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축제(祝祭)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선생님은 이 말을 일본의 이상한 정신 세계가 반영된 말이니 쓰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축(祝)은 빌 축, 저주할 축이다. 이 역시 이상하다. 빌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니.(구체적으로 축이란 글자가 저주의 의미로 쓰인 경우를 찾지는 못했다.)

크리스테바를 인용하며 누군가를 해석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로 구성된다는 말을 한 정신과 의사 김종주 교수 생각이 난다.(‘이청준과 라깡’ 510 페이지)

어떻든 축하의 제사라니...축(祝)이란 글자가 문제인가?

축(祝)은 신에 봉사하는 종교인을 말한다. 공자는 어릴 때 제상 위의 술잔 등을 가지고 원유(原儒)의 기도나 제사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공자는 유자(儒子)를 종교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인유(小人儒)와 예교성을 중시하는 군자유(君子儒)로 나누었다.

원유 또는 소인유는 무축(巫祝)이고 군자유 또는 대인유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유(思想儒)이다.(가지 노부유끼 지음 ‘유교란 무엇인가’ 참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예(禮)를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으로 나누었다.

이 책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宗廟)에 부묘(祔廟: 신주를 종묘에 모심.)되기까지는 흉례,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에서 길례이다.

축하의 제사라는 말과 연결지을 법하다. 그런데 정녕 조상을 다시 만나는 것이 길한 일이고 기쁜 일이라면 헤어질 때는 어떤가. 슬프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제(祭)와 (천도재, 예수재預修齋 등의) 재(齋)를 구분하며 제는 와서 흠향(歆饗)하라는 의미이고 재는 가라는 의미(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저승으로 잘 가기를 바라는)라 한다.

하지만 제(祭)의 대상인 혼(魂)도 결국 돌아간다. 이듬해에 다시 오겠지만. 그나저나 신(神), 제(祭), 예(禮), 축(祝), 조(祧: 불천不遷의 반대인 조천祧遷의 조), 기(祈), 도(禱), 사(祀: 사당), 조(祖), 사(社), 화(禍), 복(福), 지(祗),

지(祉: 복), 조(祚: 복), 요(祅: 재앙), 비(秘: 비밀), 상(祥: 상서로움).. 보일 시(示)변의 글자가 너무 많다. 시(示)는 귀신을 뜻한다. 오호 귀신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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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로 떠나는 힐링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11
이향우 글.그림, 황은열 사진 / 인문산책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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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는 조선의 왕들과 왕비들의 신위(神位)를 모신 국가 사당이다.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 석굴암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는 국보 227호이다. 종묘 일대를 훈정동(薰井洞)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종묘로 가는 길 오른 편의 어정(御井; 서울시 유형문화재 56. 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던 우물) 때문이다.(: 향풀 훈)

 

종묘는 궁궐 전각들이 대부분 화려한 팔작지붕인 것과 대조적으로 맞배지붕이다. 원래 창덕궁, 창경궁, 종묘는 담장으로만 구분된 하나의 영역이었다. 일제에 의해 창덕궁과 종묘 사이에 관통도로가 세워졌다. 현재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시키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종묘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신이 다시는 길인 신로(神路)가 있다는 점이다. 궁궐의 삼도(三道)는 가운데에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가 있다면 종묘의 삼도는 가운데에 신이 다니는 길인 신로가 있다. 신로의 오른쪽은 어로(御路), 왼쪽은 세자로(世子路)이다. 신로는 신향로(神香路)라고도 불리는데 대제를 지낼 때 조상과 관련된 신주(神主), (), (; 축문)을 옮길 때 밟는 길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이 있다. 혼백이 사방으로 흩어진다는 말로 매우 놀라거나 혼이 나서 넋이 나간 상태를 뜻한다. 옛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가고 몸을 지탱하던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는 혼을 위한 구조물이고 무덤은 백을 위한 공간이다.

 

종묘는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졌다. 중요한 것은 경복궁과 종묘 및 사직단 창건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47 페이지)는 점이다.(동시에 짓기 시작했지만 종묘는 규모가 작아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졌다.) 조선왕조는 주례 고공기의 법식을 따라 좌묘우사를 선택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지은 것이다.(좌묘우사...우리가 보기에 경복궁 오른쪽에 종묘, 왼쪽에 사직단이 있다.)

 

현재 종묘에는 세 개의 지당(池塘; 연못)이 있다. 외대문 안쪽 왼편에 하지(下池)가 있고 삼도 오른쪽으로 망묘루 가는 길에 중지(中池)가 있고 그 위쪽으로 상지(上池)가 있다.(59 페이지) 중지는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사각형의 못으로 천원지방의 원리를 따랐다. 종묘라는 제례 공간의 특성에 따라 지당에 연꽃 등을 심지 않았고 물고기도 기르지 않는다.

 

겨울 눈 덮인 중지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궁궐의 지당 섬에 소나무를 심은 것과 달리 종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향나무를 심었다.(61 페이지) 중지를 지나면 종묘 건물 중 유일한 팔작지붕인 망묘루가 있다. 왕이 종묘를 바라보며 선왕의 은덕과 나라의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망묘루 북쪽에 서향의 향대청(香大廳)이 있다. 향축과 예물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대기하는 등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종묘 신실 중앙에 신주가 모셔졌는데 신주는 잣나무로 만든 궤에 넣어 보관했다. 신실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종묘제례 때만 공개된다. 향대청에서 북쪽으로 긴 숲을 지나면 재궁(齋宮)이 나온다.

 

재궁은 제례를 앞둔 왕과 세자가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등 제사 준비를 하던 곳이다.(81 페이지) 남문을 들어서면 이어지는 어로와 맞닿은 북쪽에 임금이 머물던 어재실(御齋室)이 있다. 동쪽으로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 서쪽에는 목욕을 하던 어목욕청이 있다. 재궁 동쪽은 전사청(典祀廳) 가는 길로 이어진다.

 

전사청은 종묘에서 제수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의 서문을 나와 삼도를 따라가면 정전의 동문으로 이어진다.(90 페이지) 동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네모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의 단이 두 개 보인다. 돌로 가장자리를 누르고 그 위에 검은 전돌을 깔았는데 이를 판위(版位)라 한다.

 

판위는 왕과 세자가 정전에 들어가기 전에 멈춰 서는 자리이다. 왕은 제향 하루 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도착하면 먼저 종묘에 인사드리는 망묘례(望廟禮)를 행했다. 망묘례는 왕이 정전과 영녕전(조종과 자손이 영원히 안녕하라는 의미의 영녕전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은 세종 3년의 일로 당시 상왕인 태종에 의해서였다.)의 조상들께 인사를 드린 후 신실을 돌아보는 예를 행하는 일이다.

 

정전 동북쪽에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이 영녕전에도 있었으나 현재는 정전 전사청만 있다. 부엌 역할을 했기에 부엌 주를 써서 신주(神廚)라 했다. 전사청 동쪽에 제정(祭井)이 있다.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이다.(106 페이지)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에 지어진 네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인 수복방(守僕房)은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108 페이지) 정전의 정문은 신을 위한 문으로서 신문(神門)이라 하고 남문 또는 남신문으로 불린다.(113 페이지)

 

제향의 절차에 따라 제례를 행하는 사람 외에는 왕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가운데 신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동문, 서문과 달리 신문의 위는 홍살로 되어 있다. 동문은 왕을 비롯한 헌관, 제관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문으로 재궁에서부터 어로가 연결되어 있다.

 

종묘 건축은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단순한 단청이나 절제된 문양으로 종묘를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만든다.(121 페이지) 정전 앞의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로 구성되어 있고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장 큰 월대이다.(122 페이지)

 

월대(月臺)는 궁궐 앞의 섬돌이다. 섬돌은 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돌층계이다.(122 페이지) 정전 동북쪽 계단 밑에는 소차(小次; 예전에 왕이 거동할 때 쉬기 위해 임시로 친 막) 설치를 위한 방형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넓은 월대의 윗면은 박석(薄石; 얇고 넓적한 돌)을 깔았고 곳곳에 차일(遮日) 고리가 박혀 있다.

 

종묘 월대의 박석은 궁궐의 박석보다 조금 더 거친 느낌을 준다.(123 페이지) 종묘 정전은 처음 7칸의 태묘로 창건되었다. 태조 49월에 동당이실(同堂異室)로 태실 7칸 안에 신실(神室) 5칸을 만들고 동서에 협실(夾室) 2칸의 종묘를 영건(營建; 집이나 건물을 지음)하고 태묘(太廟)라 했다.

 

신실 5칸은 석실(石室)로 만들어 시조와 4대조를 모시는 5묘로 사용하고 2칸의 협실을 둔 것이다. 동당이실은 한 건물 내의 기둥 사이에 발을 내려 칸을 막아 여러 개의 사당을 두는 것이다. 역대 왕의 신위는 정전(태묘)에 부묘(祔廟; 삼년상이 지난 뒤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되었다가 친진(親盡; 제사를 모시는 대수가 끝남)되면서 영녕전으로 조천(祧遷)했다.(132 페이지)

 

그러나 공덕이 있는 왕은 불천위(不遷位; 世室)로 정하여 영녕전으로 조천하지 않았다. 5대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위를 옮겨 봉안했지만 태종이나 세종과 같이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신주는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하고 덕종이나 장조와 같이 보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하여 왕으로 봉안하고 정전 내 가장 서쪽에서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 등의 원칙에 따라 종묘의 건물들은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쳤다.(133 페이지)

 

임진왜란때 정전과 영녕전이 전소되었지만 선조가 피난중에도 종묘의 신주를 수습해 왕실의 신주가 보존될 수 있었다.(133 페이지) 정전은 제례가 행해지는 공간이다. 신실 내부는 신을 위한 어둠의 공간으로 만들어 엄숙하고 장중한 침묵을 연출해냈다.(138 페이지) 종묘 정전에는 열아홉 분의 왕과 서른 분 왕후의 신주를 모셨다.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정전은 신주를 모신 19칸의 신실이 있고 양쪽 끝에는 각각 2칸의 협실이 있다. 예전에는 협실에도 신위를 모셨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협실 앞으로는 동서 월랑이 각각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138 페이지) 종묘의 신실은 동당이실 제도를 적용한 건물에 서쪽을 상위로 하여 신주를 모시는 서상(西上) 제도로 배치했다.

 

서상 제도에 따라 첫번째 신실에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3대 태종, 4대 세종, 7대 세조, 9대 성종, 11대 중종, 14대 선조, 16대 인조,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23대 순조, 추존왕 문조(익종; 효명세자), 24대 헌종, 25대 철종, 26대 고종, 27대 순종의 순으로 모셔졌다.(142 페이지)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오례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을 말한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에 부묘되기까지는 흉례,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에서 길례이다.(146 페이지) 묘호는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의 왕의 이름이고 능호는 왕릉의 호칭이다.

 

시호(諡號)는 임금 사후 공덕을 칭송해 부여한 이름이다. 돌아가신 왕은 부묘를 통해 종묘에 신주가 모셔진 이후에야 각종 제사의 대상이 된다.(152 페이지) 공이 많으면 조(), 덕이 많으면 종()이라는 묘호를 부여했다지만 그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157 페이지)

 

원래 태조를 제외하고 모두 종으로 묘호를 정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세조나 인조는 정난이나 반정을 통해 등극해 왕통(王統)을 다시 세웠다고 하여 조로 칭했고 선조는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이유로 조를 부여받았다.

 

왕의 부모로서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생부와 생모는 당연히 종묘에 모실 수 없었지만 성종이 생부 의경세자(세조의 장자)를 왕으로 추존해 덕종이라는 묘호까지 마련하여 숙부인 예종의 신실 위 칸에 봉안함으로써 이후 추존의 전례를 남겼다.(158 페이지) 왕이 서쪽에 모셔지고 왕비는 동쪽에 모셔졌다.

 

왕비가 여럿일 경우 책봉 받은 순서로 위차를 두고 신주를 모신다.(161 페이지) 왕비가 먼저 승하할 경우 임시 거처라 할 혼전(魂殿)에 모셨다가 왕이 부묘된 이후 부묘했다. 종묘의 모든 의례는 철저히 남성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제사 음식 장만에서 진설(陳設), 그리고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제관, 집사, 악공, 일무요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성들이 역할을 담당했던 의례공간이었다.

 

묘현례(廟現禮)는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여성이 종묘에 들어와 치른 의식이었다. 묘현례는 세자빈 또는 왕비가 가례를 올린 뒤 종묘의 선대왕과 왕후에게 인사를 올리는 의식이다.(187 페이지) 중종대에 몇 차례 묘현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의 세자 경종이 단의빈 심씨와 가례를 올린 뒤 종묘에 알현하기 위해 온 것이 묘현례의 시초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열 살에 동갑 나이로 가례를 마친 뒤 종묘에 알현했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어 묘현례를 행했다.(189 페이지) 정전 월대 아래 동쪽의 공신당(功臣堂)은 남신문의 남쪽 담장에 바짝 붙어 있는 긴 집으로 역대 국왕 공신들의 위판을 모신 곳이다. 그렇게 모셔진 공신들을 배향 공신(配享功臣)이라 한다.

 

왕의 신위가 영녕전으로 조천(祧遷)이 되면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으므로 그 왕대의 배향공신의 위판은 다시 사가로 전해져 땅에 묻혔다.(191 페이지) 현재 공신당에는 역대 왕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념을 반영한 결과이다. 오늘날은 정전과 영녕전을 포함하는 일대를 모두 종묘라 하지만 조선시대 초에는 지금의 정전만을 종묘(태묘)로 인식하고 영녕전은 별묘(別廟)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201 페이지)

 

영녕전 가운데 건물의 지붕은 높고 양쪽 협실은 지붕이 낮고 월대의 높이도 정전 만큼 장대하지 않다.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를 비롯해 선왕 중에서 큰 공적이 있는 왕의 신위는 불천위라 하여 4대가 지나도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정전에 모셨다. 영녕전은 4대가 지난 왕과 왕후의 신위를 정전으로부터 옮겨 모시는 또 다른 사당이라 하여 조묘(祖廟) 또는 별묘로 불렀다.

 

세종때 처음 건립될 당시에는 모두 6칸의 건물이었으나 점차 증축해 16칸이 되었다. 현재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조천된 왕과 왕후, 추존 왕과 왕후의 신위 등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203 페이지) 영녕전 신실은 가운데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모셔졌고 서상 원칙에 따라 서쪽 협실에 2대 정종, 5대 문종, 6대 단종, 추존왕 덕종, 8대 예종, 12대 인종, 동쪽 협실에 13대 명종, 추존왕 원종, 20대 경종, 추존왕 진종, 추존왕 장조(사도세자), 의민황태자(영친왕) 등이 모셔졌다.

 

영녕전 바깥 서쪽에 종묘제례때 악공들이 머물던 건물인 악공청이 두 군데 있다. 국가 사당으로 태묘(종묘)가 있다면 왕실 사당으로는 궁궐 안에 선원전(璿源殿)이 있다. 선원전은 왕의 어진을 봉안한 사당으로 사묘(私廟)의 성격이 강하다.(220 페이지) 종묘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고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뒤를 이었다.

 

현재 5월에 봉행되는 종묘제향의 화려하고 장엄한 장면은 경복궁에서 출발하는 어가행렬로 시작한다. 경복궁을 출발하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종로를 거쳐 종묘에 드는 어가행렬은 1년에 한 차례 볼 수 있는 장엄의 극치이다.(233 페이지)

 

공자는 예()의 완성은 악()이라 했다. 종묘제례의 완성은 종묘제례악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279 페이지) 종묘제례악은 기악()과 노래(), 무용()으로 구성된다. 종묘제례에서 추는 춤인 일무(佾舞)의 기원은 세조때이다.

 

6일무(6×6; 36)였으나 고종이 황제가 된 이후 8일무(8×8; 64)를 추었다.(292 페이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있다. 문무는 약(피리)과 적을 들고 춘다. 무무는 칼과 창을 들고 춘다.(293 페이지) 종묘제례는 의례(儀禮), (), (), ()가 함께 어우러지는 최상의 무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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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종묘(宗廟)에 갔을 때 해설사로부터 종묘 배향(配享) 이야기를 듣고 종묘 배향과 문묘(文廟) 배향의 차이를 물었다.

답을 듣지 못했는데 어제 비로소 그 차이를 알았다. 종묘 배향은 공적(功績)이 있는 신하를 왕과 함께 모시는 것이고 문묘 배향은 학덕이 있는 신하를 공자(孔子)와 함께 모시는 것이다.

정도전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경복궁 vs 창덕궁‘ 이야기에 이어) 정도전은 문묘에 배향(또는 종사從祀)되지 못했고 정몽주는 배향(또는 종사)되었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반대한 인물이고 정도전은 조선의 틀을 세운 인물이 아닌가. 종묘나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임금도 찾아와 고개 숙이는 곳은 두 곳 뿐이기 때문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이란 용어가 있다. 남명 조식(曹植)의 제자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공격한 사건이다.

정인홍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핬는데 그것은 회재(晦齋)와 퇴계(退溪)가 이미 문묘에 배향된 후였기 때문이다. 회퇴변척 사건은 신하와 신하 사이의 권력 다툼이다.

임금과 귀족들의 다툼도 있다. 불천위(不遷位)와 관련된 사안이다. “제사에는 집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기능이 있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136 페이지)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세력권은 확대하고 귀족의 그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조선 왕실이 4대가 지나면 혼백(魂魄)이 흩어진다는 믿음과 달리 건국 시조까지 종묘에 모신 것 역시 세력권 확대를 위한 조치였다.

성리학적 근거와 무관한 것이다. 모든 것은 정치와 연관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중국 주(周)나라의 좌묘우사(左廟右社)나 은(殷)나라의 좌묘우궁(左廟右宮)도 정치적 선택이었다.(주나라의 좌묘우사는 정도전에 의해 수용된다.)

정치가 바로 서야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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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다리(museum legs)는 미술관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이 사이 오랜 시간 천천히 걷는 불규칙적인 동작을 취해 생기는 다리 통증입니다.
아트 컨설턴트 요한 이데마는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것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근육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많이 걸어서가 아니라 어슬렁어슬렁 걸었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다리가, 걷는 속도의 도움 없이 오직 ‘당신‘을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물관 다리, 궁궐 다리란 말도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미술관 다리, 박물관 다리, 궁귈 다리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공간인가보다 혼자인가 여럿인가에 따라 다를 것이고, 여럿이라면 누구와 함께인가에 따라 다를 것이고 어떤 전시물인가에 따라서도 다를 것 같습니다.

이번 달 내에 자유 관람이 가능한 시간(매주 토요일, 매월 마지막 수요일)을 골라 종묘(Jongmyo Shrine)에 가야 하는 저는 종묘 다리 즉 Shrine Legs을 앓게 될 것 같습니다.

다 아시듯 6월 3일 해설을 위해 동선을 찾고 주제를 설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사이를 돌아다녀야 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이데마는 미술품들을 본 뒤 다리가 아픈 것은 불규칙적인 걸음 때문만은 아니라 말합니다.

미술이 일으키는 아름다움, 재미, 감정, 충격, 놀라움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동시에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종묘는 어떨까요? 소박함이 주는 놀라움, 엄숙한 공간감, 강렬함 등이 순례자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기분 좋은 피곤함이 예상되는 종묘 사전 답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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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실학박물관 앞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이중창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를 이름으로 한 음식점겸 카페를 만났다.(5월 16일)

육십줄의 여 사장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곡가는 (모차르트보다) 브루흐라는 말을 했다. 운길산 역에서 56번 버스를 타고 간 실학박물관도 ‘저녁 바람 부드럽게‘도 모두 좋았다.

이은규 시인의 ‘다정한 호칭‘에 나오는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의 첫 줄을 기억하며 순례하듯 박물관을 돌았다.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박용래 시인이 ‘저녁눈‘이란 시에서 눈발이 붐빈다는 말을 했지만 이은규 시인은 사람이 아니라 떠나옴과 떠남이 붐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박물관은 호학(好學)의 열정이 붐비는 곳이 아닐지?

이은규 시인은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이 거기 있었다, 피었다˝고 했다.

우리가 본 실학박물관 주변의 꽃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나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으니 ‘우리가‘라 하기보다 ‘내가‘라고 해야 하겠다.

‘다정한 호칭‘에서 인상적인 단어는 절기란 말이다. 이 단어만으로 새로울 것은 없지만 ˝절기 전에 꽃을 잃는 기억˝이란 말과 ˝절기와 헤어진 꽃과 꽃잎들˝이란 말에 이르면 절기란 단어의 의미는 깊어 보인다.

꽃이 귀함을 알게 하는 절기라는 말... 절기 전에 잃은 꽃을 슬퍼하고 절기에 맞춰 아름다운 꽃들을 즐겨야 하겠지?(즐기기 전에 오늘 면접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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