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가 자신이 발견한 첫 번째 원소의 이름을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 폴로늄이라 지은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말하는 책(‘사라진 스푼’)이 있다.
이 명명은 폴란드의 독립에 아무 기여도 못했고 금속으로서도 아무 쓸모가 없고 너무 빨리 붕괴해버려 폴란드를 조롱하는 은유로 보일 수 있으며 라틴어가 점점 쓰이지 않게 됨에 따라 폴로니아가 아니라 ‘햄릿’에서 비틀거리고 약간 모자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폴로니어스를 연상시킨다고 저자(샘 킨)는 말한다.

반면 마리 퀴리가 발견한 두 번째 원소인 라듐(반투명의 초록색 광채를 내는 원소)은 전 세계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제품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라듐이 선풍적 인기를 얻은 것은 색도 좋고 이름도 리듬감이 있는 등 즐거운 요소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가령 카드뮴이나 비스무트는 광물이나 유화에서 밝고 화려한 색의 안료로 쓰이지만 이름에서는 라듐의 리듬감을 따라오지 못한다.

라듐에 대해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시인,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이런 말을 했다.

‘물리학자는 라듐 1그램의 반감기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 라듐 원자 하나가 분해되는 때를 말할 수는 없다...

우리의 미래는 외적 요인들,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과는 전혀 무관한 요인들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내적 요인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잘 알려진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본인의 미래도 이웃의 미래도 알 수가 없다. 또 같은 이유로 과거의 일에 대해 ˝만약에˝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이 인간인가’ 참고)

레비는 불행하게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나온 뒤 자살했다. 68세때인 1987년의 일이다. 실족사라는 주장도 있다.

과거 나는 레비의 죽음을 자살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실족에 의한 죽음이라 생각한다. 물론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73년은 파블로(Pablo)라는 이름의 세 거장이 타계한 해이다.

화가 피카소(4월 8일), 시인 네루다(9월 23일), 첼리스트 카잘스(10월 22일). 우연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림, 시, 음악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만의 억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파블로들의 1973년은 우연이지만 필연인 삶을 비교하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사람들은 로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졌던 독일어권의 두 인물이다.

작가 로베르트 발저(스위스)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독일). 그들은 불행, 떠남, 정신병, 자살기도 등의 키워드로 분류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발저는 산책을 나선 뒤 눈에 파묻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고(1856년) 슈만은 정신병원에서 자의적인 식사 거부로 사망했다.(1956년)

발저는 당연히 혼자였고 슈만 역시 혼자였다. 슈만의 아내 클라라는 마지막 기차로 도착하는 요아힘을 마중하려 브람스와 함께 역에 가고 없었다.(미셸 슈나이더 지음 ‘슈만, 내면의 풍경’ 168 페이지)

발저는 실제하는 길을 떠났고 슈만은 자신을 부동(不動)과 근본으로 몰아가려는 강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실제와 관념의 묘한 일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심용환의 역사 토크 - 시시비비 역사 논쟁에서 절대 지지 않는 법
심용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이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린 첨예한 이슈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들을 논리적으로 꿰어내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그릇되거나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도 노하우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심용환의 역사토크'는 대화체로 역사 왜곡 세력들을 상대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가 다룬 이슈들은 여섯 가지이다. 위안부, 친일파, 식민지근대화론, 이승만, 박정희, 고대사(古代史) 등이다. 위안부 항목을 통해서는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주장에 대항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게 될 것이다.

 

친일파 항목을 통해서는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나라가 제대로 서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 항목에서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이치에 닿지 않는 논리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승만 항목에서는 이승만이 우리나라가 잘못 끼운 첫 단추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박정희 항목에서는 박정희가 독재자란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고대사 항목을 통해서는 우리의 고대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정신대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에 발표된 여자 정신대 근로령에 따라 동원된 여자들이기에 일제치하에서 고난당한 우리나라 여성들의 실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위안부는 144년보다 이른 1937년 중일전쟁부터 동원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각각 민주화가 된 때문이다.(위안부 문제를 인정한 고노담화, 무라야마담화 등은 일본의 민주화 결과이다.) 위안부 문제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인권과 여성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1930년대 일본은 군부 쿠데타가 많이 일어나 정부와 군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31 페이지)

 

일본 극우 단체들은 자꾸 기록이 없고 증언은 효력이 없다고 말하지만 기록은 분명히 있고 국적을 달리하는 수많은 여성이 유사한 이야기를, 그것도 극히 모욕적인 경험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은 위안부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강제 동원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일제가 주도해 조직적 강제 동원을 했지만 철저하게 현장에서 민간업자들을 시켰다.

 

군인에 의해 납치된 것은 예외적이고 대놓고 강제 동원한 것은 전쟁 막바지였다.(37 페이지) 징용이나 징병이 그랬듯 위안부 역시 대부분 속여서 데리고 간 것이다. 수년간 계속된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고립된 공간에서 위안부와 일본군 몇몇이 연애를 하고 친하게 지냈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42 페이지)

 

친일파가 생존한 조건에 국제 정치적 여건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58 페이지) 김구는 초기에는 이승만과 밀착해 극우의 선봉대 노릇을 했고 친일파 처단에 대해서도 소극적이었다. 그랬던 김구가 극적인 입장 전환을 한 것은 1948년이다. 저자는 이완용을 예로 들며 친일파란 기회주의자들이라 설명한다.(71 페이지)

 

우리는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탓에 고통스럽고 통탄 할 현실을 살고 있다. 친일 문제 해결은 이 땅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슈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다룬 장에서 저자는 수탈과 개발의 이분법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이는 일제 시대를 미화하고 친일파를 비호하는 데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저자는 역사학은 상당히 포괄적인 견지에서 인간과 시간의 과정을 이해하는 인문학이라면 경제학은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역사의 특정 부문에 접근하고 특정 결론을 도출하는 데 유용하다고 말한다. (103 페이지)

 

저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탈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수량과 통계를 들이대며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든지 임금이 올라가고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만을 강조하면서 결국 근대화의 좋은 측면만 부각하고 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저자의 대화 상대로 나온 경제학자는 경제를 보는 시각이 너무 단순함을 지적한다.

 

가령 조선 상인들이 근대적 상회사를 세운 것은 일차적으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거기에 민족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경제는 민족운동이 아니라 말하는 경제학자는 보안회 같은 애국 계몽 단체의 활동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며 모든 것을 민족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왜곡과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덧붇인다.(112 페이지)

 

저자는 기존의 역사학계가 조선 후기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고만 강조했다면 비판론자들은 19세기 조선 후기는 경제가 붕괴 직전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고 비판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쟁점은 세 가지이다. 토지조사사업, 기업가 정신, 19세기 조선경제 붕괴론 등이다.

 

모든 학문은 논리적 정합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저자는 적절한 근거와 적합한 이론이 결합된다는 점에서는 역사학 또한 예외가 아니지만 아무리 탁월한 주장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새 연구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변화는 피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다만 몇몇 신선한 연구 결과를 쉽게 일반화하는 태도는 학문 발전보다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뉴라이트의 문제는 정치적인 힘에 의지해 학문적 성과를 강요하거나 한계나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데 있다. 이승만론에서 저자는 이승만이 초기에 대단히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음을 인정하면서 그렇다고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한다든지 개인의 인격에 대해 칭찬했다고 그의 역사적 책무 전체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38, 139 페이지)

 

이승만이 독립협회를 이끈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독립협회를 기획한 것은 서재필이었고 만민공동회를 이끌면서 정말 제대로 된 시민단체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일조한 사람은 윤치호이다.(139 페이지) 이승만 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슈들도 찬성하든 반대하든 단편적인 지식에 바탕을 두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저자는 역사는 객관적으로 그 시대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당대의 여러 모습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담아내야 한다고 말한다.(151 페이지) 이승만과 이승만 신드롬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이승만에 대한 최근의 긍정적인 평가는 논의할 가치도 없는 팬덤 수준에 불과하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론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거대 장치이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아니다.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데 매진했으며 대한민국은 이승만 혼자 세운 나라가 아니다.(173 페이지) 박정희론에서 저자는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겪은 큰아버지가 자신에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인생이라 말하자 그러면 왜 조선왕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느냐 말한다.(178 페이지)

 

또한 자신이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았았기에 더 객관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179 페이지) 저자는 5.16을 박정희의 쿠데타로 규정하며 혁명(4.19)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혼란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또한 혼란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유산이지 4.19 혁명 자체 때문은 아니라 덧붙인다.(185 페이지)

 

또한 유신(197210)의 목적은 장기집권이었지 중화학공업 발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187 페이지) 저자는 모두가 잘 살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느냐?고 묻는다. 그런 논리라면 중국이나 일본은 왜 저럴까요?라고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서구 국가들의 경우 민주화와 산업화는 전혀 별개였다.

 

영국에서 시민혁명은 17세기에 있었고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에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는 18세기에 시민혁명이 있었고 산업혁명은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전혀 다른 이유로 시민혁명이 먼저 있었고 후에 별도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냉정히 따지면 시민혁명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나아갔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비롯해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박정희의 리더십은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었는지 냉정히 평가해야지 무작정 성과를 냈다, 카리스마가 있다, 잘 살게 했다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고 말한다.(192, 193 페이지) 저자는 박정희에 따라다니는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싫으면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있던 시절 만주는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항일투쟁을 하던 지역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한인들의 독립운동도 사회주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했듯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항일투쟁은 항일투쟁이다. 저자는 만일 박정희가 만주가 아니라 중국 남부나 충칭 인근 전투 부대에 배속되었다면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싸웠을 것이라 말한다.(197 페이지)

 

박정희가 펼친 재벌의 경영권만을 보전한 노동 배제 정책 때문에 사회구조가 극도로 양극화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문에 소유는 사유화되고 손실은 사회화되는 독특한 한국식 경제구조가 만들어졌다.(218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성과가 오히려 1960년대 즉 박정희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그나마 민주적인 시대에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중화학 공업을 최고의 업적인 양 강조하지만 1970년대 내내 낮은 생산성 문제로 시달렸고 1978년 전경련 자료에 의하면 246개 산업 부문 중 국제경쟁력을 갖추었던 산업은 고작 28개 부문에 그쳤다. 정부의 보조가 없었다면 수출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218, 219 페이지)

 

박정희 정권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1 퍼센트로 대단하다. 이 기간에 국내총생산의 경상가격이 131조인데 지가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은 326조였다. 의도적으로 토대를 파괴했다고 할 상황이었다. 저자는 진정 박정희 시대와 멀어질 때 박정희의 망령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225 페이지)

 

고대사론에서 저자는 단군신화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몽골이 침입했을 때이다. 단군신화가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화된 것은 조선시대이다.(235 페이지) 저자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사고하면서 우리 고대 문화를 현대에 잘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동이족이나 예맥족에 대한 그럴싸한 환상(우리 민족이 옛날에는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은 걷어내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또한 활동 영역이 곧 영토라는 식의 단순한 생각도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237 페이지) 저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 말한다.(242 페이지)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일원론적으로 민족의 발전사만 설명하고 우리가 한때 대단했고 잘 나갔다는 식에 머문다면 심각한 학문적 정체라고 말한다.(243 페이지)

 

저자는 왜 항상 자부심만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여러 사건에 대한 세밀한 검토,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하는 것이 자신을 비하하고 식민사관에 물든 태도인가라 묻는다.(246 페이지) 저자는 견해가 다르다고 고대사 파동의 문제를 신채호 대 이병도, 민족주의 사학 대 식민주의 사학, 애국 대 매국의 대립 구도로 선을 긋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261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으로 하여금 결혼과 사랑을 분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책이었다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의 말은 다소 의외이다.(‘사랑은 사치일까?’ 참고) 책은 체험보다 더 소중한 것일까?

훅스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통해 기꺼이 과거의 정체성을 떨쳐내고 영혼의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 우리 존재의 거대한 신비로움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말을 강조한다.(책과 체험을 우열을 가려야 할 대상으로 나누지 말 것.)

어떻든 그런 분리의 결과 훅스가 포기한 것은 결혼이고 떨칠 수 없었던 것은 전능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한다.

약 2년 만에 ‘사랑은 사치일까?’를 다시 읽는 내 눈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은 사랑은 우리가 내면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찾아오며, 사랑의 여정은 자기인식을 감수(甘受)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훅스는 미국의 정신분석가 존 웰우드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에 의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그저 내면의 삶의 확장에 불과하며 자기 자신과 열려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럴 수 있다.

이런 유의 사유를 우리는 유식(唯識) 불교의 저서인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붓다는 실로 어떤 진리도 설파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함을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제는 “당신이나 나나”(허수경 시인의 표현) ‘내면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기인식’을 감수하는 일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해 11월 24일 선정릉(宣靖陵) 테마 해설 수업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선생님(반* 선생님)과 주역(周易)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줄곧 주역을 잊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해설서를 들추어보았습니다.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지지지지(知至至之) 지종종지(知終終之)’란 글에 눈길이 멈춥니다.

이를 데를 알아 이르고 멈출 데를 알아 멈춘다는 뜻이지요.

공자가, 망해가는 주(周)나라를 모델로 삼았다면 주희(朱熹)는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주(周)의 봉건 제후들을 전범(典範)으로 삼았습니다.

부처 사후의 불교도들이 부재하는 부처를 예배해야 하는 어려움을 불상을 만들어 해결했듯 주희는 ‘주자가례(朱子家禮)’ - 조선이 궁궐 영건(營建)의 이상으로 삼았던 좌묘우사(左廟右祀), 전조후시(前朝後市) 등의 원칙의 출처이기도 한 - 를 저술함으로써 해결했지요.

제사의 중심을 사대부로 가져오고 범위를 4대 조상까지로 확대한 것입니다.

밝을 희(熹)자를 쓰는 주희(朱熹)가 그 밝음을 중화시키기 위해 그믐 회(晦)자를 써서 스스로 호를 회암(晦庵)이라 했다면, 세종대왕은 아들의 군호(君號)인 ‘안평(安平)’이 편안하고 태평하다는 뜻이기에 혹여 안이하고 게으른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염려해 ‘비해(匪懈: 게을리 하지 않는다)’라는 호를 내렸습니다.

이제 5월이 되면 저는 마음으로만 그려오던 부암동 모처에서의 안평대군 강의를 들으러 갑니다.

휴일인 수요일 강의인데다가 시간이 7시에서 8시 30분까지로 잡혔기에 더할 수 없이 좋습니다.

계유정난때 형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된 한(恨)의 인물인 안평은 시, 글씨, 그림, 거문고까지 두루 능했던 학자이자 예술가였지요. 이번 강의는 그런 안평의 매력에 푹 빠지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행복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