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답사 시간에 호위청의 호위가 호위(扈衛)라는 사실을 알았다. 호위(護衛)로 알고 있었는데.. 호위(扈衛)는 궁궐을 지키어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호(扈)는 사람의 성으로도 쓰인다. 호영송이라는 시인이 생각난다. 그래서 더욱 호위(扈衛)라는 말이 뜻 밖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최근 옥새(玉璽)라고 해야 할 것을 옥쇄(玉碎)라고 쓴 책을 읽었다. 옥새는 임금의 도장이고 옥쇄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의미로 대의나 충절을 위한 깨끗한 죽음을 뜻한다.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언어가 크게 중요할까 싶기도 한데 이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야기의 덩어리를 문제삼(듣)지 구체적인 단어 하나 하나를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옥새를 옥쇄라 한 책은 전체적으로 뛰어난 내용을 구성으로 한다. 문장들이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최근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올해도 진행합니다.˝라고 쓴 사이트에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올해도 진행됩니다˝라고 하든지 ˝서울미래유산이 올해도 역사탐방을 진행합니다.˝라고 하든지 해야 바른 문장이 된다는 댓글을 달았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 반응도 표출되지 않았다. 역사나 문화 등의 글쓰기는 비문(非文;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문화해설을 하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 스타일은 기본적인 사실들을 언급하며 편안한 해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이상의 사실들을 엮어 깊이 있는 해설을 하려 하거나 임팩트 있는 사실을 전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문화해설은 역사 강의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고 쉽게 해설하라는 말도 들었다. 공감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감사한 일이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기본 지식에 문제가 있으니 어려운 것들에 의존하는 것일 수 있다. 기초 과정에서 (경복궁 두 시간, 해설 시연 무) 궁이 아닌 주먹 도끼, 농경문 청동기, 금동대향로, 명도전 등을 배웠기에 4대궁을 기본적으로 다 배우고 두 번씩 해설 시연을 치른 다른 기초 과정 동기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올 1월 전문해설사 과정 시연을 치르고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은 그 짧은 시간의 준비를 위해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렇기에 단순히 외우는 것과는 다르게 많은 부분이 구체적으로 입력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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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7-06-08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댓글을 썼는데 흔적없이 날아갔네요^^
최근 훌륭한 문화해설사님을 만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벤투님도 그런 분이실 것 같아 내심 뿌듯하네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6-08 09:28   좋아요 1 | URL
아고.. 저는 훌륭한 해설사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좋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언젠가 우리의 한 아카데믹한 연구자가 철학 이론으로 가수 김광석의 노래를 분석한 책을 냈었다.

어제, 오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맴돌았지만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김광석 분석서에 대해 저자 이름은 물론 제목마저 기억하지 못하지만 김광석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분석한 위에 일반론을 도출한 뒤 다시 구체적 개인의 실존적 정황을 언급했으리라 보인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란 가사가 나온다.

무엇과 이별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구체적으로 알려하지 않는 것은 나도 매일 이별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별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책이다. 시간 때문에, 그리고 체력은 물론 지력 때문에라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신간들‘의 일부만을 읽을 수 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책들과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약할 수 없는 어느 시점에선가 만날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문제의식면에서나 정서적으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별하는 책들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한 팽창하는 우주처럼 우리의 책들은 우주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 쉼 없이 생겨날 것이다.

이 정도이면 이별의 아쉬움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공포감을 느낄 법하다. 이별을 아쉬워하기보다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가 보다.

자신의 출신학교는 책이라고 말한 한 선인의 말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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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가 이런 말을 했다. ˝아마추어 향토사가 중에도 역사에 대한 현자가 있는가 하면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 중에도 둔감한 지식의 소매상들도 있는 법이다˝(‘문화사의 과제‘ 21 페이지)

많은 해설을 듣지는 못했지만 실력 있고 인품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밖에서는 잘 몰랐는데 문화유산의 세계에 들어와 보니 공부할 것이 참 많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된다.
명법 스님의 ‘미술관에 간 붓다‘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도덕의 요체는 자비심이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기 것이 아닌 사상과 행위, 인격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타인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자신의 것으로 공감하지 않는다면 도덕은 앙상한 의무 사항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92 페이지)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역사의 유물들과 당대의 사람들을 이해하며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쉽고 친절한 해설을 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나눔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부지런히 밭 갈고 씨뿌려 풍성한, 그리고 나만의 결실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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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퇴변척(晦退辨斥)이란 광해군 3년(1611년)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이 퇴계(退溪) 이황(1501 - 1570)으로부터 무함받은 스승 남명 조식(曹植; 1501 - 1572)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箚; 찌를 차)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내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까지 공격한 사건이다.

정인홍은 스승 남명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지 못한 것은 이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식은 이황을 격식에 매인 학자로, 이황은 산림에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식을 세상을 경멸하는 오만한 선비로 보았다.

본인은 청금록(靑衿錄; 조선 시대 성균관, 서원, 향교 등에 있던 유생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스승의 명성에까지 누를 끼치는 등 정인홍의 변척은 역풍이 되었다. 남명(南明)은 칼을 찬 유학자이다. 남명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잊혀졌다.

남명은 내부 기강은 물론 외적의 침입 또한 칼로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한형조 지음 ‘조선 유학의 거장들‘ 145 페이지)

한형조는 남명의 가장 큰 유산을 상무(尙武; 무예를 중히 여기고 숭상함)적 기질과 법가적 전망에 있다고 본다.(같은 책 150 페이지)

남명과 이성계를 비교해보자. 이성계는 문덕(文德; 학문의 덕, 문인이 갖춘 위엄과 덕망)을 열망한 무사였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성계는 전쟁터에서도 즐겨 책을 읽었었다. 그가 그렇게 탐독했던 책은 ‘대학연의‘란 책으로 제왕을 꿈꾸는 자의 필독서이다.

송나라의 진덕수가 4서의 하나인 ‘대학(大學)‘의 뜻과 이치를 해설한 책으로 제왕의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역설한 책이다.

이성계는 육생(陸生)이 한(漢) 고조 유방(劉邦)에게 건넨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충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마상득천하(馬上得天下)라는 말이 있다. 말을 타고 전쟁을 해 천하를 얻었다는 뜻이다. 이성계가 고려에 대한 충성을 선택한 정몽주와 화해를 시도하고 정도전의 새로운 문명 설계도를 받아들인 것은 이 때문이다.(최연식 지음 ‘조선의 지식계보학‘ 55, 56 페이지)

지난 토요일(6월 3일) 종묘(宗廟) 해설 시간에 공신당 순서에서 종묘에도 배향(配享)되고 문묘에도 배향되었다는 여섯 이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황, 이이, 김집, 박세채, 송시열 등은 찾았지만 이언적은 그러지 못했다.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호 회암(晦庵)을 따라 호를 회재(晦齋)라 지은 사람. 그 사대(事大)가 싫어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나 싫어하는 우암(尤庵) 송시열은 보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도망만 다닌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명(明)나라의 원병(援兵)을 요청해 나라를 살렸음을 강변하느라 불가피하게 사대를 한 선조(宣祖), 정변을 통해 왕이 되어 명의 황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중종(中宗)과 인조(仁祖) 등으로 인해 사대는 고착되었다.

그런 한편 조선 사대부가 충성을 바친 최종 대상이 조선의 임금이 아닌 명의 천자(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298 페이지)였던 점은 임금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일 것이다.

최연식은 대표적 지식인의 국가 공인(문묘 배향)은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 말한다.(같은 책 7 페이지)

남명이 싫어한 것은 이런 류의 타협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국가 사당에 공민왕이 모셔져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조선 개국에 저항한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배향된 것도 타협의 산물일 것이다.

공자는 중간색인 자색(紫色)이 순수한 색인 붉은 색을 빼앗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다. 나는 물론 이를 액면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더 더욱.

송의 사대부를 본받는다고 했지만 송나라가 취한 그나마 바람직한 노비제도는 전혀 따르지 않은 조선 사대부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236 페이지)을 보면 그들의 관심이 자기들의 이익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든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인 이익 추구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는 철학자들이 고민한 문제이다.
이런 점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점이 됨은 물론이다.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여기서 확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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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 미술관 서울관(종로구 삼청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5월 24일 – 10월 9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이상(以上)의 다양한 인접 개념들을 포괄한 어려운(?) 전시이리라 예상된다.(네이버 블로그 유지원님은 울렁거린다는 감상평을 남기기까지 했다.)

한국과 외국 작가가 함께 참여한 ‘불확정성의 원리’란 모호함, 애매, 규정불능, 회의(懷疑), 변화 등의 개념을 지시하는 말일 터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나로 하여금 현대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해준 원리이다.

어김 없이 플라톤의 책 ‘티마이오스’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아페이론 또는 코라라고 하는 ‘물질 – 공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정우 교수는 “끝없이 나 있는 길(= 아페이론: 무한)‘에 ’서울에서 대전까지‘라는 양끝(peras, limit)이 주어져야 규정(規定)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려준다.(’주름, 갈래, 울림‘ 21 페이지)

마름질(옷감이나 재목 따위를 치수에 맞게 재거나 자르는 일)이란 말을 생각할 수 있겠다.

비유적으로 느슨하게 쓰는 바이지만 나는 마름질이란 단어를 보며 여행(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생각한다.

해외 여행을 간다고 말하면 우리나라도 다 둘러보지 않았는데 무슨 해외 여행이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해외 여행은 국내 여행을 모두 마친 후라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부도 어느 시점에선가 마름질을 해야 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시점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을 말하면 된다.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관계처럼.

보살행 등으로 중생들을 제도(濟度)한 뒤 (실존적)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영원히 없(오지 않)을 것이다.

소립자의 속도와 위치를 모두 정확히 알 수 없음을 뜻하는 불확정성 원리를 생각하며 나는 깊이와 넓이는 함께 갖추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 구실을 붙여 서울에 가게 될 것인데 어느 전시회를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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