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5대 임금인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을 보좌하는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은 모두 미소를 띄고 있다.

아랫 사람들에게 온화했던 문종의 인품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며 사자(死者)의 위계질서인 오른쪽을 높은 쪽으로 간주하는 원칙을 유일하게 어기고 소혜왕후 한씨가 오른쪽(보는 우리 기준으로는 왼쪽)에, 남편인 의경세자가 왼쪽(보는 우리 기준으로는 오른쪽)에 위치한 경릉(敬陵)을 생각하게 된다.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아들이 성종이다.

이런 파격은 소혜왕후의 정치적 비중을 반영한다. 물론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는 스무 살에 서거(逝去)했기에 영향력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다.

현릉과 경릉이 생전의 실상을 반영한 것과 달리 단종의 장릉(莊陵)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莊)이란 글자는 ‘씩씩할 장‘자이다. 단종은 불행과 비운의 임금이었다. 씩씩한 임금이 될 수 없었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는 이생진 시인의 ‘섬 묘지‘처럼 살아서 슬프고 애통했던 단종의 원한을 달래려고 씩씩할 장자를 써서 능호를 정한 것인가?

물론 이런 비현실은 단종 능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정(靖)은 ‘편안할 정‘자인데 이름과 달리 정릉은 침수 피해는 물론 왜적에 의해 도굴당하는 겹수난의 능이 되었다.

물론 희망은 어긋날 수도 있다. 아니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정릉이 편안한 능이 되지 못한 것을 문제삼을 수는 없다. 조선은 정치적 실리를, 풍수지리를 내세워 실현시킨 경우가 많았다.

어긋남은 불가피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풍수적 입장만을 고려해 설정한 능도 불운과 횡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풍수는 당시의 믿음을 반영할 뿐이다.

조선은 전 시기에 걸쳐 천릉(遷陵)이 행해졌다. 이는 조선 이전에는 없었고 중국에서도 거의 없었던 조선만의 현상이다. 조선 이전에는 천릉이란 용어 자체가 없었다.(신병주 지음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참고)

조선은 그만큼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했다고 볼 수 있고 묘자리를 후세의 안녕 및 복과 직결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자식 교육을 위해 위장전입까지 해가며 학교를 옮기는 것은 조선의 천능과 맥이 닿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떻든 단종의 장릉은 단종의 생전의 정보를 반영하는 이름으로 설정한 것인데 삶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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