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5대 임금인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보좌하는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은 모두 미소를 띄고 있다.

아랫 사람들에게 온화했던 문종의 인품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며 사자(死者)의 위계질서인 오른쪽을 높은 쪽으로 간주하는 원칙을 유일하게 어기고 소혜왕후 한씨가 오른쪽(보는 우리 기준으로는 왼쪽)에, 남편인 의경세자가 왼쪽(보는 우리 기준으로는 오른쪽)에 위치한 경릉(敬陵)을 생각하게 된다.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아들이 성종이다.

이런 파격은 소혜왕후의 정치적 비중을 반영한다. 물론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는 스무 살에 서거(逝去)했기에 영향력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다.

현릉과 경릉이 생전의 실상을 반영한 것과 달리 단종의 장릉(莊陵)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莊)이란 글자는 ‘씩씩할 장‘자이다. 단종은 불행과 비운의 임금이었다. 씩씩한 임금이 될 수 없었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는 이생진 시인의 ‘섬 묘지‘처럼 살아서 슬프고 애통했던 단종의 원한을 달래려고 씩씩할 장자를 써서 능호를 정한 것인가?

물론 이런 비현실은 단종 능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정(靖)은 ‘편안할 정‘자인데 이름과 달리 정릉은 침수 피해는 물론 왜적에 의해 도굴당하는 겹수난의 능이 되었다.

물론 희망은 어긋날 수도 있다. 아니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정릉이 편안한 능이 되지 못한 것을 문제삼을 수는 없다. 조선은 정치적 실리를, 풍수지리를 내세워 실현시킨 경우가 많았다.

어긋남은 불가피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풍수적 입장만을 고려해 설정한 능도 불운과 횡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풍수는 당시의 믿음을 반영할 뿐이다.

조선은 전 시기에 걸쳐 천릉(遷陵)이 행해졌다. 이는 조선 이전에는 없었고 중국에서도 거의 없었던 조선만의 현상이다. 조선 이전에는 천릉이란 용어 자체가 없었다.(신병주 지음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참고)

조선은 그만큼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했다고 볼 수 있고 묘자리를 후세의 안녕 및 복과 직결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자식 교육을 위해 위장전입까지 해가며 학교를 옮기는 것은 조선의 천능과 맥이 닿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떻든 단종의 장릉은 단종의 생전의 정보를 반영하는 이름으로 설정한 것인데 삶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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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 외롭고孤 높고高 쓸쓸한寒
몽우 조셉킴(Joseph Kim)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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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부터 현재까지 1900, 1910, 1920년대에 태어난 문인들에 대한 글(문인들의 글이 아닌)을 많이 읽고 있다. 정지용, 김기림(이상 1900년대), 윤동주, 백석, 한무숙(이상 1910년대), 김수영, 김춘수(이상 1920년대)..

 

백석의 시는 고향인 평북 정주(定州)의 풍속을 재현한 시들,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여 유랑하던 시기를 그린 시들, 해방 이후 북한에 정착해 살며 쓴 작품들로 나눌 수 있다. 문인들에 대한 글 가운데 평전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백석 평전을 읽는다.

 

저자 몽우 조셉 킴(夢友 Joseph Kim: 김영진)은 화가이다. 1부 백석 평전을 위한 서정적 서설, 2부 화가가 쓴 시인 백석 평전 - 외롭고 높고 쓸쓸한, 3부 백석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4부 백석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5부 백석이 사랑한 세계 등 다섯 부로 이루어진 평전에서 그림과 글을 적절히 안배해 드라마틱하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견해를 드러내보인 책이 백성 평전이다.

 

저자는 인생에서나 화가로서의 삶에서나 남다른 모습으로 힘든 시간을 살아왔다. 저자가 백석 시를 처음 본 것은 2005(저자 나이 30세 때)이었다. 백석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저자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과 같은 유명 화가들이 백석 시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어릴 적 왼손 잡이 화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망치로 왼손을 내려쳐 못 쓰게 만들고 대신 오른손 잡이 화가가 되었다. 그런 저자는 백석 시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백석 시를 보면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없어졌다고 하는 저자. 그는 백석 시를 읽으며 한국 말이 아름다운지를 처음 알았다. 저자는 백혈병으로 고생도 했다. 얼마 못 산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로 저자는 백석 시를 만났다.

 

그의 시를 보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잊고 그림에 빠졌다. 저자는 그 이후 5년이 더 지난 현재(책이 나왔을 무렵)까지 병원 진단과 달리 잘 살고 있다. 저자는 백석 시를 읽으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저자의 아버지 김정대씨는 가수 배호를 초기에 키우고 배호가 부른 수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한 분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백석 시를 사랑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저자는 우리 나라 주요 가요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그 곡들이 백석 시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이라 말한다. 저자의 책을 통해 우리는 백석 시어들이 이상한(어처구니 없는) 기준으로 군사 정부로부터 금지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의 아버지에 의하면 백석은 정치적으로 완전한 중립을 유지하려고 애쓴 시인이다. 시인 백석은 고독과 외로움과 슬픔과 서글픔을 겪었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한정결하고 순결한 존재로 자신의 미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석 시인은 자신을 푸른 갈매나무로 묘사했다. 저자는 슬픔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도 하고 성공을 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슬픔이 오면 하늘이 나를 가장 귀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성공의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면서 슬픔 속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백석 시를 읽으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행복해지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일을 할 때 결과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과정에 올인하라고 말한다. 백석은 시 낭송을 할 때 노래하듯 했다고 한다. 높낮이를 두고 리듬에 맞추어서.

 

백석은 세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제자 강소천(姜小泉) 아동문학가에게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말을 후세에 이어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길이라 말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로 시작되는 스승의 은혜가 강소천 님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백석을 염두에 두고 지은 작품이다. 백석은 19(1930)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모()와 아들이란 소설 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윤동주, 김기림, 노천명, 신경림 등이 백석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백석은 고고한 시인이자 민족 정신을 이어받은 오산학교 출신이고 고당 조만식 선생의 제자이다. 그는 독립운동가들 및 여러 세력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방(妓房)에 출입했다. 백석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에는 33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이는 3.1 독립운동에 서명한 민족 대표의 수와 같다. 의도적으로 33편의 시를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백석의 제자 강소천도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호박꽃 초롱33편으로 구성했다. 백석의 시 멧새 소리에는 멧새가 나오지 않고 명태가 나오는 바닷가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멧새가 바닷가를 돌면서 본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백석은 백석(白石), 백석(白奭), 백정(白汀) 등의 필명을 썼다.(물가 정자이다.) 백정은 하얀 달이 물가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백석과 김영한(자야라는 이름으로 유명한)의 사랑은 유명하다. 자야(子夜)는 백석이 김영한 여사에게 지어준 애칭이다.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유래했다. 자야오가는 홀로 된 여인이 남자를 그리워 하는 노래이다.

 

저자는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을 존경해 길상사를 시주한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백정의 ㅂ ㅈ과 법정의 ㅂ ㅈ의 일치 때문에라고. 저자는 백정(白汀)을 흰 강물에 우뚝 쌓이는 모래로, 법정(法頂)을 물을 건너는 것을 해태가 지키며 우뚝 서 있는 것으로 풀이한다. 백정과 법정의 공통 글자는 고무래 정()이다.

 

권번(券番) 출신의 기녀였던 김영한 여사는 궁녀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발음오행, 수리오행에 능통했고 운명학과 한학 등에도 능통했다. 백석은 오산학교 선배인 김소월(1902 1934)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영어에 소질을 보였다.

 

백석이란 이름은 흰 옷을 입은 한민족이 돌과 같이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백석은 일본에서 유학했는데 거주지는 동경 길상사(吉祥寺) 1875 번지이다. 자야가 이 이름을 성북동의 실상사로 쓴 것이다.

 

김기림(1908 - ?) 시인 이야기도 중요하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시인이었다. 그는 정지용(1902 1950)을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칭한 시인이다. 김기림은 토속적인 시를 쓴 백석의 시도 좋아했다. 절제와 묘사의 멋, 음률과 감정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백석은 친구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했다.

 

백석이 그리는 가족적 사상은 민족이 겪는 분열과 이별의 아픔에서 시작한다. 백석의 시에는 헤어짐 후의 눈물과 그리움을 그린 시가 많으며 고향을 떠나 유랑하며 느낀 고향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시들이 많다. 소월(素月)은 흰 달이란 의미이고 백석(白石)은 하얀 돌이란 의미이다.

 

저자는 소월은 다소 자신의 슬픔의 감정에 머무르려 했고 백석은 자신의 슬픔과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 독특한 관점이 있다고 말한다. 백석은 미르스키의 논문을 번역한 것을 계기로 소설가에서 시인으로 변신했다.(백석의 출발은 소설가로서였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의 영향을 받았다. 윤동주의 병원은 백석의 시기의 바다의 영향을 받았다. 이중섭(1916 1956)은 백석의 시를 좋아하여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시인은 어디든 구애받지 않고 시를 쓸 수 있지만 화가는 여러 도구가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중섭이 생각해낸 것이 은지화이다. 백석은 캄캄한 밤에 내리는 비를 캄캄한 비라는 함축어로 표현했다. 백석은 모국어를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다. 백석은 인간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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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휴지(休止) 없이 곧바로 다음 악장으로 연결되는 곡들이 있다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그렇고, 슈만 첼로 협주곡 가운데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그렇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서우석 교수의 음악과 현상에 나오는 다음의 글 때문이다.

 

비발디의 사계는 처음부터 고양(高揚)된 감정에서 출발해 버린다. 그런가 하면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6번 교향곡)’의 시작은 우리가 이미 선율의 중간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베토벤의 합창 교향곡(9번 교향곡)’은 시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서주(序奏)라고도 할 수 없는 느낌으로 시작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은 천천히 그리고 장중하게 그 시작을 오랫 동안 알린다...”(164 페이지)

 

이 논의에 맞춰 휴지 없이 다음 악장으로 이어지는 곡들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곡들은 기다림 또는 쉼의 기쁨을 주지 않는 대신 긴박(緊迫)한 일정을 수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정도(定度)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의 경우보다 슈만 첼로 협주곡이 더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갈 때 약간의 늦춤이 있지만 슈만 첼로 협주곡은 그렇지 않다.

 

이런(중간 휴지 없이 바로 다음 악장으로 연결되는) 곡들 가운데 베토벤 현악 4중주 7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어떻든 나는 멈추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는 스스로 다짐하고 싶을 때 이런 곡들을 듣는다.

 

슈만의 다섯 개의 민요 소품이 어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오랜 만에 슈만 만찬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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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3
신병주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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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천릉(遷陵)이 빈번했다. 풍수상의 이유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상황이 더 큰 원인이었다. 왕실의 광(; 뫼 구덩이)의 깊이는 10(3미터), 일반 사대부의 경우는 5 - 6(1.5 1.8미터)이다.

 

태조의 능(건원릉)은 개성의 신의왕후나 정릉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했다. 개성은 새 왕조 조선의 첫 왕이 묻힐 곳으로는 부적합했고 신덕왕후 옆에 능이 조성되는 것은 태종에 의해 거부되었다. 건원릉이 구리에 조성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태조의 무덤에는 석실(石室)이 만들어졌다. 현실(玄室; 주검이 안치된 무덤 속 방)을 석실로 할지 회격묘(灰隔墓)로 할지는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태종이 세자를 종묘에 보내 동전을 던지게 했다. 세조는 석실이 아닌 회격묘로 왕릉을 조성할 것을 유언했다.

 

신의왕후는 처음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가졌었다. 후에 신의왕후로 호칭이 변경된 것이다. 조선 초기 왕릉을 특징짓는 기념비적 조형물은 신도비였다. 조선 초기 왕릉에는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인 현, 정릉에 정릉사를 세운 전례에 따라 능침사찰을 조성했다.

 

태종은 유교 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능침에 사찰을 두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인식했다. 신의왕후의 제릉(齊陵: 개성 판문군 지동)은 여말, 선초 왕릉의 양식으로서 건원릉을 조성할 때 선례가 되었으며 현존 조선 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오늘날 조선 왕릉의 전범을 확립하는 데 획기적인 왕릉으로 평가받고 있다.

 

능침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세종은 워낙 효심이 깊은 왕으로 자신이 죽으면 부모 능 가까이 묻어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의 헌릉(獻陵: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능 자리를 정해 놓았다. 수릉(壽陵)을 설정한 것이다. 수릉은 임금이 죽기 전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말한다.

 

세종 당대에도 세종의 무덤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급기야 물길이 흘러나오는 등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종 때 여주로 옮겼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상하 질서는 좌상우하이고 사자(死者)의 경우 우상좌하이다.(좌우는 당사자가 기준이고, 동서는 보는 사람이 기준이다.)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 자리한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미소를 띄고 있다. 아랫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했다는 문종 시대의 정치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하다. 현릉부터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왕의 치적은 국사(國史)에 실리기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따라서이다.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를 옮긴 후에도 비를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사자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단종의 장릉(莊陵)은 한양의 궁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능이다. 우상좌하의 원칙을 어기고 남편의 오른쪽에 조성된 능이 소혜왕후 한씨(성종의 모후, 연산군의 할머니)의 능인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의 정치적 비중이 컸음을 반영한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 왕후로 문정왕후(중종의 두번째 비)를 빼놓을 수 없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길 원했다. 그래서 장경왕후(중종의 첫째 비)의 능 옆에 있었던 정릉(靖陵)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으니 성종의 선릉(宣陵) 옆으로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로 기능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작용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 문정왕후는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시 공릉동의 태릉(泰陵)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희릉(禧陵)이었다. 중종은 먼저 승하한 첫번째 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묻혔다. 중종의 능은 처음 희릉으로 불렸으나 대왕이 후비(后妃)의 능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라 하여 정릉으로 명칭 변경했다.

 

문제는 정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문정왕후의 의견을 따라 옮겼는데 그 옆의 희릉은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희릉과 정릉은 같은 영역에 있었다. 중종의 능을 정릉이라 이름하기 전에 희릉이라 했던 것은 두 능이 같은 영역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하마비가 있는 능이 세조의 광릉(光陵)이다. 광릉은 금천교가 없는 능이기도 하다. 천릉(遷陵) 또는 천장(遷葬)은 조선 왕릉만이 가졌던 특수한 현상이다. 천릉이란 용어는 조선시대 이전에 없었고 중국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적 길흉과 함께 추숭(追崇), 복위(復位)와 같 정치적 이유로 천릉이 주로 이루어졌다.

 

왕릉을 조성하기 전 반드시 풍수사(風水師) 또는 상지관(相地官)이 대신과 함께 봉심(奉審; 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소나 묘우를 보살핌)하여 능지의 길흉을 판단한 것은 왕릉 조성에서 풍수가 중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상지; 땅의 모습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

 

조선시대에 왕릉을 조성한 후에는 의궤(儀軌)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전기에 제작한 의궤들은 현재 한 건도 남아 있지 않다. 현존 의궤의 최초의 것은 1600년에 제작한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장례 관련 의궤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릉, 정릉과 더불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노원구 소재의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의 경역도 왜적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강릉과 태릉의 경우 왜적이 도굴을 시도했지만 회격묘인 내부 구조로 인해 도굴 위협에서 벗어났다.

 

천릉(遷陵)은 이장(移葬), 개장(改葬), 개묘(改墓) 등의 용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묘의 이동은 천장(遷葬)이나 이장(移葬)이란 용어로 굳어지고 왕실의 능원에 대해서는 천릉(遷陵), 천봉(遷奉), 천원(遷園)이란 용어가 일반화되었다.(197 페이지)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조가 거행한 사도 세자의 현륭원(顯隆園)으로의 천장, 익종의 수릉(綏陵)의 천릉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천릉 양상이 전대보다 비중이 커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229 페이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은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는 대부분 의궤 기록으로 정리되었고 대부분의 의궤가 현존하고 있다. 왕릉 조성에 관한 역사(役事)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주관하였고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혼전도감(魂殿都監)과 긴밀한 업무 협조를 통해 진행했다. 산릉도감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침 조성을 관장하였던 임시 관서이다.

 

국장도감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국장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당한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했다. 혼전도감은 임금이나 왕비의 국상 중 장사를 마치고 종묘(宗廟)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곳인 혼전의 일을 담당함 기관이다.

 

조선 역사상 왕이 생부와 생모의 무덤을 함께 조성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종이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을 조성한 이래 처음으로 숙종이 부모의 무덤을 모두 조성했다.(230 페이지) 왕이 두 왕비의 무덤을 재위 기간에 조성한 사례는 숙종이 유일하다. 숙종은 세자빈의 신분이었던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가 1718년 승하하자 경기도 양주에 혜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구릉 경역이다.(숙종의 재위 기간은 46년이다.)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는 재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했다. 명성왕후는 정비로서 세자빈, 왕비, 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유일한 왕비이다. 효종대에 세자빈, 현종의 왕비, 아들 숙종이 왕이 된 후 대비가 된 것이다.(235 페이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숭릉(崇陵: 숙종 부모의 능)은 높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고 현재의 동구릉 능역 중 가장 왼쪽 호젓한 곳에 있다. 쌍릉이며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에 팔작지붕을 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며 중국화 바람이 불던 시대에 조성된 능이기에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에서 벗어나 중국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237 페이지)

 

숙종은 재위 시절에 어머니와 2명의 왕비를 잃은 데 이어 세자빈까지 잃은 아픔을 겪었다. 경종의 빈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가 승하한 것이다.(240 페이지)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에는 유언에 따라 예기시경을 넣었다.(264 페이지)

 

1800628일 정조가 오랜 투병 끝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했다. 순조가 7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고 정조의 왕릉인 건릉을 조성하였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으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해졌다. 순조는 재위 기간 중 효명세자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세도정치가 정점을 이루던 철종 대에는 왕과 왕후의 능을 조성하고 천릉하는 일에 대한 첨예한 의논은 보이지 않았으며 대체적으로 왕이나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던 세도정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13 페이지)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격상되면서 왕릉 조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살해된 후 명성왕후의 능은 왕비의 예에 의거해 조성되었지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명성왕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면서 능에도 황후의 위상에 맞는 의례와 양식이 적용되었다.(320 페이지)

 

1910년 조선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조선 왕실에서는 세 차례 왕과 왕비의 장례식이 있었고 왕릉이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에 의해 국가가 없어지고 황실의 격이 낮아졌다. 따라서 국장 대신에 어장(御葬)이라 불렸고 국가가 없어진 관계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못하였다. 이왕직 산하에 몇 개의 주감(主監)을 두어 장례를 주관했다.(325 페이지)

 

왕릉은 유교적 의례와 정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풍수지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사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왕릉은 추존 문제와도 연관된다. 추존은 왕위의 정통성 및 왕권 강화와도 관련되어 많은 이야기거리를 낳았다. ‘조선왕실의 왕릉조성은 조선 왕실의 왕릉들을 왕을 중심으로 한 시대별로 정리한 체계적인 책이다. 내게는 관련 책들을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게 한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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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와 법고와/ 낮은 해거름 사이/ 뒤돌아보면, 천년을 기어 뻘밭을 통과한/ 진흙게 한 마리/ 대웅보전 민흘림 두리기둥을/ 자욱한 범종 소리로 짚어 오르고 있다.”..김명리 시인의 먼 길의 마지막 부분이다. 흘림은 뿌리, 몸통, 머리 등 기둥 부위의 지름에 변화를 주는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민흘림 기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게 마름질한 기법의 기둥이고 배흘림 기둥은 중간 부분을 굵게 하고 위와 아래 부분을 가늘게 마름질한 기법의 기둥이다.

 

두리기둥은 둥근 기둥이다.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란 구절이 있는 조지훈 시인의 봉황수(鳳凰愁)‘란 시가 생각난다.

 

한 블로그에 기둥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예시된 것을 보았다. 이 블로그는 배흘림 기둥의 예로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을, 민흘림 기둥의 예로 논산 쌍계사와 경복궁 경회루의 기둥을, 둥근 기둥인 원주(圓柱)와 모난 기둥인 방주(方柱)로 구성된 직립(直立) 기둥(다듬은 기둥)의 예로 경복궁 교태전 기둥을, 원목을 껍질만 벗겨 자연 그대로 세운 기둥인 도랑주의 예로 충남 서산의 개심사(開心寺) 기둥을 들었다.(직립이라는 말이 맞지만 곧게 다듬은 기둥이라는 의미이고 도랑주는 휘어진 모습을 그대로 세웠다는 의미이다.)

 

흘림은 착시(에 의한 불안한 심리)를 교정 또는 보정하는 기법이다. 기차길 같은 평행선은 먼쪽이 좁아 보이고 가까운 쪽이 넓어 보이지만 기둥은 높은 쪽이 굵어 보인다아래보다 위가 굵으면 불안해 보인다. 이를 교정하는 것이 흘림이다. 귀솟음과 안쏠림도 착시 교정을 위한 방편이다.

 

귀솟음은 기둥을 모두 같은 높이로 하면 건물의 양쪽 끝이 낮게 보이는데 이런 착시를 보정하기 위해 네 귀퉁이의 기둥을 약간 높게 하는 것을 말한다안쏠림은 귀기둥을 곧게 세우면 윗 부분이 밖으로 벌어진 듯한 착시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보정하기 위해 귀기둥을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착시 현상이 심할 경우에만 주로 한다.)

 

문화재보수 기술자 김종남은 귀솟음의 예로 완주 화암사 극락전과 서산 개심사의 대웅전을 들었다반변 종묘(宗廟) 정전(101 미터)처럼 도리칸이 한없이 늘어나는 목구조에서는 귀솟음 기법을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말을 했다.(’한옥 짓는 법‘ 188, 189 페이지)

 

기둥을 알면 한옥 구조의 절반은 안 것이라고 한다우리나라의 기둥에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과학적 원리, 세계의 건축가들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수준 높은 건축 기법이 감추어져 있다.

 

조선의 궁궐 공간 구조와 건축‘(궁궐 지킴이), ’궁궐 건축 양식과 용어’(궁궐 길라잡이)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상기(上記)한 것들을 배우는가궁궐이든 일반 가옥이든 공간 구조나 건축 양식을 모르면 해설에서 그 구조물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만 하게 된다.

 

클래식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내적 구조를 모르기에 작곡가 개인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궁궐 지킴이나 궁궐 길라잡이의 건축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배우든 별 관심이 없다.

 

그냥 가서 들으면 듣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수준이 어떻고..“식의 논의는 불편하다. 프로그램의 수준은 결국 강사 즉 전문가의 수준이다. 전문가는 결국 극복의 대상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 배울 수 있으면 그들에게 배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한국의 재발견이 궁궐 지킴이인지 길라잡이인지, 또는 우리문화숨결이 궁궐 지킴이인지 길라잡이인지 적응이 안 된다.(머리가 나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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