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정조 이후 - 정조시대와 19세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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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은 상반된 평가를 받곤 한다. 더구나 어떤 인물의 생전과 사후 세상이 극적으로 달라졌다면 더욱 그렇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로 정조(正祖)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조 뿐 아니라 역사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용도로 호출되곤 한다. 탕평 군주 vs 세도 정치를 초래한 인물, 개혁 군주 vs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존숭(尊崇)한 철저한 주자학자 등...

 

정조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이런 가운데 여러 필자가 쓴 정조와 정조 이후가 나왔다. 이 책은 계간지 역사 비평’ 115 117호의 연속 기획에서 비롯된 책으로 이 필자들이 공동 연구를 한 것도 아니고 따로 학술회의를 하지도 않았고 책의 출간을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맞춤형 논문을 강제하기 어려웠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에는 일관성이 없는 대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유로운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경구는 서장(序章)에서 연구자는 (사람들이) 정조를 손쉽게 호출할 때의 위험을 항상 경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경구는 역사는 입맛에 맞는 결론을 보여주는 학문이 아니라 끊임 없는 반성과 성찰을 제시하며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학문이었다고 말한다.

 

최성환은 1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 군주 정조 읽기에서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역사 소설이라 칭한다. 최성환이 경계하는 것은 단순 구도(構圖),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오가는 사이비(似而非)한 상상력이다. 최성환은 역사는 기억이고 기억은 만들어진다는 관념이 주문처럼 되뇌어지면서 역사 인식의 상대성이 강조되지만 역사는 사실에 기반한 기억이며 사실의 조작은 기억 만들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최성환은 조선 후기 정치의 핵심으로 당쟁을 든다. 정권 투쟁을 본질로 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붕당 및 당쟁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최성환의 주장이다. 당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정국에 따라 새롭게 분화, 재편(이합집산)한다. 정조는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였다. 실학은 주자학에 반하는 학문이 아니다.(55 페이지)

 

최성환이 말하는 핵심은 정조의 탕평(蕩平)은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바(59 페이지) 정치를 경제, 사회, 개인, 혁명 등과 같은 비정치로 환원하면 그 결과는 파시즘, 전체주의, 개인의 수양 문제 등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60 페이지)

 

박경남은 2정조의 자연, 만물관과 공존의 정치에서 영, 정조 시대에 실학이 만개한 한편 성리학이 집대성된 상반된 모습을 조명한다. 박경남은 자연과의 교감, 만물과의 공존을 지향했던 정조의 마음이 인간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의 장() 속에서는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조명한다. 정조는 외형상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이탈하며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쳤다.(77 페이지)

 

전용훈은 3천문학사의 관점에서 정조 시대 다시 보기에서 정조 시대를 국가 천문학이 거의 완전해진 시대로 설명한다. 중요한 사실은 시간 규범의 수립과 반포는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시간을 내려준다(관상수시: 觀象授時)는 동아시아 특유의 제왕의 이념을 실천하는 일이었다는 점이다.(91 페이지)

 

정조 시대는 시헌력(時憲曆: 1653년 이후 1910년까지 한국에서 쓰인 역법)을 중심으로 국가 천문학의 운용이 완전해진 시기이다.(98 페이지) 그런데 필자는 전통시대 천문학은 국가천문학이란 말을 한다.(91 페이지) 이를 보면 국가천문학이란 말은 불필요한 말이다. 전용훈은 술수(術手)를 당대인들의 심리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으로 소개하는 최근 국외 학계의 동향을 소개한다.(100, 101 페이지)

 

나는 지난 번 풍수지리를 논하는 역사 강사에게 풍수지리를 같은 차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조대에는 선택(選擇)의 수요가 폭증했다. 선택이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길()을 꾀하고 흉()을 피하는(추길피흉趨吉避凶하는) 시간과 방향을 얻는 것이다. 선택의 수요가 폭증하고 그 역할 증대는 국가 의례의 정비 및 체계화와 병진(竝進)한다.(103 페이지)

 

전용훈은 천문학에 국한해도 정조 시대의 성취는 그의 사후 단절은커녕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자유로운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학문이 아니라 국가의 인가를 얻은 제한된 관료들이 국정 운영을 위해 수행한 학문이었고 자연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인됨을 목적으로 하는 최고의 학문인 경학(經學)에 복무하는 보조적인 학문이었다.(108 페이지)

 

노대환은 5‘19세기에 드리운 정조의 잔영과 그에 대한 기억에서 정조가 기억되는 대체적 양상을 살펴본다. 정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순조 초반의 상황이었다.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정조의 권위를 이용해야 했다.(138 페이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는 각기 자신들이 정조의 뜻을 계승한다고 표방했다.

 

하지만 표방과 달리 정조의 이념이나 정책은 파기되었다. 우선 벽파의 집권 방식 자체가 정조가 힘들게 추구해온 탕평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40 페이지) 노대환은 세도정치의 전개에 정조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정조는 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이건 저 척리이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고심이라 할 만큼 척신의 정치 개입에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시파가 집권함으로써 세도정국이 형성되었고 정조가 중시했던 우현좌척(右賢左戚) 원칙도 무너졌다. 정조 사후 사람들이 정조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국왕과 신하들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국왕을 비롯하여 각 정치 세력은 필요에 따라 정조를 기억했다.(151 페이지)

 

노대환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통치자로서 정조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망각되거나(우현좌척 이념) 단절되거나(노비제 개혁) 왜곡되거나(천주교 정책) 답습되었다.(헌종과 고종의 장용영 설치) 중요한 점은 규장각이 경화거족(京華巨族: 서울의 번화한 곳에 살면서 대대로 번영을 누리는 집안)들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조가 각신(閣臣)들에게 부여한 권위를 누리는 등 규장각을 사적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157 페이지)

 

규장각은 문벌 기구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갑신정변 때 혁파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정조에 대한 일종의 신화는 그 신화를 필요로 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국왕들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을 기억하고자 했고 신료들은 정조를 학문을 열심히 닦고 주변 이야기를 경청하는 임금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조를 기억했다.(158 페이지)

 

노대환은 정조는 완벽한 국왕도 아니었고 정조 통치기는 성세(盛世)도 아니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오수창은 6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 대화에서 경제, 사회, 개인, 혁명을 비정치 또는 비정치의 영역으로 규정한 최성환의 연구를 오류라 지적한다. 오수창은 정치는 경제, 사회와 같은 정치적 상황,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적 인간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오수창은 갈등 조정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 사회, 개인, 혁명을 비정치로 보고 갈등의 조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우선적이고 적절한 연구 시각인가, 라는 것이다. 예컨대 오수창이 말하는 바는 당사자 간의 갈등 조정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령 민주의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불법은 조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추상 같이 처벌해야 할 것이다.

 

오수창은 붕당(朋黨)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런 집단적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직하고 제도화하여 개인의 권력욕을 생산적인 사회적 에너지로 동원하는 것이라 말한다.(174, 175 페이지) 오수창은 영조와 정조가 사용한 민국이라는 말은 백성의 삶과 나라의 살림살이라는 국정 운영의 대상을 가리키며 정조대까지 국왕이 민을 정치의 주체 또는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25년이라는 짧지 않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그가 수립하려던 군주 중심의 정치 질서가 일거에 무너졌다. 오수창은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직접 치밀하게 이끌었던 정조의 정치는 자신과 같은 역량의 군주에 의해서만 또는 시대적 모순이 점점 커짐에 따라 자신보다 더 큰 역량을 지닌 군주에 의해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77 페이지)

 

오수창은 정조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고 군주의 입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따라 최선을 다했지만(175 페이지)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틀 안에서 주자학의 원리에 입각해 추진되었고 시대구분이 적용될 만한 변혁을 지향하거나 수행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178 페이지)

 

오수창은 탕평정치와 세도정치 사이에는 급격한 단절이 있지만 세도정치가 빚어진 정치구조를 감안하면 그 둘 사이에 단절만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182 페이지) 19세기 권세가들이 측근인 고위 관원들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재상권 강화 정책에 연결되고 이런 가운데 언론 기능은 퇴조했다.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된 것이다.

 

오수창은 자신과 동료들은 정조의 책임을 물은 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정조의 정치가 세도정치와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되는가를 설명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185 페이지) 오수창은 자신과 동료들의 논지는 책임 소재를 밝힌 것이 아니라 말한다. 오수창은 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자는 전통시대의 역사학처럼 포폄(褒貶)을 가하고 교훈을 얻는 데서 벗어나 구조와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입각해 시대에 따른 정치 변화를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186, 187 페이지)

 

오수창은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것은 중세 사학에서 하던 일일 뿐 근대 역사학의 본령은 아니라 말한다.(188 페이지) 오수창은 조선 후기에 정조의 탕평정치를 거쳐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계기성의 의미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조선의 통치체계가 수명을 다해 붕괴되어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준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188 폐이지)

 

조성산은 8'19세기 조선의 지식인 지형'에서 역동성과 경화(硬化)라는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융합하면서 19세기 조선의 사상계가 형성되었음을 밝힌다. 정조는 청나라에서 유입된 고증학, 소품체 문학 등으로부터 조선의 주자학적 문예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17 페이지)

 

물론 정조는 강력한 척사(斥邪)보다는 정학(正學)을 북돋음으로써 이단(異端)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는 전략을 모색했다. 박지원의 다음 세대인 홍길주(洪吉周: 1786 1841)는 모든 사물의 원리 질서를 보편적인 태극 관념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주자성리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하늘에는 하늘의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으며 곤충과 초목에게는 곤충과 초목의 이치가 있고 물과 불과 흙과 돌에는 물과 불과 흙과 돌의 이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가 갖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성격보다 각각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이()의 개별성을 강조했다.(219 페이지)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연상하게 한다.

 

플라톤은 우주의 만물이 이데아의 논리적 체계 속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사물 자체 내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파악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이다. 19세기에도 주자학은 주류였지만 인식론 비판, 종교적 심성 강조 등의 도전에 직면했다.(223 페이지)

 

정조를 비판하든 지지하든 관건은 정치사를 개인사로 환원하지 않는 일이다. 이경구가 서장에서 말한 부분이 특별히 과제이자 위안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상쾌한 결론이 없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지겨울 정도로 느릿느릿한 (역사 공부)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전망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말이다. 느릿느릿함이 치열함으로 채워진 것이 되어야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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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세자나 왕자의 돌상에 붓, , , 쌀 등과 함께 놓아 아기의 시선을 끌기 위한 용도로 쓰인 돌잡이용천자문이 있다. 쑥색 비단 표지에 빨강, 파랑, 노랑, 분홍, 초록, 하양 등으로 물들인 장지를 묶어내 당대 명필이었던 석봉 한호체를 쓴 화려한 천자문이다.

 

조선시대 국가의 서적 등을 보관, 관리했던 장서각(藏書閣)에 유일하게 전해지는 필사본이다.(2017110일 서울신문 기사 '조선 왕실은 왜 알록달록 천자문 만들었을까' 참고)

 

왕실에서 돌잡이를 처음 실시한 임금은 정조이다. 실록에는 정조(正祖)가 아들 이공(李玜; 순조)의 돌에 돌잡이를 하게 한 기록이 있다.

 

이공은 먼저 채색 실을 집고 다음으로는 화살과 악기를 집었다. 선집채선(先執綵線) 차제호시관현(次提弧矢管玄)이라는 원문이 재미 있다. 잡을 집()과 끌어 당길/ 손에 들 제()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잡이는 한문으로 무엇이라 할까? 목적어가 없는 단어여서 보는 입장에서는 난감하지만 만드는 입장은 달랐을까? 때 아니게 돌잡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집()과 제()처럼 집는(잡는) 것을 뜻하는 병(; 잡을 병)이란 단어를 통해 자연 및 만물을 대하는 시각이 사상이나 주의(主義)를 대하는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령 18세기 말, 19세기 중반의 학자 유이좌(柳台佐; 1763 - 1837)는 병비염화(秉畀炎火)하듯 즉 벌레를 잡아 불에 태우듯 주자학에 해를 끼치는 해로운 책들은 불에 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조는 해충의 생명까지 소중히 여긴 마음으로 어떤 사람의 학술이 못나고 어긋나도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거나 책을 불태우는 극단적 처방을 삼갔다.

 

정조는 외형상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그로부터 이탈해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친 군주이다.('정조와 정조 이후' 77 페이지) 책을 태우는 곳의 사람들은 결국 사람을 태울 것이라는 시인 하이네의 말이 생각난다.

 

나치의 도시 게르마니아의 축과 맞닿은 운터덴린덴 가로변에 베벨광장이라는 곳이 있다. 꽤 넓지만 모두 비워져 있는 이곳의 한쪽에 사방 1m 남짓한 유리가 바닥에 놓여져 있고 그 안에 백색의 비어 있는 서가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1933년 괴벨스의 충동을 받은 소년 나치대원들이 유태계 지식인들의 책 2만권을 불태운 것을 기념하는 설치물이다.

 

프로이트, 레마르크, 하이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등의 책들이 더러운 정신의 소산으로 지목당해 화형에 처해진 것인데 형체가 없어 소박하기 그지 없지만 대단히 큰 울림을 주는 이 기념비 앞에는 이것은 서주일 뿐이다. 책을 태우는 자들은 결국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 하나가 동판 위에 새겨져 바닥에 놓여있다.(2015114일 경향신문 수록 승효상 글 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발췌, 일부 수정)

 

'정조와 정조 이후'에 대해 말해야겠다. 이 책은 정조의 공과를 냉철히 분석한 책이다. 비판하는 사람이든 지지하는 사람이든 공히 불편할 책이다. 언급했듯 정조는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였지만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한 외형과 달리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이탈하며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친 군주인가 하면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한 군주이다.(‘정조와 정조 이후’ 77 페이지)

 

, 정조 시대 자체가 미스테리이다. 그 시대는 실학이 만개한 시대인 동시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가 성리학이 집대성된 시기이기도 하다.(‘정조와 정조 이후’ 62 페이지) 정조는 주자학을 준신(遵信; 그대로 좇아서 믿는 것)하지 않았다.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고민할 군주가 정조이다.

 

다만 비판이든 지지든 역사와 소설의 경계를 오가는 접근법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고 싶다. 또한 '정조와 정조 이후'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나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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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쾨슬러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의 1930년대 이후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린 한낮의 어둠이라는 소설을 쓴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오래된 데다가 더 이상 새로운 생각거리를 주지 못하는 책들을 폐기처분할 때 몇몇 소설들을 남겨두었는데 그 중 한 권이 한낮의 어둠이다.

 

최근 정동 해설을 할 때 러시아 대사관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서울 중구(中區)를 소개하는 스마트폰 앱에도 포함되지 않은 러시아 대사관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후 들어선 소련은 1991년 보수 세력의 쿠데타로 무너진다. 이로 인해 서울 주재 소련 대사관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고종(高宗)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장소를 정동 공원 언덕 길의 러시아 공사관이 아닌 옛 배재고 자리에 들어선 러시아 대사관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소련과 수교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이다. 아관파천은 1896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러시아 대사관은 우리에게도 관련이 있다. 김원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2010년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한낮의 어둠을 통해 만난 쾨슬러를 다시 만난 것은 그 다음 해이다.

 

체코의 정신의학자인 스타니슬라프 그로프의 코스믹 게임을 통해서였다.

 

그로프는 쾨슬러는 전체인 동시에 부분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우주 속 만물을 뜻하는 홀론(holon)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트랜스퍼스널(초개인적) 심리학자라는 말을 했다.

 

쾨슬러에 대한 관심은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헉슬리는 환각 체험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문명 비판가이다.

 

헉슬리는 자신의 환각 체험을 인식의 문(Doors of Perception)'이란 말로 설명했다. 이 책 제목으로부터 짐 모리슨이 리더였던 록 그룹 도어즈(Doors)의 이름이 유래했다.

 

아서 쾨슬러에서 홀론, 러시아 대사관, 헉슬리, 그룹 도어즈까지 두루 꿰는 것을 일이관지(一以貫之)라 할 수 있을까? 미륜(彌綸) 즉 잇고 꿰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 나무 전문가가 최근 쓴 책에서 수이관지(樹以貫之)란 표현을 썼다. 나무로 만물을 꿰어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흥미롭다. 나는 문화해설로 만물을 잇고 꿰는지도 모른다. 억견(臆見) 없이 비약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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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현 상황(status quo)은 부족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아침 단톡방에 오른 동학(同學)의 이런 글을 읽고 한 과학자의 책을 펴보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논문을 보고 이건 틀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not even wrong) 지경이라고 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를 소개한 책이다. 지나친 것일까?

 

입자물리학자이자 실험물리학자인 리온 레더먼은 틀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이라는 파울리의 말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라고 말했다.

 

파울리는 어떤 박사후 과정 연구원에게는 생각하는 속도가 느린 것은 괜찮다. 문제는 자네의 생각보다 논문 쓰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이라는 말도 했다.

 

생각이 여물지 않은 상태로 섣부르게 쓰는 것이 문제란 의미일까? 파울리가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의 제자를 추천하며 쓴 편지도 길이 남을 글로 보인다.

 

독설이라기보다 심기를 긁는 글이 아닌가 싶은데 그것은 이 학생은 제법 똑똑하긴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되신 지 꽤 오래이시니 잘 보듬어 주시리라

믿습니다.’란 글이다.(‘신의 입자참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주된 심성이지만 나의 그런 점이 부끄러움을 중요시한 맹자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함은 당연하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고 가르쳤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학문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최근 나는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을 대단히 싫어하면서도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정조와 정조 이후’ 55 페이지) 정조(正祖)를 좋아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기보다 충격을 느꼈다.

 

정조만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든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 초점을 둘지는 본인의 재량에 달려 있다. 역사학자라도 정조의 모든 면을 두루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학문적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고 개혁 군주로 알려진 그의 정치적 성향에 초점을 두어온 것이 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조의 정치적 성향 역시 세도(勢道) 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문제적이다.

 

정조는 다산(茶山)과 비교되곤 한다. 정조는 마땅히 조선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산은 명말 청초의 실증적인 학풍 그리고 더 나아가 서양의 신학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자유로웠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정조의 어떤 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내 생각이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라는 책에서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천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을 했다.

 

천재와 거리가 멀기에 단언할 수 없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실수로부터 배워 새롭게 도약하는 것은 지식의 양()과 질()의 문제이지만 적극적으로 배우고 고치겠다는 의지의 문제, 세계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그리고 명석(明晳: 분명하고 똑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끄러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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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로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크림 애벌랜치(cream avalanche)란 단어로 설명된 아이스크림 사진을 보았다. 달콤하고 화려한 아이스크림이 넘칠 듯 그릇 위에 담긴 그 사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대의 무너지는 소리 듣는다/ 눈 그친 겨울 아침, 빈 들로 밀려오는/ 그대 발자국 소리 듣는다..”

 

염명순 시인은 눈사태란 시를 이렇게 풀어갔다. 언젠가 나는 이 시를 인용하며 그대를 중의적(重意的)으로 즉 무너지는 주체가 눈만이 아니라 사람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글을 썼다.

 

애벌랜치에는 사태(沙汰), 산사태란 뜻이 있다. 나는 희생양 생각도 했다. “희생양은 죄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다. 산사람이 멋모르고 한 번 외쳐댄 후 눈사태가 나는 경우처럼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짓 이상으로 큰 재난을 만나기에 무죄이지만 피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의 일부인 세상에 살기에 유죄다.” 캐나다의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가 한 말이다.

 

쇄도(殺到)란 말은 어떤가? 달콤한 크림을 보는 사람의 뇌에 쓰나미처럼 쇄도하는(몰려드는) 기억. 사람들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기원한 프루스트 효과를 논한다. 프루스트 효과란 냄새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냄새를 맡는 것은 자전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 유효하지만 서술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별 효과가 없다.(존 메디나 지음 브레인 룰스참고) 서술기억은 두 가지 이상의 개념들의 관계가 명제 형태로 저장된 기억이다. 자전적 기억은 특정 상황의 내용에 대한 장기 기억을 말한다.

 

박문호 교수는 기억을 절차 기억, 신념 기억, 학습 기억 등으로 나눈다. 오픈 시스템(유연한 사고)을 가진 사람들은 학습 기억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신념 기억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 믿음이다. 신념 기억은 방향이 잘못되면 문제를 일으킨다.(’, 생각의 출현‘ 478, 479 페이지)

 

신념 기억은 경직(硬直)을 특징으로 한다. 새로운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의문을 갖지도 않는다. 이는 정확히 창의적인 사람과 반대되는 특징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의문을 많이 품는다.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건이나 개념에 반응하는 경이(驚異)의 사람이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섬세하고 신체적으로 민감하다. 나는 어떤가. 경이는 자신하지 못하지만 쉼 없이 만나는 새로운 것들에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근대를 미술관의 시대라 표현한, 루브르 박물관 수석 관장을 지낸 제르망 바쟁은 2차 세계 대전 중 일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프랑스에서 패주하던 독일 병사들까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한 번 보게 해달라고 애원한 그림이 모나리자였다고.(이때 바쟁은 루브르의 큐레이터였다. 그는 미술관을 시간이 중지된 듯한 사원(寺院)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바쟁이 말한 독일 패주병(敗走兵)들은 절정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쟁은 회화의 표면 전체를 천천히 훑어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캐롤 던컨 지음 미술관이라는 환상참고) 이렇게 미술품을 천천히 훑어볼 수 있는 눈이 내게 필요하다. 꼭 미술품에 대해서만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개념에 대해, 사건에 대해 그래야 한다. 그것이 창의성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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