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종묘 해설은 나온 지 몇 년쯤 된 책 몇 권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구성했습니다. 이 책들에는 망묘루(임금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을 떠나 종묘에 와서 처음 인사 드리는 곳으로 묘당 즉 정전을 바라보고 선왕들의 은덕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던 곳)에 조선의 역사, 문화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 자유 열람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가 분실되는 등 문제가 있어 망묘루는 폐쇄되었습니다. 물론 망묘루 폐쇄가 전적으로 도서 분실 때문에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6월 3일 향대청(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등을 보관하고 제관이 대기하며 제사 준비를 하던 곳) 앞에서 8일무(佾舞; 종묘 제례에 사용되는 춤으로 가로 여덟 세로 여덟 즉 64명이 추는 춤)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요 오늘 보니 악공청(종묘 제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대기하던 곳) 앞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춤은 향이나 축문보다 악공청과 더 가깝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실을 왜 이제야 알고 시정했는지 의아합니다.

영녕전(정전에 모셔졌다가 옮겨지는 임금들을 모시는 별묘別廟 개념의 신실神室)에 명종의 신하인 이언적이 없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이언적 뿐이 아니라 모든 공신이 없습니다.)

이언적은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 송시열 등과 함께 종묘와 문묘에 함께 모셔진 분으로 소개되었는데요 명종이 정전에서 (불천위不遷位가 아니기에) 영녕전으로 옮겨졌을 때 그곳의 중앙 신실에 모셔져 있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가 추존왕인 까닭에 신하가 없는 마당에 후손인 명종이 신하와 함께 모셔질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상적, 제도적 기틀을 세운 정도전이 종묘 또는 문묘에 모셔지지 않은 것과, 끝까지 고려를 위해 충성하고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모셔진 것이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면 이언적은 추존왕 제도와 조천(祧遷; 불천의 반대) 제도로 인해 이상한 봉변을 당한 셈입니다.

종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19칸의 신실입니다. 그런데 남문 쪽에서 보는 신실은 별 멋이 없습니다. 동문쪽 즉 측면에서 보아야 장엄한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확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둥과 칸이 반복되는 정전의 신실들은 무한(無限)을 생각하게 합니다.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상 외로 종묘 해설 듣기를 신청한 분들께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돌아가며 몇 자 적었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해설이었다고 자평합니다. 아쉽지만 진보의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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