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과 경복궁 자료를 위해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아서 직접 관련이 없는 건축 책들을 몇 권 빌려오고 말았다.

물론 궁궐 책도 건축과 관련이 있지만 빌려온 책들은 인문적 건축을 주제로 한 책들이기에 궁궐과 직접 관련이 있는 책들이 아니다.

건축 책들을 가끔 읽는 편인데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프랭크 게리에 대한 관심도 건축 책들을 읽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게리는 종묘 정전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지닌 건축가로 지난 2012년 일반 관람객들이 없는 이른 시간에 자신과 일행들 몇몇만 종묘를 보게 해달라고 해 우여곡절 끝에 허락을 얻어냈던 분이다.

종묘 시나리오에 게리 이야기를 포함시킨 것은 병렬 구성의 관점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김동욱 교수의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이나 임석재 교수의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등의 책들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서양 건축으로부터도 배울 것은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종묘 공부를 하면서 상징적 목적과 실용적 목적을 상호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중지(中池) 한 가운데에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례 공간이기에 상징적인 차원으로 잡귀를 쫓고 신을 부르는 나무를 심은 것이기도 하고 제례에 쓸 향을 확보하기 위해 실용적 목적으로 심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전통 건축들을 분석하는 책에 당분간 빠져지내게 될 것이다.

서양 건축들을 보는 시각으로 우리의 건축들을 분석하고 느끼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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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제로든 온라인 접속으로든 창경궁을 잘 찾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관람 후기가 올라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늘 오랜만에 홈 페이지에 들어가 이런 관람 후기(522일 작성)를 보았다.

 

땡볕에 관람자들을 배려하는 해설사의 배려는 좋았지만 통로에 서서 설명을 해 죄송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는 문제가 아니다. 후기 작성자에 의하면 해설사가 역사 지식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설명할 때 단어가 입에서만 맴돌고 얼른 나오지 않는 데다가 ~ 한다더라, ~인 것 같다 식의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 해설사는 숙종과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의 사랑을 영조와 숙빈 최씨의 사랑으로 혼동했으니 의도하지 않게 패륜(悖倫)을 만든 셈이다.

 

너무 실망했다며 프라이드를 가지고 제대로 된 전문가를 배치하라고 한 그 후기 작성자는 자격증만 있고 경험이 없는 분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을 쌓으려는 건가요?”란 말을 덧붙였다.

 

이 프로그램이란 41()부터 1029() 까지 매주 토, 일요일 1430분에서 16시까지 진행하는 역사와 함께 하는 창경궁 왕의 숲 이야기프로그램이다.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1) “관람자들을 배려하는 해설사의 배려는 좋았지만이란 구절은 관람자들을 배려하는 해설사의 매너는 좋았지만정도로 고쳐야 한다. 배려하는 배려란 말은 중언부언이다.

 

2) “자격증만 있고 경험이 없는 분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을 쌓으려는 건가요?”란 말은 기본도 되지 않은 문장이다자격증만 있고 경험이 없는 분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을 쌓게 하려는 건가요?”로 고쳐야 한다.

 

3) 후기 작성자가 지목한 해설사는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설사가 되기 전에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 해설사가 경험이 없어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려면 역사 상식은 해설사만 배우고 익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지식은 해설사와 무관하게 또는 해설사 이전에 기본적으로 학교나 개인 독서를 통해 배우고 익히는 것들이다.

 

그 해설사는 해설사 경험이 없어서(또는 짧아서) 엉뚱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역사 시간을 허투루 보냈거나 학교를 마치고 기본적으로 역사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아 이상한 말을 한 것이다.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무료 프로그램인데 그렇게 실망스러워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제 내가 들은 궁궐 해설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행히 그 창경궁 숲 해설가와 달리 기본적인 문제도 없었고 말도 매끄러웠다.

 

그런데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궁궐 해설은 아주 기본적인 레퍼토리 정도에 그친다. 기본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다. 해설 내용을 미리 준비해 가서 들으면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어제 내가 들은 궁궐 해설도 참여한 사람이 10여명인데 거의 나 혼자 답하고 물었다. 기본은 본인이 챙기고 그 이상을 묻거나 얻으려 하고 해설사이거나 해설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해설 기법을 눈여겨 보면 좋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궁궐의 분위기를 즐기거나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다. 어떻든 그 창경궁 숲 해설사처럼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공부하고 연습해야 한다. 남의 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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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묘(宗廟)에 가서 물박달나무, 주목, 향나무, 귀룽나무, 느티나무(괴槐), 은행나무, 가래나무 등을 보았다.

이제는 직원들, 해설사들과 안면을 익혔을 만큼 자주 드나든 종묘에 앞으로는 나무 때문에 드나들게 될 것 같다.

종로구 재동의 헌법재판소를 백송(白松)만으로 이야기하는 세간과 달리 독일가문비나무(나무 껍질이 검어 검은피나무로 불리다가 가문비나무로 불리는 나무)를 함께 이야기하며 흑백을 가리는 헌법재판소에 어울린다고 해석한 한 숲 해설가처럼 좋은 안목을 갖출 수 있기를 바라며.

적(迪)이란 말 구체적으로는 세한도(歲寒圖)의 주인공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의 이름에 있는 적, 그리고 적솔력(迪率力)이란 말에 들어 있는 적(迪)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이다.

이상적은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즉 ‘논어‘에 나오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물론 살구나무와도 관련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최근 알았다.(강판권 지음 ‘나무를 품은 선비‘ 참고)

우선(藕船) 이상적은 유배를 당해 지위와 권력을 모두 잃은 스승 추사 김정희에게 한결 같은 의리를 보인 선비(역관譯官) 이다.

그가 추사로부터 겨울이 오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는 의미가 담긴 세한도를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살구나무와 이상적의 인연이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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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종묘 해설은 나온 지 몇 년쯤 된 책 몇 권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구성했습니다. 이 책들에는 망묘루(임금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을 떠나 종묘에 와서 처음 인사 드리는 곳으로 묘당 즉 정전을 바라보고 선왕들의 은덕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던 곳)에 조선의 역사, 문화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 자유 열람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가 분실되는 등 문제가 있어 망묘루는 폐쇄되었습니다. 물론 망묘루 폐쇄가 전적으로 도서 분실 때문에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6월 3일 향대청(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등을 보관하고 제관이 대기하며 제사 준비를 하던 곳) 앞에서 8일무(佾舞; 종묘 제례에 사용되는 춤으로 가로 여덟 세로 여덟 즉 64명이 추는 춤)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요 오늘 보니 악공청(종묘 제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대기하던 곳) 앞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춤은 향이나 축문보다 악공청과 더 가깝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실을 왜 이제야 알고 시정했는지 의아합니다.

영녕전(정전에 모셔졌다가 옮겨지는 임금들을 모시는 별묘別廟 개념의 신실神室)에 명종의 신하인 이언적이 없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이언적 뿐이 아니라 모든 공신이 없습니다.)

이언적은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 송시열 등과 함께 종묘와 문묘에 함께 모셔진 분으로 소개되었는데요 명종이 정전에서 (불천위不遷位가 아니기에) 영녕전으로 옮겨졌을 때 그곳의 중앙 신실에 모셔져 있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추존왕인 까닭에 신하가 없는 마당에 후손인 명종이 신하와 함께 모셔질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상적, 제도적 기틀을 세운 정도전이 종묘 또는 문묘에 모셔지지 않은 것과, 끝까지 고려를 위해 충성하고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모셔진 것이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면 이언적은 추존왕 제도와 조천(祧遷; 불천의 반대) 제도로 인해 이상한 봉변을 당한 셈입니다.

종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19칸의 신실입니다. 그런데 남문 쪽에서 보는 신실은 별 멋이 없습니다. 동문쪽 즉 측면에서 보아야 장엄한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확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둥과 칸이 반복되는 정전의 신실들은 무한(無限)을 생각하게 합니다.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상 외로 종묘 해설 듣기를 신청한 분들께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돌아가며 몇 자 적었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해설이었다고 자평합니다. 아쉽지만 진보의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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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급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광해군은 종묘(宗廟)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증축한 임금이다.

광해군의 증축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종묘를 다시 세우며 이전보다 신실(神室)을 늘린 것이다.
광해군 외에 명종, 영조, 헌종, 고종이 정전을 증축했고 현종, 헌종이 영녕전을 증축했다.

헌종도 2관왕이지만 그는 조선에서 존재감이 미약한 임금들인 명종, 정종, 현종, 경종 등과 비슷한 레벨의 임금이다.

이 분들은 모두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정전이 아닌 마이너 리그격인 영녕전에 봉안(奉安)되었다.

광해군은 폐위된 군주이지만 연산군과는 성격이 다르다.

광해군이 안타까운 것은 그가 종묘 봉안을 염두에 두고 정전과 영녕전을 증축한 것은 아니겠지만 증축 2관왕으로서 정작 자신은 종묘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해군이 종묘를 증축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된 종묘를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니 불가피한 면이 있다.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도 저질렀지만 명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서 펼친 양면 외교 또는 실리 외교는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세금을 더 내는 대동법을 실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해명해야 할 부분은 광해군이 서인과 북인의 당파 싸움으로 희생되었다는 부분이다.

문제는 패륜(悖倫)과 치적(治積) 사이의 부조화이다. 궁색하게 들리겠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왕이 되게 한 대북파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고 극성스럽게 주장하자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경희궁과 인경궁을 지은 광해군의 무리한 토건정책도 지적되어야 한다.

패륜과 치적 사이의 부조화보다 더한 문제는 내정과 외치 사이의 부조화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일파)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지는 나라 명에 의존하다가 청(후금)으로부터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광해군은 오늘 우리에게 화두를 던져준다. 아니 그의 시대가 그런 것이라 해야겠다.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오늘 우리를 보는 듯 하다. 역사가 흥미로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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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6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조 반정공신들은 정말 최악의 위정자
들 그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쩡한 임금을 폐위시킨 자신들의 결정
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망해가는 명나라
에 대한 의리를 고집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까지 몰아 넣었으니 말입
니다.

천조국을 신주단지 받들어 모시듯이 하
는 일부 몰지각한 당파가 오늘날 보여
주는 모습과 유사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6-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들이 저지른 행악은 오늘날 우리의 어떤 정당의 모습과 너무 유사합니다. 선조도 임진왜란때 도망만 다닌 잘못을 덮으려고 자신이 명군에 도움을 요청해 이겼다는 주장을 rhetoric적으로 했고 결국 그 논리에 갇혀 위기를 자초했지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