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종묘(宗廟)에 갔을 때 해설사로부터 종묘 배향(配享) 이야기를 듣고 종묘 배향과 문묘(文廟) 배향의 차이를 물었다.
답을 듣지 못했는데 어제 비로소 그 차이를 알았다. 종묘 배향은 공적(功績)이 있는 신하를 왕과 함께 모시는 것이고 문묘 배향은 학덕이 있는 신하를 공자(孔子)와 함께 모시는 것이다.
정도전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경복궁 vs 창덕궁‘ 이야기에 이어) 정도전은 문묘에 배향(또는 종사從祀)되지 못했고 정몽주는 배향(또는 종사)되었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반대한 인물이고 정도전은 조선의 틀을 세운 인물이 아닌가. 종묘나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임금도 찾아와 고개 숙이는 곳은 두 곳 뿐이기 때문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이란 용어가 있다. 남명 조식(曹植)의 제자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공격한 사건이다.
정인홍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핬는데 그것은 회재(晦齋)와 퇴계(退溪)가 이미 문묘에 배향된 후였기 때문이다. 회퇴변척 사건은 신하와 신하 사이의 권력 다툼이다.
임금과 귀족들의 다툼도 있다. 불천위(不遷位)와 관련된 사안이다. “제사에는 집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기능이 있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136 페이지)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세력권은 확대하고 귀족의 그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조선 왕실이 4대가 지나면 혼백(魂魄)이 흩어진다는 믿음과 달리 건국 시조까지 종묘에 모신 것 역시 세력권 확대를 위한 조치였다.
성리학적 근거와 무관한 것이다. 모든 것은 정치와 연관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중국 주(周)나라의 좌묘우사(左廟右社)나 은(殷)나라의 좌묘우궁(左廟右宮)도 정치적 선택이었다.(주나라의 좌묘우사는 정도전에 의해 수용된다.)
정치가 바로 서야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