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역사서 사기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2
김영수 지음 / 창해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 인물 중심 역사 서술) 역사서의 효시(嚆矢)이다. 반면 공자가 집필한 '춘추'는 편년체 역사서의 효시이다. 대의명분에 따라 객관적 사실에 의거해 엄정하게 기록하는 태도나 집필 방법을 춘추필법이라 한다. 사마천은 한 무제 시대의 역사가이다.

 

저자는 시대라는 객관적 조건과 사마천이라는 주관적 조건이 간절하고 절묘하게 조우함으로써 사기가 탄생했다고 말한다.(30 페이지) 사기는 본기(本紀), (), (),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전체의 기전(紀傳)이란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이은 단어이다. 이 다섯 체계는 하나 하나가 전체와 연결되며 전체는 하나 하나와 연결(유기적)된다. 유기적이라 함은 항우는 본기에 편입하고 천한 신분의 진승은 세가(世家)에 편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기는 기전체의 역사 서술에서 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한 부분이다. 세가는 제후명족에 대한 기록이다. 열전은 역사에서 임금을 제외한 사람들의 전기를 차례로 적어서 벌여 놓은 기전체 기록이다.

 

사기의 원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이다. 사기의 어려움은 문자의 이면을 깊게 파고들어가야 한다는 데 있다. ‘사기는 창조와 비판정신으로 빛난다. ()는 천문, 지리, 사회, 경제 생활 등을 포함한 제도에 대한 상세 기록이다.

 

사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사기를 백과사전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예서(禮書: 예의), 악서(樂書: 음악), 율서(律書: 군사), 역서(曆書: 역법), 천관서(天官書: 천문), 봉선서(封禪書: 종교), 하거서(河渠書: 물길), 평준서(平準書: 경제) 등의 8서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오늘날의 국가 운영 시스템에 비유할 수 있다.

 

사기 전체의 백미는 평준서이다. 상업과 상인을 극도로 억압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자유경제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경제가 인간의 생활은 물론 심리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주() 왕실에서 벼슬을 한 적이 없는 공자와, 빈천한 출신으로 농민봉기를 이끈 진섭을 제왕을 보필한 제후들에 대해 기록한 세가에 편입시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마천은 문화사적 업적에 주목한 최초의 역사학자, 진섭의 봉기와 진의 멸망을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무찌른 것과 연결시킨 역사학자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마천은 본기라는 12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세가라는 30개의 대들보를 올렸다. 그 대들보들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표()를 만들었다. 열전은 지붕에 비유될 수 있다. ()를 통해 집의 역할을 나누었다.(102 페이지) 사마천은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발견했다.

 

그리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기록으로 남겼다.(116 페이지) 열전은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한 인간의 역할을 추적하되 그 역할이 시대적 요구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주동적이고 주체적이었느냐에 초점을 맞춘 대하 역사드라마이다.(127 페이지)

 

사기를 역사적 문학서, 문학적 역사서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열전 때문이다. 사마천의 철학 사상은 사마천 당대를 지배하던 유가사상과 대립한다.(148 페이지) 사마천은 당대의 주류 철학사상에 회의를 품고 사기곳곳에서 천명관(天命觀)을 비판했다.

 

사마천의 철학 사상은 체제 옹호적인 주류 유가사상에 반대하면서 미신적인 천명과 천도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의 주체적 의식과 활동을 긍정하는 인식 위에서 전개되었다. 사마천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은 당위성에 기반한 동기를 부여했고 사마천의 개인적 시련은 사기의 방향성을 바꾸도록 사마천을 압박했다.(152 페이지)

 

저자는 사관 가문의 가업을 잇는 것은 물론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고 나아가 자신의 주체적인 사관을 세우는 것이 사기저술의 진정한 목적이라 말한다.(157 페이지) , 한 교체기를 지나 안정기에 업어든 상황에서 무제(武帝)의 유가(儒家) 독존(獨尊)으로 인한 사상과 사상계의 경색화는 사마천으로 하여금 역사를 인식하고 그것을 어떤 철학체계로 정립할 것인가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158 페이지)

 

사기춘추의 후임을 자처했다.(159 페이지) 하지만 춘추의 보수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등 단선적 계승을 하지는 않았다.(162 페이지) 사마천의 공양학(公羊)은 동중서 등의 보수적 공양학과 대비된다.

 

사마천은 역사를 인간의 사회활동이라 여겼지 신이 창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166 페이지) '사기'의 철학사상은 현상에 대한 의문과 비판에서 출발해 인간의 작용에 대한 완전한 긍정으로 마무리된다.(168 페이지)

 

사기는 통(: 관통, 통관, 통달)을 토대로 변(: 변화, 변혁)을 강구한 책이다. 변화에서 역사 발전의 이치와 규율을 탐구하고 이를 행위의 거울로 삼고자 했다.(171 페이지) ‘사기는 역사 변화의 결과를 교훈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조했다. 역사 경험의 교훈을 미래의 발전을 위한 영양분으로 섭취하라는 것이다.(175 페이지)

 

사기는 사물의 이치라는 각도에서 사회현상을 설명한다. 사물의 이치란 결국 인간의 예견적 행위를 전제로 하며 그 예견적 행위는 역사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심장한 사상을 내포한다.(178 페이지) 사마천은 잠재된 무형의 역량 즉 흐름을 세()라고 표현했다. 이 세는 역사 발전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종합한 산물이다.(181 페이지)

 

사기에 나오는 천()이란 말은 객관적 역량 즉 대세를 의미한다.(182 페이지) ‘사기의 정치사상은 대일통(大一統)이다. 중국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4()의 포용으로까지 확대되었기에 중화주의의 위험성이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사마천이 강조한 것은 평화공존이었다.(188 페이지)

 

사마천은 억압받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인재들을 동정한 동시에 인재의 등용 여부가 한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인식한 최초의 역사가였다.(189 페이지) ‘사기는 시대의 한계를 돌파한 사람들이 대세를 주도했고 역사를 창조한 사례를 무수히 보여준다.

 

사마천은 인간과 사물의 이면(裏面)에 눈을 돌렸다. 통치집단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의 붓끝을 겨누었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서의 민중을 인식했다.(193, 194 페이지) 사마천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천하대세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개혁에 주목했다.(200 페이지)

 

사마천은 폭정에 항거하고 그것을 뒤엎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역성혁명을 긍정함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했다.(202 페이지) 사마천은 인재 등용에서 바른 소리 즉 직간하는 인물들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행적을 칭찬했다.(218 페이지)

 

'사기'의 인재관은 색깔이 매우 분명하다. 인재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기본 원칙에 입각해 제대로 된 인재를 등용하는 군주의 포용력과 개방성을 강조한다.(222 페이지)

 

사마천은 전쟁의 전략과 전술 등 군사학 내지 군사 이론을 정립했는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군사사상을 강조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마천은 장수가 군대에 있으면 군주의 명령이라도 듣지 않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했다.(224 페이지)

 

사마천은 명분이 있는 불가피한 전쟁 즉 백성들을 위한 전쟁은 인정하고 부당한 전쟁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했다. 강자가 무조건 약자를 집어삼키는 겸병 전쟁이나 분열을 일으키는 전쟁은 반대하되 통일 전쟁은 인정했다.(225 페이지)

 

전쟁 관련 기록이 '사기' 전체의 1/4을 차지한다. '사기'는 불가피한 전쟁을 인정했다. 인류의 보편적 시각에서 위기를 구하는 수단으로써의 전쟁을 인정한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유가의 위선적인 전쟁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229 페이지)

 

사마천은 '사기'에 경제 관련 기록 두 편을 안배했다. 국가의 경제정책과 전문 경제론을 담은 '평준서'와 치부론과 역대 부자들의 치부론을 기록한 '화식열전(貨殖列傳)'이다. 사마천은 누구든지 자신의 지혜를 활용해 제왕 못지 않은 부를 누리라고 말했다.(240 페이지)

 

농공상업과 유통의 고른 발전을 주장햐 기본적 경제론이나 상품 유통의 발전론은 자연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봉건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획기적 발상이었다.

 

개인적 경험과 직관에 의존한 사마천의 천재적이고 기적적인 경제사상은 계승되지 못했고 과학적으로 체계화되거나 객관화되지도 못했다.(243 페이지)

 

사마천은 변수로서의 인간과 무한한 탄성을 가진 생명체, 그리고 끝없는 욕망의 진원지로서의 인간을 직관했고 온 육신과 정신으로 직접 경험했다.(244 페이지)

 

사마천은 인간의 본능을 허망한 논리로 교화시키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250 페이지) 사마천은 공자의 명성조차 제자 자공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말한다.(252 페이지) 파격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은 돈 50만 전이 없어 궁형을 자청하는 수모를 겪은 인물이다.(253 페이지) '사기'의 경제관은 종래의 경제사상에 대한 종합이자 낡은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다.(283 페이지)

 

'사기'가 보여주는 인간군상은 말 그대로 파노라마이자 한 편의 대하 인간극장이다. 특히 소외된 하층민에 대한 애정이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286 페이지) 사마천은 한 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의 치적을 본기에 편입함으로써 진보적 여성관을 드러냈다.(289 페이지)

 

사마천은 태사공왈이라는 사론(史論) 형식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이 부분을 통해 인물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충하거나 사실의 와전을 바로잡거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303 페이지)

 

사마천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발전적 관점에서 국가의 성패흥망의 이치를 고찰했다.(312 페이지) 사마천의 학술사상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변화를 중시했다. 과거와 현재의 변화 속애서 역사를 움직이는 법칙을 찾아 미래를 위한 거울로 삼으려 했다.(313 페이지)

 

책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말이 나온다. 설서인(說書人)이다.(315 페이지) 중국에서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사람을 말한다. 전기수(傳奇叟)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던 전문 직업인들을 말한다. 저자는 사기는 상처 자체가 아니라 그 상처를 극복하고 돋아난 새 살이라 말한다,(315, 316 페이지) ’사기는 기본적으로 문학서가 아니라 역사서이다.(316 페이지)

 

사마천은 한 인물의 전기를 쓸 때 평범한 개괄적인 서술은 최대한 피했다. 대신 중요한 사건을 움켜쥐고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그 인물을 추적함으로써 이미지를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318 페이지) 사마천은 해당 인물의 신분에 맞는 구어체를 활용해 이미지와 성격을 드러냈다.(321 페이지)

 

저자는 역사서에 구어체가 등장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냐고 묻는다.(323 페이지) 저자는 사기(史記)’에 나오는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이란 글을 언급한다.(325 페이지) 복숭아 나무와 배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 저절로 길이 난다는 뜻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따름을 비유한다.

 

사기는 세상에 출현한 이후 시대와 왕조를 불문하고 통치계급부터 최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학문적으로는 역사 뿐만 아니라 문학과 철학, 사상에도 뜨겁고 신선한 피를 수혈했다.(332 페이지)

 

사기(史記)’는 사마천 사후 약 50년 무렵 외손자 양운의 노력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저자는 반고(班固)한서는 어용 역사서라 말한다. 통치자와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사마천과 사기를 본 것이다.

 

남송(南宋)의 정초(鄭樵)는 제자백가의 저서들은 공허한 말이 많아 역대로 실질적 자취를 남겼다고 기록할 만한 것이 없지만 사마천 부자는 대대로 전적을 관장하며 사서 저술에 공을 들여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진한에 이르는 역사책을 제대로 완성했다는 말을 했다.(348, 349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묘(宗廟) 해설 시간에 희생(犧牲)이란 단어를 이야기한 것은 종묘가 제례 공간이기에 그렇다. 희생이란 종묘 제사에 바치는 살아 있는 소를 말한다. 임금이 성생위(省牲位)에서 직접 그 제물들을 점검했다. 기를 때는 축(畜)이라 하고 제사할 때는 생(牲)이라 한다.

소 우(牛)자가 들어 있는 생이란 단어도 그렇지만 양(羊)자가 들어 있는 의(義), 미(美) 등의 단어들도 관심거리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해설서(김영수 지음 ‘절대 역사서 사기’)를 읽다가 ‘평준서’를 만났다.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으로 이루어진 사기 전체의 백미는 경제에 관한 내용을 담은 평준서(平準書)이다.

상업과 상인을 극도로 억압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자유경제론을 제시하는 한편 경제가 인간의 생활은 물론 심리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왜 평준이란 말을 썼을까, 이다. 평화(平和)를 파자(破字)하기를 벼(화禾) 즉 식량이 입(구口)에 고르게(평平) 들어가는 것이라 말하지만 사마천은 경제는 평준(平準)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답은 농업과 상공업의 고른 발전을 강조하기 위해서란 것이다.(조선의 농업 위주의 정책과 대비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역류성 식도염도 몸의 복잡미묘한 생리를 반영하는 질환인 듯 하다.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에게 빈발한다는 이 질환에 대해 내가 오해를 했었다.

위산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데 역류성 식도염이란 산이 부족한 상태로 일을 하던 위장이 힘에 겨워 내는 신음이라 할 수 있다.

통제력을 잃었기에 부족하나마 가지고 있던 산이 역류하는 것이다. 생각을 줄이는 것도 좋지만 생각을 줄이기 이전에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꼭꼭 씹어먹는 것 등만으로도 충분한 반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은 줄이려 하기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지 않거나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거나 하는 식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 경우 커피가 문제인데 별 맛도 느끼지 못하면서 동기들과 어울릴 때 함께 마시게 됨을 반성한다.

내 동기 중 내가 존경하는 여자 분이 있다. 다섯 살 연하의 이 동기에게 나는 존경한다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한다.(물론 너무 자주는 아니게.) 지식이 많고(서울대 역사교육과 출신) 똑똑한 데다가 수영, 사이클 등의 운동에도 열심인 이 분은 나에게 늘 단순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생각이 너무 많고 말이 너무 많고 쓰는 글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이런 말에 조금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숱한 지적 섭렵 끝에 범위와 양을 줄여 책을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현명한 동기로부터 듣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과 삶을 대하는 방법에서부터 운동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 동기에게서 배울 것은 많다.

이 분도 내가 ˝스승˝이라고 말하는 대신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 것이다. 생각의 현명한 줄임, 이것이 내 화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창덕궁 답사 시간에 호위청의 호위가 호위(扈衛)라는 사실을 알았다. 호위(護衛)로 알고 있었는데.. 호위(扈衛)는 궁궐을 지키어 보호한다는 의미이다.

호(扈)는 사람의 성으로도 쓰인다. 호영송이라는 시인이 생각난다. 그래서 더욱 호위(扈衛)라는 말이 뜻 밖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최근 옥새(玉璽)라고 해야 할 것을 옥쇄(玉碎)라고 쓴 책을 읽었다. 옥새는 임금의 도장이고 옥쇄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의미로 대의나 충절을 위한 깨끗한 죽음을 뜻한다.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언어가 크게 중요할까 싶기도 한데 이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야기의 덩어리를 문제삼(듣)지 구체적인 단어 하나 하나를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옥새를 옥쇄라 한 책은 전체적으로 뛰어난 내용을 구성으로 한다. 문장들이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최근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올해도 진행합니다.˝라고 쓴 사이트에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올해도 진행됩니다˝라고 하든지 ˝서울미래유산이 올해도 역사탐방을 진행합니다.˝라고 하든지 해야 바른 문장이 된다는 댓글을 달았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 반응도 표출되지 않았다. 역사나 문화 등의 글쓰기는 비문(非文;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문화해설을 하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 스타일은 기본적인 사실들을 언급하며 편안한 해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이상의 사실들을 엮어 깊이 있는 해설을 하려 하거나 임팩트 있는 사실을 전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문화해설은 역사 강의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고 쉽게 해설하라는 말도 들었다. 공감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감사한 일이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기본 지식에 문제가 있으니 어려운 것들에 의존하는 것일 수 있다. 기초 과정에서 (경복궁 두 시간, 해설 시연 무) 궁이 아닌 주먹 도끼, 농경문 청동기, 금동대향로, 명도전 등을 배웠기에 4대궁을 기본적으로 다 배우고 두 번씩 해설 시연을 치른 다른 기초 과정 동기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올 1월 전문해설사 과정 시연을 치르고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은 그 짧은 시간의 준비를 위해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렇기에 단순히 외우는 것과는 다르게 많은 부분이 구체적으로 입력된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17-06-08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댓글을 썼는데 흔적없이 날아갔네요^^
최근 훌륭한 문화해설사님을 만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벤투님도 그런 분이실 것 같아 내심 뿌듯하네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6-08 09:28   좋아요 1 | URL
아고.. 저는 훌륭한 해설사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좋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언젠가 우리의 한 아카데믹한 연구자가 철학 이론으로 가수 김광석의 노래를 분석한 책을 냈었다.

어제, 오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맴돌았지만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김광석 분석서에 대해 저자 이름은 물론 제목마저 기억하지 못하지만 김광석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분석한 위에 일반론을 도출한 뒤 다시 구체적 개인의 실존적 정황을 언급했으리라 보인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란 가사가 나온다.

무엇과 이별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구체적으로 알려하지 않는 것은 나도 매일 이별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별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책이다. 시간 때문에, 그리고 체력은 물론 지력 때문에라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신간들‘의 일부만을 읽을 수 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책들과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약할 수 없는 어느 시점에선가 만날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문제의식면에서나 정서적으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별하는 책들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한 팽창하는 우주처럼 우리의 책들은 우주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 쉼 없이 생겨날 것이다.

이 정도이면 이별의 아쉬움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공포감을 느낄 법하다. 이별을 아쉬워하기보다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가 보다.

자신의 출신학교는 책이라고 말한 한 선인의 말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