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퇴변척(晦退辨斥)이란 광해군 3년(1611년)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이 퇴계(退溪) 이황(1501 - 1570)으로부터 무함받은 스승 남명 조식(曹植; 1501 - 1572)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箚; 찌를 차)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내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까지 공격한 사건이다.
정인홍은 스승 남명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지 못한 것은 이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식은 이황을 격식에 매인 학자로, 이황은 산림에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식을 세상을 경멸하는 오만한 선비로 보았다.
본인은 청금록(靑衿錄; 조선 시대 성균관, 서원, 향교 등에 있던 유생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스승의 명성에까지 누를 끼치는 등 정인홍의 변척은 역풍이 되었다. 남명(南明)은 칼을 찬 유학자이다. 남명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잊혀졌다.
남명은 내부 기강은 물론 외적의 침입 또한 칼로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한형조 지음 ‘조선 유학의 거장들‘ 145 페이지)
한형조는 남명의 가장 큰 유산을 상무(尙武; 무예를 중히 여기고 숭상함)적 기질과 법가적 전망에 있다고 본다.(같은 책 150 페이지)
남명과 이성계를 비교해보자. 이성계는 문덕(文德; 학문의 덕, 문인이 갖춘 위엄과 덕망)을 열망한 무사였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성계는 전쟁터에서도 즐겨 책을 읽었었다. 그가 그렇게 탐독했던 책은 ‘대학연의‘란 책으로 제왕을 꿈꾸는 자의 필독서이다.
송나라의 진덕수가 4서의 하나인 ‘대학(大學)‘의 뜻과 이치를 해설한 책으로 제왕의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역설한 책이다.
이성계는 육생(陸生)이 한(漢) 고조 유방(劉邦)에게 건넨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충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마상득천하(馬上得天下)라는 말이 있다. 말을 타고 전쟁을 해 천하를 얻었다는 뜻이다. 이성계가 고려에 대한 충성을 선택한 정몽주와 화해를 시도하고 정도전의 새로운 문명 설계도를 받아들인 것은 이 때문이다.(최연식 지음 ‘조선의 지식계보학‘ 55, 56 페이지)
지난 토요일(6월 3일) 종묘(宗廟) 해설 시간에 공신당 순서에서 종묘에도 배향(配享)되고 문묘에도 배향되었다는 여섯 이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황, 이이, 김집, 박세채, 송시열 등은 찾았지만 이언적은 그러지 못했다.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호 회암(晦庵)을 따라 호를 회재(晦齋)라 지은 사람. 그 사대(事大)가 싫어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나 싫어하는 우암(尤庵) 송시열은 보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도망만 다닌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명(明)나라의 원병(援兵)을 요청해 나라를 살렸음을 강변하느라 불가피하게 사대를 한 선조(宣祖), 정변을 통해 왕이 되어 명의 황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중종(中宗)과 인조(仁祖) 등으로 인해 사대는 고착되었다.
그런 한편 조선 사대부가 충성을 바친 최종 대상이 조선의 임금이 아닌 명의 천자(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298 페이지)였던 점은 임금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일 것이다.
최연식은 대표적 지식인의 국가 공인(문묘 배향)은 임금과 지식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 말한다.(같은 책 7 페이지)
남명이 싫어한 것은 이런 류의 타협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국가 사당에 공민왕이 모셔져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조선 개국에 저항한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배향된 것도 타협의 산물일 것이다.
공자는 중간색인 자색(紫色)이 순수한 색인 붉은 색을 빼앗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다. 나는 물론 이를 액면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더 더욱.
송의 사대부를 본받는다고 했지만 송나라가 취한 그나마 바람직한 노비제도는 전혀 따르지 않은 조선 사대부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236 페이지)을 보면 그들의 관심이 자기들의 이익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든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인 이익 추구를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는 철학자들이 고민한 문제이다.
이런 점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점이 됨은 물론이다.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여기서 확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