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산책이 끝나면 문장에서는 종종 쓸모없는 단어들이 제거되었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났던 문장과 이전에 써놓았던 문장을 비교해보면 나는 이따금 만족스러운 생략과 압축 같은, 일종의 청소가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레진 드탕벨이 인용한 소설가 쥘리앙 그라크의 말.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 100 페이지)

 

<고리키도 체호프와 톨스토이에게서 문장이 거칠다는 비평을 받고 나서는 다듬어 쓰기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였다. 그래서 그의 친구가 "그렇게 자꾸 고치고 줄이다가는 작품이 어떤 사람이 태어났다, 사랑했다, 혼인했다, 죽었다의 4마디만 남지 않겠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고리끼의 다듬어 쓰기는 끝이 없을 정도였다... 동서양의 문호라 일컫는 사람들이 명문 명작품을 낳을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다듬어 쓰기라는 갈고 닦는 작업이 밑받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서정수 지음 '문장력 향상의 길잡이' 470 페이지)

 

<..내가 건네준 원고를 대충 훑어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는 매우 흥미로운 듯하나 너무 길게 썼으니 한 반쯤으로 원고를 줄일 수 없겠느냐고 물으면서 왜 그렇게 길게 썼느냐고 나무라듯이 말했다. "짧게 쓸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서요." 하고 내가 빈정대듯이 대답했다. ", 파스칼이 한 말이군요!" 하고 노인이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기 소개를 했다. 그가 다름아닌 그 유명한 조제 코르티씨(출판인)였다.>(김화영 지음 '바람을 담는 집' 185 페이지)

 

산책도 하고 긴 우회로를 거쳐 짧게 쓰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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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이 마지막 연금술사로 불린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접한 것은 20년 쯤 전이다. 당시는 그 말이 누구의 것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었다. 답은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이다. 최근 한국의 모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가 경제지 기고를 통해 마르크스도 케인즈도 없는 한국 경제학을 우려하는 글을 발표했다.

 

수학 방정식에 갇힌 대학 교육이란 부제를 가진 글이다. 지난 2011년 데이비드 오렐의 경제학 혁명에서 이런 글들을 읽은 기억이 난다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부정확한 생각을 미분학(微分學)의 언어로 가장하는 기발한 습관을 개발했다.”(수학자 노버트 위너),

 

그들은 이 내용(물리학자들의 작업을 수학화 하려는 사회과학자들의 작업)이 다 틀렸으며 단지 사람들을 겁주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이런 지적들은 대부분의 경제학 수업은 경제학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고 고급 수학을 이용해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견해와도 공명한다.

 

케인즈가 어떤 배경에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경제학을 오로지 수식으로만 푸는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학자의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경제학 연구의 근본적인 철학 및 역사적 원칙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결론이다.

 

열흘 전 나는 한 경제학 전공자에게 경제학이 엄밀 과학이냐는 물음을 던졌다.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 궁금하지 않는가그는 내가 던진 그런 근본적인 또는 관념적인 질문을 처음 접했는지 미분(微分)이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그쳤다.

 

케인즈가 어떤 관점(*)에서 뉴턴을 마지막 연금술사라 불렀을까를 생각해보기 전에 그의 미분 발언의 배경을 궁리해보고 싶다.

 

* 뉴턴은 연금술에 관심을 보인 신비주의자이다. 그가 만유인력을 주장한 것은 그런 신비적 관점에 따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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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사진을 올린 페친을 보며..

 

내 생각을 대변해준 글들의 변천사(1에서 2, 2에서 3으로)를 말하고자 한다.

 

1.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요리사가 아니어도 부엌에서 인생이 간다. 새와 짐승들은 요리를 하지 않고도 잘 산다.

 

그들처럼 풀이나 날고기를 씹어 삼킬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그러지 않으려면 평생 부엌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생선 내장을 훑어내야 하다니 별로 나은 선택도 아니다.

 

인간은 특별한 동물이기 때문에 요리를 먹어야 한다면 먹는 일이나 사는 일, 둘 중의 하나는 잘못되었다." - 오수연 장편 소설 '부엌' 첫 문장.

 

2.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오랫동안 음식은 인간 사회의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해 왔다. 단순히 소비 경험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매우 심오하게 사회적인 경험이었던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준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은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가정 내에서 남성과 여성을 묶어 주고 가정이 더 큰 사회로 공고하게 만들어져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어 인류의 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 사이먼 레이험 지음 '죄라고 부르는 유익한 것들' 95, 96 페이지

 

3. a.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화학비료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토양이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독과 살충제가 아니라 꽃가루 매개자들이다.

 

b.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독성 어린 단일 경작이 아니라 생물 다양성이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대규모 산업농이 아니라 소농, 농사짓는 가정, 텃밭 일꾼들이다.

 

c.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종자 독재가 아니라 종자 독립이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화이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여성이다. - 환경 사상가,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 지음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

 

(세계 사회를 통틀어 식량,영양, 음식물의 재배와 공급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은 여성들..)

 

1에서 2를 거쳐 3으로 내 인식은 변화해 왔다. 12 사이에는 오랜 단절이 있는 만큼 변화는 점진적이었다.

 

3c처럼 여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지 오래이지만 반다나 시바처럼 총체적이고 대안적인 생각을 만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생선국에 풀죽은 쑥갓을 건져내며/ 눈가에 차오른 술을 거둬내며 본다 무심하게 건너가버린 시절/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허수경 시인의 '무심한 구름' 마지막 부분)이란 시를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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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기도, 독경(讀經) 등의 의례(儀禮: officium) 차원의 종교 의무에 비유된다면 책을 찾는 것은 무엇에 비유될까? 신간 검색을 넘어 출간 예정 도서를 검색하며 아침에 내가 한 생각이다.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하루에도 수십 종씩 쏟아져 나오는 탐나는 책들을 보면 정말 해일(海溢) 앞에 선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읽기가 아니라 쓰기가 의무적 종교 의례가 아닐까? 17세기의 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는 폴리왹트라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덜어낸다.“는 말을 한 바 있다.

 

말하기 = 쓰기라는 공식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말하기와 쓰기는 완전히 같지 않다. ‘프랑스의 창조적 독서 치료사레진 드탕벨은 서양 중세 수도원에 있었던 책 사본(寫本) 제작소인 스크립토륨(scriptorium)을 이야기한다.

 

이곳에서는 동물 가죽의 표면에 글을 새겼다. 가죽을 자르고 무두질(생가죽, 실 따위를 매만져서 부드럽게 만드는 일)해서 그 위에 매우 뾰족한 도구로 생채기를 입혔다. 필경사(筆耕士)들은 양피지(羊皮紙: vellum)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경석과 긁어내는 도구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 옛날의 글쓰기는 항상 육체적으로 고된 시련과 훈련을 연상시켰다. 필경이란 붓으로 농사를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직업으로 글이나 글씨를 쓰는 일을 뜻한다. 하지만 쓰기란 농사 만큼 힘든 일이란 말도 가능하다.

 

오늘날 글쓰기는 더 이상 동물 가죽을 괴롭히며 글자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책장(冊張) 표면 위에 텍스트를 문신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글자가 잘 기억되지 않는다...글쓰기는 자판으로 처리되고 액정 화면에 새겨진다. 컴퓨터 모니터로 하는 오늘날의 독서는 미지근한 목욕과 같다.“...

 

드탕벨은 필사(筆寫)를 추천한다. ”근육의 향연이 없으면 정신적인 것도 없다.” 니체는 당신이 걷는 동안 떠오른 생각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 나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는 글(김정아 시인 지음 나의 부처님 공부수록)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그리고 오직 걷고 있는 자만이 나와 인연이 있다.(Nur wer sich wandert, bleibt mit mir verwandt)"는 니체의 말(김영민 지음 '보행' 296 페이지)도 조금 이해가 된다. 밖으로 나가 소박한 근육의 향연이나마 마음껏 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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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학동의 김수영 문학관을 찾을 수 있을까? 오후 방학동을 찾을 일이 있는데 결과에 따라 문학관을 갈 생각이다.

방학동에는 연산군 묘도 있다. 여유가 있으면 김수영 문학관과 연산군 묘를 함께 찾고 그렇지 않으면 두 곳 모두 다음을 기약하고 방문을 미룰 생각이다.

연산(燕山)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시집을 낸 임금이다. 이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관련 자료를 찾다가 시인이기도 했던 기형도(1960 -1989) 기자가 연산군 시집 출간에 대해 쓴 기사를 우연히 접했다.

타계 2년 전 중앙일보에 쓴 기사다. 그런데 기사에는 1987년 유명 역사극 작가인 신봉승씨가 ‘연산군시집‘이란 제목으로 연산군 시집을 출간한 것으로 나오는데 검색 결과는 2000년 다른 출판사에서 ‘시인 연산군‘이란 제목으로 같은 저자에 의해 책이 출간된 것으로 나온다.

˝연산군이 무자비한 폭군으로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또한 탁월한 문재를 지닌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기형도 기자가 쓴 기사의 첫줄이다.

연산군이 그나마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어느 정도 제어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같은 폭력과 광기의 존재가 시를 썼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날이 흐리다. 내 마음을 닮은 듯 하다. ‘좋은 하루!‘란 말을 가만히 읊조려본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비가 2‘ 중에서)란 기형도 시인의 시구 한 소절을 떠올리게 된다. 동락(同樂)이거나 독락(獨樂)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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