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앤스터디가 ‘지성과의 산책 1 - 한국 성리학과 양명학의 대가들을 만나다‘를 주제로 강의한다고 한다.(김교빈 교수 강의)

성리학과 양명학의 관계를 밝히고 그 학문들이 한국 철학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분석하는 강의이다.

외주내양이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주자학 즉 성리학을 표방하고 속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주(周)나라의 역(易)을 주역(周易)이라 하니 주자학은 주나라의 학문인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주자학은 주희(朱熹)의 학문이란 의미의 朱子學이다. 더구나 주희는 중국 남송 사람이었다.

공자의 학문, 맹자의 학문 등을 (원시) 유학이라 하지만 오롯이 한 사람을 성인으로 대우해 그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주자학이라 부르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외주내양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상의 획일화를 지향하고 사문난적이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이단을 지양한 조선의 사정을 반영한다.(지양이라기보다 배척이고 말살이겠지만...)

어떻든 외주내양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는 소설 탄압정책을 수행하고 사적으로는 소설을 탐독했던 조선 후기의 일부 신하들을 생각하게 한다.

겉으로는 소설 탄압 제스처를 쓰고 속으로는 소설에 빠지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것이 외주내양과 다른 것은 외주내양은 두 가지 학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인 반면 소설과 관련한 상반된 태도는 하나에 대한 표리부동한 대처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부정적으로 본 조선의 임금으로 정조를 들 수 있지만 소설의 무엇이 문제일까?

그제(5월 16일) 실학박물관에서 동기의 해설을 듣다가 단서를 얻었다. 문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비판이 문제가 아니었을지? 문체와 사상이 밀접하니 결국 문제는 문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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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이 ‘즐거운 편지‘에서 말했듯(“...그대가 앉은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사소한 소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글쓰기가 추상적인 영역에서 출발하지 않고 경제 문서 즉 치부책(置簿冊)을 쓰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문헌학자들의 보고 때문이다.

나도 추상을 버리고 치부책을 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허수경 시인의 ‘모래 도시를 찾아서’에 나오는 ‘존재할 권리’라는 말을 들으면 물리학자 리언 레더먼이 표현한 중성미자(中性微子: 뉴트리노)처럼 겨우 존재(barely a fact)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내 존재도 감사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허수경 시인이 ‘존재할 권리’라는 말을 쓴 것은 자살 폭탄자들의 가족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촌락에 폭탄을 던지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보고 한 말이다. 존재할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레더먼은 뉴트리노를 질량이 0에 가깝고, 전하도 없고 크기도 없고 강력(强力)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고 표현했다.(‘신의 입자’ 26 페이지)

뉴트리노는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로 붕괴할 때 생기는 소립자(素粒子)이다. 그러니 나를 뉴트리노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겠지만 존재감이 그렇게 가볍다는 말이다. 어떻게 존재감을 높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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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말한 ‘예열 없는 공부‘란 말의 의미는 다소 아니 많이 어렵다.

그에 의하면 ‘예열 없는 공부‘란 신체와 정신, 무의식과 지성, 의욕과 욕심의 근대적 분화(分化)와 물화(物化)를 깨고 새로운 몸(삶의 양식과 버릇)을 얻고 길러 인간의 통전적 성숙을 위해 그 몸을 경첩으로 삼아 갖은 이치들을 융통케 하는 것이다.

내가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김 교수가 설명한 공부는 분열 없는 공부, 소외 없는 공부라 불러야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예열 없는 공부‘보다 ‘지체 없는 공부‘ 즉 뜸 들이지 않는 공부를 말하고 싶다.

‘지체 없는 공부‘란 불필요한 예비 동작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남양주 실학 박물관 가는 길에 들고 나온 제임스 글릭의 ‘인포메이션‘도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의 사이트를 찾고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감수(監修)의 글을 읽고 글릭의 전작인 ‘카오스‘에 관한 내용을 검색하고 심호흡을 하고..등등의 동작을 하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고 있으니 영락 없이 지체하고 우회하고 허송하는 공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도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다. ‘무슨 무슨 책을 읽기 전에‘나 ‘무슨 무슨 책을 읽으며‘보다 ‘무슨 무슨 책을 읽고‘ 형태의 글을 써야겠다.

어떻든 정말 문제인 것은 지금 필요한 것과 당장 필요한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지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은 부족하고 읽을 책은 많음을 늘 유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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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정조의 소설관은 너무 달랐다. 사도세자는 소설은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 외로움을 없애주고 웃음을 주고 교훈을 주고 심지어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는 말을 했다.

반면 그의 아들 정조는 소설은 독이며 이단이고 음란하고 야비한 음악,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간사한 음악이라고까지 말했다.

박소연의 장편 소설 ‘꽃 그림자 놀이’를 읽고 있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소설 이야기는 이 책의 서두에 인용된 글이다.

소설과 관련해 드러난 사도세자와 정조 사이의 커다란 생각의 차이를 보니 두 부자 사이에 드라마틱한 비밀이라도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재미가 있어 다행이고 의미도 있어 만족스럽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읽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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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다 도라히코의 ‘어느 물리학자의 일상’, 캐슬린 제이미의 ‘시선들’을 내 글쓰기의 이상(理想)으로 삼으려 한다.

일본 최초의 과학 문필가라 불리는 데라다 도라히코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이었던 물리학자였다.

과학적 정밀함과 문학적 유려함이 한데 어우러진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캐슬린 제이미는 ‘벤투의 스케치북’ 등의 저자인 평론가 존 버거가 에세이 형식을 마술처럼 주무르는 여자 마법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스코틀랜드의 작가이다. ‘시선들’은 그가 쓴 자연 에세이이다.

내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샤먼 앱트 러셀의 인상적인 에세이집인 ‘꽃의 유혹’을 읽고서부터이다.

러셀은 자연자원 보존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꽃의 유혹’에서 그는 자연은 결코 자신 앞에서 침묵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러셀은 자연이 자신에게 속삭이며 때로는 “아름다움,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 소리친다고 말한다.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도 자연을 대상으로 쓴 시적인 문체의 글이다. 애커먼은 박물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이자 시인으로 자연과 과학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옮기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도 언급할 만하다. 그는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많은 에세이를 남”(고토 히데키 지음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202 페이지)긴 사람이다.

고토 히데키는 이론 물리학자는 논리에 엄격하고 군더더기를 싫어해서 문장을 계속 간결하게 수정하며 심지어는 문장에 적합한 말은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해 단어 선택에 극도로 신중하다고 말한다.(‘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204 페이지)

일본 최초(1949년)의 노벨상(물리학)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는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고토 히데키는 이론 물리학자들의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 그렇게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은 따뜻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시퍼렇게 간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문장은 따뜻하지 않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이 뉴턴이 무지개를 프리즘의 색으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는 시인 존 키츠식의 생각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다이앤 애커먼의 ‘휴먼 에이지’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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