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기도, 독경(讀經) 등의 의례(儀禮: officium) 차원의 종교 의무에 비유된다면 책을 찾는 것은 무엇에 비유될까? 신간 검색을 넘어 출간 예정 도서를 검색하며 아침에 내가 한 생각이다.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하루에도 수십 종씩 쏟아져 나오는 탐나는 책들을 보면 정말 해일(海溢) 앞에 선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읽기가 아니라 쓰기가 의무적 종교 의례가 아닐까? 17세기의 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는 ‘폴리왹트’라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덜어낸다.“는 말을 한 바 있다.
‘말하기 = 쓰기’라는 공식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말하기와 쓰기는 완전히 같지 않다. ‘프랑스의 창조적 독서 치료사‘ 레진 드탕벨은 서양 중세 수도원에 있었던 책 사본(寫本) 제작소인 스크립토륨(scriptorium)을 이야기한다.
이곳에서는 동물 가죽의 표면에 글을 새겼다. 가죽을 자르고 무두질(생가죽, 실 따위를 매만져서 부드럽게 만드는 일)해서 그 위에 매우 뾰족한 도구로 생채기를 입혔다. 필경사(筆耕士)들은 양피지(羊皮紙: vellum)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경석과 긁어내는 도구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 옛날의 글쓰기는 항상 육체적으로 고된 시련과 훈련을 연상시켰다. 필경이란 붓으로 농사를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직업으로 글이나 글씨를 쓰는 일을 뜻한다. 하지만 쓰기란 농사 만큼 힘든 일이란 말도 가능하다.
”오늘날 글쓰기는 더 이상 동물 가죽을 괴롭히며 글자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책장(冊張) 표면 위에 텍스트를 문신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글자가 잘 기억되지 않는다...글쓰기는 자판으로 처리되고 액정 화면에 새겨진다. 컴퓨터 모니터로 하는 오늘날의 독서는 미지근한 목욕과 같다.“...
드탕벨은 필사(筆寫)를 추천한다. ”근육의 향연이 없으면 정신적인 것도 없다.” 니체는 “당신이 걷는 동안 떠오른 생각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 나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는 글(김정아 시인 지음 ’나의 부처님 공부‘ 수록)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그리고 “오직 걷고 있는 자만이 나와 인연이 있다.(Nur wer sich wandert, bleibt mit mir verwandt)"는 니체의 말(김영민 지음 '보행' 296 페이지)도 조금 이해가 된다. 밖으로 나가 소박한 근육의 향연이나마 마음껏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