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생의 말년을 보내시고 입적하신 심우장(尋牛莊)에 간다.

스님이자 시인이셨던 분답게 당호(堂號)가 선종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비유되는 소를 찾는다는 의미의 심우장이다.

시인이 간결하고 새로운 시어를 끊임없이 찾듯 선사도 오매불망의 념으로 깨달음을 찾으니 수행자로서 시인의 삶을 사신 만해 스님의 삶은 조화롭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스님의 삶은 절대 예사롭지 않았다.

스님은 일제의 수탈 정책에 항거하는 의미로 경성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해 측량 기술 및 측량 기기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출가 이후에도 기행과 파격의 삶을 거두지 않았던 만해는 오세암에서 봄을 지낸 뒤 백담사에서 사전(私錢)을 가지고 서울 계동 43 번지에서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1918년의 일이다.

내가 만해를 정신분석하기에는 무리이기에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만해의 삶 역시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만든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평소에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만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집 ‘님의 침묵‘을 하룻 밤에 쓴 파격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해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분인데 내 관심은 그의 기행과 파란, 파격 등이 그의 시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닿아 있다.

눈이 내리는데도 순례를 하게 된 것은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3월 1일 이전 독립정신과 문학정신을 중심으로 만해에 대한 글을 정리해야 한다.

심우장 한 곳을 방문하는 것으로 얻어낼 것은 별로 없으니 이번 나들이는 내 정신의 환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제 곧 한성대 입구역에 내리게 된다. 눈이 그쳐 우산 없이 걸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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