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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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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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恭讓王)은 공손하게 임금의 자리를 양위(讓位)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조선의 경우 세종, 성종, 단종, 정조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임금들의 이름을 묘호(廟號)라 하는데 이는 부묘(祔廟: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와 함께 부여되는 이름이다.

당상관, 봉상시(奉常寺),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등이 의논해 결정한다.

고려의 경우는 어땠을까? 지난 번 ‘조선 건국과 정도전’ 강의에서 조선의 국가 사당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 신당은 있고, 조선의 틀을 세운 정도전은 종묘 공신당(功臣堂)에서 배제된 정치적 의미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예정 종료 시간 전에 자리를 뜬 강사 때문에 아쉬움이 컸었다.

어떻든 강사가 공양의 의미를 말하자 수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사는 약간은 냉소적인 뉘앙스로 말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공양이란 의미는 모욕(侮辱)이다. 공양왕이라는 묘호를 부여한 사람은 조선 태종이다. 태종이 부친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에 대해 행한 모욕도 악명 높다.

부친 사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짓는 것을 허락했고 1409년에는 능을 양주 남사아리(현 정릉)로 옮겼다.(정릉이 조성된 것은 1397년이다.)

태종은 태조와 친모 신의왕후 한씨만 종묘에 모셨고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공양왕의 능호(陵號)는 고릉(高陵)으로 위치는 고양시 원당읍이다.(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있다. 삼척시 근덕면의 공양왕릉은 공양왕이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시의 것은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위키피디아)

10월 25일은 매년 열리는 공양왕릉제의 날이었다. 이 제(祭)에서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영산재(靈山齋) 일부가 거행된다.

제(祭)와 재(齋)의 차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왕릉제에서 영산재가 열리는 것 즉 제(祭)라는 이름을 단 행사에서 재(齋)가 열리는 것은 혼란스럽다.

제는 영령이 와서 제사 음식들을 흠향(歆饗)하라는 뜻이고 재(齋)는 망자의 명복을 빌며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비는 것 즉 다른 곳으로 가기를 비는 것이다.

이성계가 공양왕 재위시 그를 통해 실시한 정책 중 배불숭유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살아서 불교 배척 정책의 대리자가 되었던 임금이 공양왕이다.

그런데 공양왕은 사후에 불교 문화재인 영산재가 자신의 능에서 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니 혼란스럽지 않을까? 공양왕이 불교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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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절과 궁궐의 공통점에 관심이 많다. 단청(丹靑), 닫집, 청기와 등은 사찰과 궁궐에서 공통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당연히 차이점도 있을 것이다. 사찰과 궁궐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온 글자가 사(寺)라는 글자이다. 이 글자는 사찰을 의미하는가 하면 봉상시(奉常寺)에서 보듯 관청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청을 의미할 때 발음은 사가 아닌 시이다.

가령 시인(寺人)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임금을 곁에서 모시고 후궁(後宮)의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의미한다. 물론 널리 쓰이던 단어는 아닌 듯 하다.

2. 최근 아름다운 풍경이 불교를 망치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이 말씀을 하신 스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때로 '아름다운 풍경'이 속박이 되고 함정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스님은 끊이지 않는 종단 내부 추문과 수려하고 정갈한 산사라는 두 개의 풍경이 낯설다는 말씀을 하셨다.

세인(世人)들이 아름다운 사찰 풍경을 보며 종단의 추문을 잊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을 두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시(詩)를 쓰는 마음으로 제사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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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그림으로 여겨진다. 오래 전 읽은 민꽃 소리의 작가 유익서 님의 고래 그림비()’를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나와 인연이 깊은 그림으로 여기는가? 내가 클로즈업해 본 것은 아니 내게 문화유산 수업 시간에 클로즈업된 채 과제로 다가온 그림은 피리 부는 사람을 그린 부분이다.

 

나는 전원(田園)의 평화를 상징함은 물론 전쟁 및 사냥을 알리는 악기로 쓰이는 호른을 이야기하며 그 장면은 사냥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관악기를 부는 장면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당시 나는 모차르트 호른 콘체르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1악장 도입부 등을, 호른이 주요하게 활용되는 곡으로 설명하는 군더더기를 붙였었다.

 

고래 그림비의 주인공인 서른셋의 풍은 생의 한고비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장소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박물관을 택한다.

 

고고학을 전공한 풍은 책을 벗어나 책과는 다른 답을 생각하려고 몸부림을 쳐온 사람이다.

 

그는 책 속의 정답을 부정한 탓에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고 풍은 책에 실려 있는 답만을 요구하는 세상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풍은 반구대 암각화를 고래와 짐승을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빌며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여기는 기존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단이라면 기구(祈求)를 들어주는 해나 하느님이나 달, 조상 등을 그렸어야지 잡고 싶은 대상물을 그리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풍의 입장이다.

 

풍은 다르게 해석한다. 힘이 약하고 영민하지 못해 먹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에서 뒤처진 한 신석기인이 고래와의 싸움에서 이긴 기록을 바위에 새긴 것이고 우두머리의 눈에 들어 그림의 대가로 꼬리 부분의 고기를 배당받았다는 것이다.

 

생의 한고비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장소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박물관을 택했다는 말은 더 이상 고고학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 다 막혀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새롭게 보려는 풍의 노력을 나는 지지한다.

 

얼치기이지만 나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새로운 해석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이것이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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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 설명서에서 만난 바 있는 헤세를 조울증 책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 언급한 주역 설명서는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소개했는데 상론(詳論)에는 헤세가 표현한 유리알 유희의 저술 동기를 소개한 이런 글이 있다.

 

“..흐르는 것 가운데 있는 확고부동한 것을 표현하는, 이어져 내려오는 것과 정신적인 삶 자체의 지속적인 일관성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다시 구체화시키자는 것이었다..”(맹난자 지음 주역에게 길을 묻다’ 256 페이지)

 

()이란 쉽다는 뜻 외에 변화와 불변을 함께 의미한다. 불변(하는 것)이란 법칙성즉 변화를 지배하는 이치(理致)나 이법(理法)을 의미한다. 현상 자체는 쉼 없이 변화하지만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성은 변하지 않는다.(이정우 지음 접힘과 펼쳐짐’ 269, 270 페이지)

 

이상한 것은 조울증 설명서에서 헤세가 우울증 환자였다는 말로 설명되고 있는 점이다. 헤세는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작가로 시, 음악, 그림 등으로 고통을 이겨내려고 했다.(박원명 외 조울병으로의 여행’ 120 페이지)

 

지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읽고 있다. 헤세가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쓴 것이라 해도 그렇지 않다 해도 모두 가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프란치스코)를 높이 기렸던 예술가들에게 그는 구원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헤세의 결어(結語)가 눈에 띈다.

 

생각해 보니(!) 가을이다. 우울감을 느끼기 쉽고 풍요롭기도 한 모순의 계절 가을을 즐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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