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이 ‘즐거운 편지‘에서 말했듯(“...그대가 앉은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사소한 소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글쓰기가 추상적인 영역에서 출발하지 않고 경제 문서 즉 치부책(置簿冊)을 쓰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문헌학자들의 보고 때문이다.
나도 추상을 버리고 치부책을 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허수경 시인의 ‘모래 도시를 찾아서’에 나오는 ‘존재할 권리’라는 말을 들으면 물리학자 리언 레더먼이 표현한 중성미자(中性微子: 뉴트리노)처럼 겨우 존재(barely a fact)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내 존재도 감사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허수경 시인이 ‘존재할 권리’라는 말을 쓴 것은 자살 폭탄자들의 가족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촌락에 폭탄을 던지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보고 한 말이다. 존재할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레더먼은 뉴트리노를 질량이 0에 가깝고, 전하도 없고 크기도 없고 강력(强力)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고 표현했다.(‘신의 입자’ 26 페이지)
뉴트리노는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로 붕괴할 때 생기는 소립자(素粒子)이다. 그러니 나를 뉴트리노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겠지만 존재감이 그렇게 가볍다는 말이다. 어떻게 존재감을 높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