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언’이란 평론집에서 저자 강계숙 평론가는 미언을 수수께끼에 가까운 말(謎言), 미혹하게 하고 매혹시키기도 하는 말(迷言), 미래의 어느 때엔가 완성될 말(未言), 작고도 아름다운 말(微言, 美言) 등으로 풀었다.

안성재 교수의 ‘노자, 정치를 깨우다’란 책에 미언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미언대의(微言大儀) 즉 짧은 말 속에 심오한 의미를 가진 말의 줄임말이다.

강계숙 평론가가 노자의 이 미언대의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전개가 微言 하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이 중요하다.

요즘 페이스북의 정치 만화(萬花/ 滿花)를 보며 안성재 교수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도덕경’은 정치 텍스트로서 이례적으로 짧은 축약형의 문장을 가진 텍스트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를 싫어하는 사람도 정치를 통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도덕경’이 정치 텍스트라는 말은 고무적이다.

단 ‘도덕경’의 정치는 대동(大同)의 덕(德)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도덕경’의 정치적 독해는 해명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

요즘 한창 벌어지는 반민주세력의 정치적 패악을 보면 기본적으로 잘못된 정치의식과 왜곡된 계급 의식 탓이지만 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래 저래 정치 이야기가 페이스북의 대종(大宗)을 이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 정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주로 하는 분들이 있어 그나마 다양성이 유지됨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다.

내게는 모든 분들이 배울 분들이다. 물론 타산지석의 사례들도 있다. 좋아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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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찌어찌 해서 역사책 읽기에 흥미를 붙이고 있다. 그 역사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이 천명(天命), 정당화, 이데올로기적 선전 등에 관한 내용이다.

강대국인 은(殷)나라를 상대해야 했던 주(周)의 문왕이 은의 주(紂)왕의 군대를 무찌른 후 은나라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이 주(紂)왕을 친 것은 당신네 조상들의 천명을 받아서였다고 주장한 것은 은나라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이 과정에서 좌묘우사가 나왔다.(장인용 지음 ‘주나라와 조선’)

그런가 하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천명(天命) 사상을 만들어 새 국가 건설의 명분을 퍼뜨리려던 중 고구려 성좌도 탁본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이를 돌에 새길 것을 명해 만들어진 석각(石刻) 천문도라는 내용(박석재 지음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도 같은 차원의 글이다.

천명을 내세운 것이기보다 정당화라 하는 편이 맞지만 죽은 지 125년이나 지난 정몽주(끝까지 조선 건국에 반대한)를 조선의 문묘(文廟)에 모신 것은 그의 학문을 고려(考慮)해서가 아니라 고려(高麗)에 대한 정치적 신념(충성)을 시대정신으로 활용하기 위한 반정(중종 반정) 세력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최연식 지음 ‘조선의 지식 계보학’)도 그렇다.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박정희가 고고학 발굴을 민족주체성 회복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선전에 마음껏 활용했다는 분석(김태식 지음 ‘직설 무령왕릉’)도 그렇다.

한 신문에 외부 필진(대학 교수)이 쓴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 관련 글이 실렸다. 필자는 정권이 역사를 장악하려 할 때 왜곡되지 않은 적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 필자는 참여정부, 그리고 그 직후인 2008 ~ 2009년에는 개혁군주로서 정조가 주목을 받았고 정권이 바뀐 후에는 실패한 혁신가로서 광해군의 생애와 그의 비참한 최후가 거론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든 정조 부각 사례(참여정부에서 지시한 것인지 방송에서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지만) 외의 다른 사례는 모두 부도덕하거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정권이 저지른 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1968년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전통과 위인 만들기에 골몰하고 충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한편 국민국가로의 통합을 꾀한 박정희,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집권한 이방원의 역사를 통해 정권의 정당화가 가능하다고 믿은 신군부 등...

가야사 복원을 통해 영호남의 화합을 이루라는 대통령의 주문은 정권이 역사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결코 아니다.

혹시 그 필자는 교과서를 국정으로 만들려는 것을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이 필자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강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를 지시한 것은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겠다는 것과 차원이 다르고 더욱 지금 정권은 집권 과정이나 정체성 등에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정권이다.

논의에서 벗어난 감이 있고 적절한지 더 논의해야 하지만 ‘교수신문’에 실린 철학자의 글에서 이런 부분이 눈에 띈다.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어떤 연구를 수행할지 오직 고대사 연구자 자신들만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문가의 오만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어느 정도 한국 고대사에 대한 전문성이 요구된다고 고집할 수 있겠지만 문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그 정도의 전문성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앞에서 거론한 부분이지만 정조에 대해 최근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조의 왕권 강화 정책이 (오히려) 세도정치를 초래했다는 것이다.(‘정조와 정조 이후’ 수록 오수창 글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 대화’)

노무현 정권이 사라진 것에 맞추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면밀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고 역사는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정치의 주요 파트너이기 때문이다.(공부의 부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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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4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종환 의원의 입각에 앞서 앞으로 문화부
장관이 될 인물에 대한 역사 검증 논란으로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사학계의 기득권층은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야사로 일축하고 있죠. 특히나 고대
사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무엇 하나 뚜렷한
증빙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정설을 정하기
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만의 역사가 아닌 일반인들도 가
까이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역사 서술을 합
의하는 그런 건설적인 방향으로 논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6-14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상식과 합리에 바탕한 역사관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사관도 극복하고 역사 교육의 이상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써주신 글에 동의합니다..
 

독일 고전/ 낭만 음악의 엄격과 무게감에서 자유롭고 싶은 때가 있다. 이럴 때 사티, 포레, 라벨, 드뷔스 등의 프랑스 근대 음악들을 듣는다. 올리비에 메시앙, 클로드 볼링, 피에르 불레즈 등의 현대 프랑스 곡들을 듣곤 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미국의 작곡가 애런 코플런드(1900 – 1990)는 ˝진정한 음악 애호가는 옛날 것이건 요즘 것이건 가리지 않고 예술의 모든 형태에 친숙해지고자 하는 압도적인 열망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말을 한다.(‘음악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가‘ 41 페이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3B로 대표되는 시대의 음악을 닳고 닳은 음악이라 칭하는 코플런드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사티, 포레, 라벨, 드뷔스 가운데 내가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작곡가는 포레이다. 나는 그의 곡들이 대체로 맑고 곱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 그의 ‘녹턴’을 선물하며 맑은 차를 마시며 나누는 고요한 대화 같다는 설명을 부가했었다. 진노의 날이 없는 ’레퀴엠‘도 좋다. 철학자 김형효 교수가 베르그손의 철학을 굵고 육중한 베토벤의 음악이 아닌 미묘하고 대단히 섬세한 드뷔시나 라벨의 음악에 비유한 것을 기억한다.

포레를 좋아하는 입장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비유를 이해한다. 인상주의 그림에 어울리는 곡은 포레보다 라벨, 드뷔시이기 때문이다.(김 교수는 베르그손의 철학을 물체의 무게를 느끼지 않게 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마티스의 그림에 비유하기도 했다.)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아프고 슬픈 천사에 공감하는 것도 좋지만 포레나 사티의 가벼운 음악, 마티스의 ‘춤’처럼 가벼운 비상(飛上)의 그림을 보며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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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의 아니게 문화 해설에 관한 질문을 몇 건 주고 받았다. 두 건은 한 것이고 한 건은 받은 것이었다. 우선 창경궁 명정전을 명정원으로, 창덕궁 인정전을 인정원으로 기록한 한 블로거에게 정말 몰라서 그러니 왜 그렇게 쓰신 것인지 묻는다는 글을 남겼으나 며칠이 지난 현재 아무 답도 듣지 못했다.

페이스북 친구인 역사학자께는 배우려는 마음으로 묻는다는 전제를 한 뒤 우리 역사는 국사(國史)이고 한국사는 제3국인이 부르는 명칭이라 하시고서는 한국사 문헌사료 연구소라 하시는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글을 전했다.

이에 그 분은 한국사가 워낙 일반화되어 있어서 후에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잠정적으로 그렇게 썼고 아직 정식 등록 단체가 아니기에 등록할 때 국사라는 이름을 넣도록 할 것이라는 답을 주셨다.
그리고 “맹목적 비판이 아닌 의문점이나 잘못된 점에 대한 비판에는 언제든 문이 열려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멋지고 쿨한 분이시다.(감사드린다.) 이 분과 왕릉 답사를 갈 날을 기다린다.

내가 받은 질문(이라기보다 댓글에 가까운데)은 재궁(齋宮)에 대한 내 글에 대해 블로그 친구가 제시한 글로 재궁(齋宮)을 재궁(梓宮)으로 착각한 글이었다.

나는 이에 재궁(齋宮)은 종묘에서 임금, 세자가 제향(祭享) 전에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하던 곳이고 재궁(梓宮)은 임금, 세자 등의 관(棺)을 말하며 출판을 위해 인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상재는 上梓라 쓰니 재궁(梓宮)의 재와 상재(上梓)의 재는 같은 글자(가래나무 재)라는 답을 달았다.

자칫 이런 주고받음에 재미를 붙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은 기초를 다지고 정확성을 담보하는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늘 하는 생각이지만 언제든 내 잘못에 대해 지적, 또는 교정받을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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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나무
장세이 글.사진 / 목수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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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해설 공부를 하다 보면 3이란 숫자를 자주 접하게 된다. 궁궐의 33(三門 三朝: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3(: 천지인), 3(: 신향로, 어로, 세자로), 3간택(揀擇), 주역의 3() 등이다.

 

장세이의 서울 사는 나무를 접하고 저자가 한 이야기는 나무 이야기이지만 결국 이는 집, 나무, 사람이라는 (변형된) 3()를 이야기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전문서는 3재를 가치를 의미하는 천(), 법칙을 의미하는 지(), 주체를 의미하는 인()으로 풀었다.(송희식 지음 존재로부터의 해방’ 163 페이지)

 

3이란 숫자에 눈길이 가서인지 서울 사는 나무역시 서울의 세 곳(길가, 공원, 궁궐)에 사는 나무들을 이야기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 나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길가, 공원, 궁궐), 그리고 사람까지 함께 어우러진 드라마이다.

 

역시 3이란 숫자로 볼 것이 하나 더 있다. 하수(下手)는 꽃을 보고, 중수(中手)는 잎을 보고, 고수(高手)는 잎도 꽃도 없는 한 겨울 줄기를 보고 나무를 구분한다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논어자한(子罕)편에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이 있지만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숲 해설사인 저자는 고백하건대 벚나무를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 이제라고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남으려 꿀샘을 만들고 꽃만큼 단풍이 고운 나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안다.“고 말한다.(33 페이지)

 

길가와 공원의 나무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시민들이고 궁궐의 나무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왕 또는 왕족들이다. 물론 서울 사는 나무는 길가, 공원, 궁궐 등을 두루 돌아다닌 저자의 관점에 따라 엮인 이야기 모음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헌법재판소에 백송(白松)이 유명하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많은 이를 죽여 온 동네가 피바다가 되자 이를 덮으려 재를 뿌려 잿골로 불리다가 지금은 재동(齋洞)으로 불린다.(재를 뿌려 덮은 것과 목욕재계의 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난 527일 미래 유산 해설대회 시나리오 작성을 위해 바로 그 재동 백송을 찾았다. 역사/ 문화, 시민 생활, 나무가 결합된 해설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제시된 대회이다. 이 역시 3()라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백송 말고 가문비 나무도 유명하다. 나무 껍질이 검어 검은피 나무 즉 흑피목(黑皮木)으로 불리다가 가문비 나무가 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가문비 나무는 검다. 저자는 헌재가 하는 일을 두 나무가 희고 검고로 차이나듯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이라 말한다.(76 페이지)

 

저자가 다닌 다양한 명소들을 보면 체험이 많은 것을 말해줌을 알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수업을 받은 것이 지난 해 12월 두 차례였다. 경희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저자에 의하면 경복궁은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고, 전각이 여기저기 팔려나가고 정전인 숭정전(崇政殿)마저 옮겨진 경희궁은 공원으로 분류되어 서울시의 관리를 받는다.(153 페이지)

 

숭정전은 경희궁에서 즉위한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나는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 선언한 곳이다. 슈베르트의 보리수(菩提樹)’에 나오는 보리수의 정확한 이름은 피나무라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식물학자가 아니라면 피나무 종류는 매우 비슷하여 거의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204 페이지)

 

저자는 삼청공원의 나무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224 페이지) 나무 이름을 모르니 부를 수 없고 그래서 아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감한다. 49만여 제곱미터의 거대한 창덕궁은 절반 이상이 후원 곧 숲이며 무려 16,000여 그루의 나무가 살아간다. 그런데 회화나무는 후원이 아닌 대문 앞에 심어져 있다. 중국에서처럼 삼정승(三政丞)을 상징하는 나무이기에 그렇다.(289 페이지)

 

()는 느티나무일 때는 괴, 회화나무일 때는 회로 읽는다. 정조 이야기를 했지만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는 정조의 증손자 헌종의 사랑채이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白骨)집이다. 연경당(演慶堂)도 그렇다. ()/ () vs ()의 대비는 이해하려만 골()이라니...연경당은 계동마님댁의 모델이다.

 

저자의 행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종묘(宗廟)행이다. 저자는 종묘도 궁궐이라 말한다. 신들의 궁궐인 신궁(神宮)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종묘는 망묘루(望廟樓)만 팔작지붕이고 정전(正殿), 영녕전(永寧殿), 전사청(典祀廳), 향대청(香大廳), 재궁(齋宮) 등이 모두 맞배지붕이라는 점이다. 맞배지붕은 소박미가 있다.

 

궁궐은 왕이 살아 있을 때 살던 곳이고 종묘는 사후 영혼이, 능은 몸이 사는(묻힌) 곳이다. 이 역시 3()라 할 수 있다. 종묘 정전은 건물 색이 밝았다가 진했다가 한다. 처음 짓고 난 이후 계속 덧지은 결과다.(368 페이지) 저자는 언제부터인가 종묘에 들면 재궁 앞 물박달나무를 찾는다고 한다.

 

저자는 기품도 없고 단정치 못한 물박달나무가 어떻게 종묘에 살게 되었는가를 묻는다. 나는 비무장 지대에 사는 나무들 특히 북의 화공(火攻)에 타는 나무들을 보며 참 기구(崎嶇)한 나무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험할 기, 험할 구) 종묘 연못에는 향나무가 있다. 초혼(招魂)의 나무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제사 공간의 상징성을 고려한 결과라는 말도 있다.

 

저자는 백성 없는 왕이 어디 있던가. 민초의 신산한 삶을 대변하는 물박달나무는 꿋꿋이 신들의 정원에 살며 우리도 기억하라고 외친다.”고 말한다.(375 페이지) 빵으로 치면 페스트리, 사무용품으로 치면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나무가 물박달나무이다. 나무 이야기는 결국 삶의 이야기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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