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세자나 왕자의 돌상에 붓, , , 쌀 등과 함께 놓아 아기의 시선을 끌기 위한 용도로 쓰인 돌잡이용천자문이 있다. 쑥색 비단 표지에 빨강, 파랑, 노랑, 분홍, 초록, 하양 등으로 물들인 장지를 묶어내 당대 명필이었던 석봉 한호체를 쓴 화려한 천자문이다.

 

조선시대 국가의 서적 등을 보관, 관리했던 장서각(藏書閣)에 유일하게 전해지는 필사본이다.(2017110일 서울신문 기사 '조선 왕실은 왜 알록달록 천자문 만들었을까' 참고)

 

왕실에서 돌잡이를 처음 실시한 임금은 정조이다. 실록에는 정조(正祖)가 아들 이공(李玜; 순조)의 돌에 돌잡이를 하게 한 기록이 있다.

 

이공은 먼저 채색 실을 집고 다음으로는 화살과 악기를 집었다. 선집채선(先執綵線) 차제호시관현(次提弧矢管玄)이라는 원문이 재미 있다. 잡을 집()과 끌어 당길/ 손에 들 제()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잡이는 한문으로 무엇이라 할까? 목적어가 없는 단어여서 보는 입장에서는 난감하지만 만드는 입장은 달랐을까? 때 아니게 돌잡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집()과 제()처럼 집는(잡는) 것을 뜻하는 병(; 잡을 병)이란 단어를 통해 자연 및 만물을 대하는 시각이 사상이나 주의(主義)를 대하는 시각에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령 18세기 말, 19세기 중반의 학자 유이좌(柳台佐; 1763 - 1837)는 병비염화(秉畀炎火)하듯 즉 벌레를 잡아 불에 태우듯 주자학에 해를 끼치는 해로운 책들은 불에 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조는 해충의 생명까지 소중히 여긴 마음으로 어떤 사람의 학술이 못나고 어긋나도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거나 책을 불태우는 극단적 처방을 삼갔다.

 

정조는 외형상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그로부터 이탈해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친 군주이다.('정조와 정조 이후' 77 페이지) 책을 태우는 곳의 사람들은 결국 사람을 태울 것이라는 시인 하이네의 말이 생각난다.

 

나치의 도시 게르마니아의 축과 맞닿은 운터덴린덴 가로변에 베벨광장이라는 곳이 있다. 꽤 넓지만 모두 비워져 있는 이곳의 한쪽에 사방 1m 남짓한 유리가 바닥에 놓여져 있고 그 안에 백색의 비어 있는 서가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1933년 괴벨스의 충동을 받은 소년 나치대원들이 유태계 지식인들의 책 2만권을 불태운 것을 기념하는 설치물이다.

 

프로이트, 레마르크, 하이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등의 책들이 더러운 정신의 소산으로 지목당해 화형에 처해진 것인데 형체가 없어 소박하기 그지 없지만 대단히 큰 울림을 주는 이 기념비 앞에는 이것은 서주일 뿐이다. 책을 태우는 자들은 결국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 하나가 동판 위에 새겨져 바닥에 놓여있다.(2015114일 경향신문 수록 승효상 글 책을 태우는 자는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발췌, 일부 수정)

 

'정조와 정조 이후'에 대해 말해야겠다. 이 책은 정조의 공과를 냉철히 분석한 책이다. 비판하는 사람이든 지지하는 사람이든 공히 불편할 책이다. 언급했듯 정조는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였지만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한 외형과 달리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이탈하며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친 군주인가 하면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한 군주이다.(‘정조와 정조 이후’ 77 페이지)

 

, 정조 시대 자체가 미스테리이다. 그 시대는 실학이 만개한 시대인 동시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가 성리학이 집대성된 시기이기도 하다.(‘정조와 정조 이후’ 62 페이지) 정조는 주자학을 준신(遵信; 그대로 좇아서 믿는 것)하지 않았다.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고민할 군주가 정조이다.

 

다만 비판이든 지지든 역사와 소설의 경계를 오가는 접근법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고 싶다. 또한 '정조와 정조 이후'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것과 별개로 나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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