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현 상황(status quo)은 부족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아침 단톡방에 오른 동학(同學)의 이런 글을 읽고 한 과학자의 책을 펴보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논문을 보고 이건 틀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not even wrong) 지경이라고 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를 소개한 책이다. 지나친 것일까?

 

입자물리학자이자 실험물리학자인 리온 레더먼은 틀렸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이라는 파울리의 말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라고 말했다.

 

파울리는 어떤 박사후 과정 연구원에게는 생각하는 속도가 느린 것은 괜찮다. 문제는 자네의 생각보다 논문 쓰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이라는 말도 했다.

 

생각이 여물지 않은 상태로 섣부르게 쓰는 것이 문제란 의미일까? 파울리가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의 제자를 추천하며 쓴 편지도 길이 남을 글로 보인다.

 

독설이라기보다 심기를 긁는 글이 아닌가 싶은데 그것은 이 학생은 제법 똑똑하긴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되신 지 꽤 오래이시니 잘 보듬어 주시리라

믿습니다.’란 글이다.(‘신의 입자참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주된 심성이지만 나의 그런 점이 부끄러움을 중요시한 맹자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함은 당연하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고 가르쳤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학문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최근 나는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을 대단히 싫어하면서도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정조와 정조 이후’ 55 페이지) 정조(正祖)를 좋아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기보다 충격을 느꼈다.

 

정조만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든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 초점을 둘지는 본인의 재량에 달려 있다. 역사학자라도 정조의 모든 면을 두루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학문적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고 개혁 군주로 알려진 그의 정치적 성향에 초점을 두어온 것이 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조의 정치적 성향 역시 세도(勢道) 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문제적이다.

 

정조는 다산(茶山)과 비교되곤 한다. 정조는 마땅히 조선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산은 명말 청초의 실증적인 학풍 그리고 더 나아가 서양의 신학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자유로웠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정조의 어떤 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내 생각이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라는 책에서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천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을 했다.

 

천재와 거리가 멀기에 단언할 수 없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실수로부터 배워 새롭게 도약하는 것은 지식의 양()과 질()의 문제이지만 적극적으로 배우고 고치겠다는 의지의 문제, 세계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그리고 명석(明晳: 분명하고 똑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끄러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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