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그림으로 여겨진다. 오래 전 읽은 ‘민꽃 소리’의 작가 유익서 님의 ‘고래 그림비(碑)’를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나와 인연이 깊은 그림으로 여기는가? 내가 클로즈업해 본 것은 아니 내게 문화유산 수업 시간에 클로즈업된 채 과제로 다가온 그림은 피리 부는 사람을 그린 부분이다.
나는 전원(田園)의 평화를 상징함은 물론 전쟁 및 사냥을 알리는 악기로 쓰이는 호른을 이야기하며 그 장면은 사냥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관악기를 부는 장면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당시 나는 모차르트 호른 콘체르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도입부 등을, 호른이 주요하게 활용되는 곡으로 설명하는 군더더기를 붙였었다.
‘고래 그림비’의 주인공인 서른셋의 풍은 생의 한고비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장소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박물관을 택한다.
고고학을 전공한 풍은 책을 벗어나 책과는 다른 답을 생각하려고 몸부림을 쳐온 사람이다.
그는 책 속의 정답을 부정한 탓에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고 풍은 책에 실려 있는 답만을 요구하는 세상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풍은 반구대 암각화를 고래와 짐승을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빌며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여기는 기존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단이라면 기구(祈求)를 들어주는 해나 하느님이나 달, 조상 등을 그렸어야지 잡고 싶은 대상물을 그리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풍의 입장이다.
풍은 다르게 해석한다. 힘이 약하고 영민하지 못해 먹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에서 뒤처진 한 신석기인이 고래와의 싸움에서 이긴 기록을 바위에 새긴 것이고 우두머리의 눈에 들어 그림의 대가로 꼬리 부분의 고기를 배당받았다는 것이다.
생의 한고비 마지막 종지부를 찍을 장소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박물관을 택했다는 말은 더 이상 고고학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 다 막혀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새롭게 보려는 풍의 노력을 나는 지지한다.
얼치기이지만 나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새로운 해석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 이것이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