다 무성한 안락에 대한 갈망˝ 같은 것으로 보고 싶다.

명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마음이 마냥 밖으로만 향한다면 상처입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최소의 안전 장치를 알았지만 그간 마음 하나 체크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을 반성한다.

잡초보다 무성하게 (안락이 아닌) 고난을 갈망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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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가 관심을 끈다. 이미 타계(1922 – 2007)한 분이고 사회적 이슈가 형성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분도 아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미국의 작곡가들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듯 미국 작가들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커트 보네거트는 예외적이다. 보네거트는 벌지 대전투에서 정찰병으로 적후를 살피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에 수용되었었다.

벌지 전투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이다.

‘제5 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시 도살장에 포로로 갇혀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인 그의 대표작이다.

보네거트의 작품은 전쟁을 소재로 한 것에서도 위트와 유머가 빛을 발한다. 물론 이 점 때문에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내가 배워야 할 바이지만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이력 때문이다.

그는 영어 교사, 자동차 영업사원, 소방수 등의 일을 하며 퇴근 후 글을 썼다.

내가 그를 눈여겨 보는 것은 그가 영어 교사, 자동차 영업사원, 소방수 등의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면서까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그의 글들은 아직 내게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불확정적인 작품들일 뿐이다.

이력 때문에 비롯되었지만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거두어야 할 것이 호감이다.

당연하지만 이력 때문에 억지 관심을 두어서도 안 되고 이력 때문에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든 커트 보네거트는 출판사와 잡지사에 출근해 온갖 허드레 글을 쓰고 퇴근 후 소설을 쓴 올더스 헉슬리와 비교해보고 싶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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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들 중에 괴짜 천재들이 꽤 많은 듯 하다. 볼프강 파울리와 폴 디랙이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닐까 싶다.

리언 레더먼의 ‘신의 입자’에서 볼프강 파울리의 괴팍한 성격을 다시 확인했다. 레더먼은 파울리가 한 학생의 논문을 보고 “이건 틀린 정도가 아니라 틀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지경이라고(not even wrong)”(335 페이지)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레더먼은 파울리의 말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라 정의한다.

폴 디랙도 만만치 않다. 폴 디랙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강의할 때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칠판에 쓰신 수식이 어떻게 유도되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하자 “저 분의 말씀은 질문이 아니라 의견입니다.“(프랭크 클로우스 지음 ‘반물질’ 55 페이지)라는 말을 했다.

디랙의 말도 대단하지만 파울리의 말에 비하면 얌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틀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말을 들으니 입자 가속기에 대해 가졌던 궁금증이 생각난다. 질문의 격(格)과 수준에서 너무 초라한 궁금증이었다.

입자 가속기에 넣어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키는 입자를 어떻게 구하는지 궁금했지만 어디에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720 페이지나 되는 책에서 레더먼이 질문을 하고 답까지 내놓아 반갑기 그지 없다.

레더먼에 의하면 전선에 열을 가하여 백열 상태로 만들면 전자가 튀어나온다. 양성자는 수소 원자의 핵이므로 수소기체를 사오면 된다.(370 페이지)

레더먼은 양자역학은 기괴하고 낯설지만 실험결과와 정확하게 일치하며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 이론적 기초를 다진 석학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이라 말한다.

신의 입자를 설명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롭고 일화와 사소한 내용들까지도 상세하게 설명하는 친절함은 미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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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생의 말년을 보내시고 입적하신 심우장(尋牛莊)에 간다.

스님이자 시인이셨던 분답게 당호(堂號)가 선종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비유되는 소를 찾는다는 의미의 심우장이다.

시인이 간결하고 새로운 시어를 끊임없이 찾듯 선사도 오매불망의 념으로 깨달음을 찾으니 수행자로서 시인의 삶을 사신 만해 스님의 삶은 조화롭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스님의 삶은 절대 예사롭지 않았다.

스님은 일제의 수탈 정책에 항거하는 의미로 경성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해 측량 기술 및 측량 기기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출가 이후에도 기행과 파격의 삶을 거두지 않았던 만해는 오세암에서 봄을 지낸 뒤 백담사에서 사전(私錢)을 가지고 서울 계동 43 번지에서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1918년의 일이다.

내가 만해를 정신분석하기에는 무리이기에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만해의 삶 역시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만든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평소에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만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집 ‘님의 침묵‘을 하룻 밤에 쓴 파격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분인데 내 관심은 그의 기행과 파란, 파격 등이 그의 시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닿아 있다.

눈이 내리는데도 순례를 하게 된 것은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3월 1일 이전 독립정신과 문학정신을 중심으로 만해에 대한 글을 정리해야 한다.

심우장 한 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얻어낼 것은 별로 없으니 이번 나들이는 내 정신의 환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제 곧 한성대 입구역에 내리게 된다. 눈이 그쳐 우산 없이 걸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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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시 강의를 듣기 위해 용산 도서관에 갑니다.(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이 수업은 올 한 해 계속될 것입니다.)

뇌는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고, 신(神)처럼 무겁다는 말을 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생각납니다.

그는 카타르시스의 하나로 시를 썼다고 말합니다. 시인들은 증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비평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증상은 다양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공포와 비교되곤 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은 알지 못하는 막연한 무언가에 대한 감정이고, 공포는 구체적인 위협대상에 관한 감정이라지요.

공포로 가득 찬 뇌에는 꿈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말의 진위(眞僞)를 가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증오가 우리 속에 존재하며 우리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요동친다(릭 핸슨, 리처드 멘디우스 지음 ‘붓다 브레인’ 199 페이지)는 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경심리학자이자 명상 지도자인 두 저자는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사랑의 늑대와 증오의 늑대라는 두 마리 늑대를 키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은 ‘공포와 꿈‘의 관계가 ’사랑과 증오‘의 관계와 같은가, 같지 않은가, 입니다.

공포와 꿈은, 사랑과 증오가 빛과 그림자처럼 어우러지듯 그렇게 빛과 그림자의 관계로 붙어 있거나 양가감정으로 함께 자리하는가, 란 궁금증입니다.

초기불교 명상 시간에 배운 내용 중 마음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마음은 쉬지 않고 요동치는데 한 순간에 두 가지 이상의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쉼없이 왔다 갔다하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에 점령된 영혼은 꿈을 꿀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과 증오는 하나의 감정이 활성화할 때 다른 감정은 의식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 있지만 공포스럽기에 꿈을 가진다(공포스러운 순간에 꿈을 가진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두려움과 불안(과 비교되는 공포까지)을 없앨 수 있는가, 입니다.

시치료(poetry therapy)는 어떨까요? 시치료의 이론적 배경은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통풍작용, 카타르시스, 자신에 대한 탐구과정, 감정공유에 의한 지지요법, 언어에 의한 적극적 통찰, 이해하기 등입니다.(김종주 지음 ‘이청준과 라깡’ 492 페이지)

시를 읽고 쓰기보다 분석부터 하려는 저에게도 시치료의 구원(救援)이 찾아들까요?

내일 저는 시인의 시 강의에 집중할 것입니다.(내일 강의는 이승희 시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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