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恭讓王)은 공손하게 임금의 자리를 양위(讓位)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조선의 경우 세종, 성종, 단종, 정조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임금들의 이름을 묘호(廟號)라 하는데 이는 부묘(祔廟: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와 함께 부여되는 이름이다.
당상관, 봉상시(奉常寺),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등이 의논해 결정한다.
고려의 경우는 어땠을까? 지난 번 ‘조선 건국과 정도전’ 강의에서 조선의 국가 사당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 신당은 있고, 조선의 틀을 세운 정도전은 종묘 공신당(功臣堂)에서 배제된 정치적 의미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예정 종료 시간 전에 자리를 뜬 강사 때문에 아쉬움이 컸었다.
어떻든 강사가 공양의 의미를 말하자 수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사는 약간은 냉소적인 뉘앙스로 말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공양이란 의미는 모욕(侮辱)이다. 공양왕이라는 묘호를 부여한 사람은 조선 태종이다. 태종이 부친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에 대해 행한 모욕도 악명 높다.
부친 사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짓는 것을 허락했고 1409년에는 능을 양주 남사아리(현 정릉)로 옮겼다.(정릉이 조성된 것은 1397년이다.)
태종은 태조와 친모 신의왕후 한씨만 종묘에 모셨고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공양왕의 능호(陵號)는 고릉(高陵)으로 위치는 고양시 원당읍이다.(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도 있다. 삼척시 근덕면의 공양왕릉은 공양왕이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시의 것은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위키피디아)
10월 25일은 매년 열리는 공양왕릉제의 날이었다. 이 제(祭)에서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영산재(靈山齋) 일부가 거행된다.
제(祭)와 재(齋)의 차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왕릉제에서 영산재가 열리는 것 즉 제(祭)라는 이름을 단 행사에서 재(齋)가 열리는 것은 혼란스럽다.
제는 영령이 와서 제사 음식들을 흠향(歆饗)하라는 뜻이고 재(齋)는 망자의 명복을 빌며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비는 것 즉 다른 곳으로 가기를 비는 것이다.
이성계가 공양왕 재위시 그를 통해 실시한 정책 중 배불숭유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살아서 불교 배척 정책의 대리자가 되었던 임금이 공양왕이다.
그런데 공양왕은 사후에 불교 문화재인 영산재가 자신의 능에서 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니 혼란스럽지 않을까? 공양왕이 불교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