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시 강의를 듣기 위해 용산 도서관에 갑니다.(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이 수업은 올 한 해 계속될 것입니다.)
뇌는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고, 신(神)처럼 무겁다는 말을 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생각납니다.
그는 카타르시스의 하나로 시를 썼다고 말합니다. 시인들은 증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비평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증상은 다양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공포와 비교되곤 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은 알지 못하는 막연한 무언가에 대한 감정이고, 공포는 구체적인 위협대상에 관한 감정이라지요.
공포로 가득 찬 뇌에는 꿈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말의 진위(眞僞)를 가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증오가 우리 속에 존재하며 우리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요동친다(릭 핸슨, 리처드 멘디우스 지음 ‘붓다 브레인’ 199 페이지)는 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경심리학자이자 명상 지도자인 두 저자는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사랑의 늑대와 증오의 늑대라는 두 마리 늑대를 키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은 ‘공포와 꿈‘의 관계가 ’사랑과 증오‘의 관계와 같은가, 같지 않은가, 입니다.
공포와 꿈은, 사랑과 증오가 빛과 그림자처럼 어우러지듯 그렇게 빛과 그림자의 관계로 붙어 있거나 양가감정으로 함께 자리하는가, 란 궁금증입니다.
초기불교 명상 시간에 배운 내용 중 마음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마음은 쉬지 않고 요동치는데 한 순간에 두 가지 이상의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쉼없이 왔다 갔다하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에 점령된 영혼은 꿈을 꿀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과 증오는 하나의 감정이 활성화할 때 다른 감정은 의식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 있지만 공포스럽기에 꿈을 가진다(공포스러운 순간에 꿈을 가진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두려움과 불안(과 비교되는 공포까지)을 없앨 수 있는가, 입니다.
시치료(poetry therapy)는 어떨까요? 시치료의 이론적 배경은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통풍작용, 카타르시스, 자신에 대한 탐구과정, 감정공유에 의한 지지요법, 언어에 의한 적극적 통찰, 이해하기 등입니다.(김종주 지음 ‘이청준과 라깡’ 492 페이지)
시를 읽고 쓰기보다 분석부터 하려는 저에게도 시치료의 구원(救援)이 찾아들까요?
내일 저는 시인의 시 강의에 집중할 것입니다.(내일 강의는 이승희 시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