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탁본(拓本)과 살청(殺靑)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기에 시름하는 사이 김포 장릉(章陵)에 가기 위해 탄 소요산역 6시 4분 출발 전철은 의정부를 지나고 있다.

덜 깬 머리를 달래기 위해 음악을 들으면서 시를 골랐다.

권현형 시인의 ‘포옹의 방식‘에 실린 시편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생각을 덧붙여야 한다.

‘고통의 탁본‘은 ˝사진은, 슬픈 노래는, 연애는 산 자의 혼을/ 희고 검게 때로는 푸르게 탁본한다˝는 구절이 마음을 붙잡는 시이다.

‘살청, 푸른빛을 얻다‘는 ˝무연하게 깜박이는 흰 빛을 말하는 것이라면/ 부칠 수 없었던 내 뜨거운 문장들도 부디 살청이었길˝이란 구절이 생각을 이끄는 시이다.

탁본(비석, 기물, 기와 등에 새겨진 글씨나 무늬를 종이 위에 떠내는 것)은 탁본이고 살청(대나무를 불에 쬐어 그 푸른 빛을 없애는 것, 사서나 기록이나 서적을 달리 이르는 말)은 살청이다.

대칭적인 탁본과 살청에 대해서는 잠시 못잔 새벽 잠을 보충하고 나면 말할 수 있을까? 장릉을 순례하고 나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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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존대어 시(명칭이 정확한지 모르지만)를 쓰는 이유는 무얼까? 누군가에게 물어보려다가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만 두고 내가 가진 시집들을 찾아보았다.

존대어 시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로 시작하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같은 시를 말한다.

물으려다 그만 두었지만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것은 유종인 시인의 입상(立像)이란 시를 보고서이다.

‘님의 침묵‘을 보고서는 그런 궁금증을 갖지 않았고 유종인 시인의 ‘입상‘을 보고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아, 참 헷갈려도 좋은 다면체(多面體)구나, 요정을/ 버리고 절간으로 돌아든 마음이 그래도 여간 요염하/ 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입상‘의 마지막 부분이다.

요정이란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여사의 대원각을 말하고 절이란 길상사를 말한다. 시인이 말한 입상은 설법전 앞에 서 있는 이채로운 입상을 말한다.

권현형 시인의 ‘포옹의 방식‘에도 그런 시가 하나 있다.˝서울에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 우주 밖의 일인 듯 아득해집니다/ 저는 지금 고대 왕조의 수도에 와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시.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만 그 뒤에/ 가려진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부처는 지워지고 부처 손톱이 자라듯/ 나무가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 뒤에, 뒤에, 우리는 아프게 서 있습니다˝로 끝나는 시.

‘역광‘이란 제목의 시. 그럴 줄 알았으면 지난 해(5월) 용산도서관에서 시 수업을 들을 때 물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사실 나는 내가 들은 강의의 시인이 권현형 시인이란 사실은 알았던 반면(누가 강의하는지도 모르고 수업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묻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내가 그 시인의 시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다.

시집 속에서 낯익은 시들이 몇 편 보여 이름을 확인하니 그 시인이었다. 이 분의 시들 가운데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시들이 많다.

무엇보다 이 분의 시 강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이론을 잘 활용하는 분이다.

내가 가진 ‘포옹의 방식‘ 외의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등 나머지 두 시집도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 시집을 알게 되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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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은 김영민 교수의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20년 전이다.

‘서양철학사의 구조와 과학‘과 함께 그의 초기 저서를 대표하는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간성과 그 자리의 한계를 적절하게 직면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경험에 정직하기 위해 애쓰며 합의(合意)에의 방식과 그 공평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적 탐색의 지난한 여정을 버리고 삼박한 계시와 전수의 단답(單答)을 원하는 자는 떠나라. 예수를 참지 못하고 나름대로 답해 버린 유다가 떠났듯이.˝(29 페이지)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나는 지금껏 내가 내놓은 또는 치른 진술과 표현들이 뜸들이는 과정도 없이 너무 성급하게 차린 못난 답안들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한다.

그런 가운데 하이젠베르크가 한 말도 다시 찾아보게 된다. ˝역사는 (우리가)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이론이 일관성이 있다거나 명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론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일에 참여해보겠다는 희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인간, 입자, 자연에 대한 단상‘ 16 페이지)

하이젠베르크는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활동하고자 하는 소망이고 노력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이라 말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이것 때문에 과학의 길을 혼자 더듬어 가는 것이다.

사실 완전한 이론을 취함으로써 할 것(덧붙이거나 고칠 것)은 없다.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새 이론을 만들 수 있다.

어떤 점이 김영민 교수가 경계한 것이고 어떤 점이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긍정적인 저술(표현)인지를 잘 헤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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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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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소개하려 노력한 책이다. 하이데거는 궁핍한 시대의 사상가로 불린다. 이는 하이데거의 수제자 칼 뢰비트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횔덜린을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라 부른 하이데거로부터 배워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 철학은 대단히 난해하지만 그럼에도 귀 기울일 부분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의미의 철학과 시()는 이웃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철학자가 존재라 부르는 것을 시인은 성스러운 것이라 부른다. 존재자들이 갖는 성스러움을 존재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는 예술의 한 분야인 시 뿐 아니라 예술 전반을 포함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참된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 태도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시를 직접 쓰는 것보다 오히려 매순간 시적인 태도로 세계와 사물을 대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인으로 사는 것이라 말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불렀다. 하이데거는 오늘의 세계를 황폐한 세계로 불렀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사물을 지배하려 한다.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문명을 근저에서 지배하는 익명의 힘을 지배에의 의지라 불렀다.

 

지배에의 의지는 의지에의 의지(의지를 위한 의지)라 불린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시대인 지금을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단순히 도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과학기술을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 그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과학과 기술이 이미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을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자연은 물론 인간의 삶 전체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보았다. 신만이 진리를 드러내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서양 중세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야말로 진리를 드러내고 과학을 응용한 기술만이 인간의 삶을 안전한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문명이 전제하는 기술적 세계이해를 넘어 새로운 세계이해를 갖는 종교적 회심은 다른 것이 아닌 시를 통해 주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60, 61 페이지) 하이데거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자는 인간, 자연, 사물의 총칭이고 존재는 그것들이 갖는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갖는 성스러운 성격을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라 불렀다. 이는 존재자들의 특성이 각각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는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존중해야 할 독자적인 존재를 갖는다는 의미이다.(66 페이지)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이 갖는 고유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존재 경험이라 불렀다.(75 페이지)

 

하이데거가 말한 궁핍한 시대란 존재자들이 발하는 성스러운 빛이 모두 사라지고 빛바랜 모습을 드러내는 시대를 말한다.(76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가 평소 자명하고 진부한 것들에 대해 놀라워 했다. 이를 경이(驚異)라 한다. 하이데거는 기분을 중시했다. 하이데거의 경이는 특정 상황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근본 기분들 중 하나이다.

 

불안, 경악 등도 근본 기분의 하나이다. 저자는 성철 스님이 인용한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을 하이데거가 한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모든 산봉우리에 정적(靜寂)이 있다는 괴테의 시를 인용했다. 저자는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을 산과 물의 신비로움을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 표현한 것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시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지 않지만 존재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래 시인이며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이성이 아닌 시적인 이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라 불렀다.(107 페이지)

 

하이데거는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살 때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111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 언제라도 죽음의 엄습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가 경이라는 기분을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116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실존이라 칭했다.(122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도록 내던져져 있다고 보았다.(122 페이지)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 실존이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 간에 성립하는 목적 수단의 지시연관 전체를 세계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 전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로부터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불안은 죽음이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자신을 고지하는 방식이라 정의했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드러나는 나와 모든 존재자의 섬뜩하고 낯선 존재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는 것을 죽음에로의 선구(先驅;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감)라 불렀다. 불안이 우리를 본래적인 실존의 문턱으로 이끄는 기분이라면 불안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죽음에로 선구하는 것을 본래적인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이다.(137 페이지)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무()의 심연에서 도피하여 기만적이고 세간적인 가치들에서 삶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경향을 퇴락이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빠져드는 그 가치들은 우상이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우리가 존재자들의 신비스러운 충만한 존재를 경험할 것을 촉구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만이 현대의 기술문명이 초래한 위기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보았다.(139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삶을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형성해야 한다.(158 페이지)

 

하이데거의 사상은 우리를 항상 엄습하는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164 페이지) 물론 시적 감성을 통해 세계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경이라는 감정을 통해 허무감을 극복할 수 있다.(165 페이지)

 

하이데거는 과거의 신들은 떠났지만 새로운 신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라는 말로 현대를 설명했다.(175 페이지) 하이데거는 예술작품 특히 시에서 세계와 사물이 근원적으로 드러난다고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각 나라 향토어로 쓴 것을 말한다.(182, 183 페이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때의 언어는 모든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하는 시어를 가리킨다.(193 페이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세계와 사물을 근원적으로 현현(顯現)하게 하는 환기력을 상실한 언어이다.(193 페이지)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가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는 사물들은 그것들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187 페이지) 하이데거는 세계와 사물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존재라 표현했다.(190 페이지) 하이데거는 세계와 사물을 임의로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마음속의 시끄러운 계산과 호기심과 잡담에서 벗어난 상태인 침묵의 정적(靜寂) 속에서 진정한 시가 발원한다는 말을 했다.(191 페이지)

 

진정한 시는 침묵의 정적에서 비롯되지만 이런 침묵의 정적은 존재가 말하는 정적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정적이란 단순히 소리나 움직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운동과 정지가 근거하는 것으로 운동보다 오히려 더 동적이며 생명으로 충만한 것이다.(192 페이지)

 

하이데거가 말한 시어란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적인 언어이다.(194 페이지) 하이데거가 말한 시에 반대되는 것은 산문이 아니다. 시적인 정신으로 충만한 순수한 산문은 좁은 의미의 시 못지않게 시적일 수 있으며 시 만큼이나 드물기 때문이다. 시의 반대는 사물과 세계를 불러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일상어나 정보언어이다.(194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존재자들의 지배자가 아닌 존재의 파수꾼이 될 것을 촉구한다. 존재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와 근원적 세계에 경이를 느끼며 그것들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의 파수꾼이 될 때 비로소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204 페이지)

 

우리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자신이 죽을 자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212 페이지) 이럴 경우 그간 존재자들을 기술적으로 조작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의 생존과 안락을 꾀했던 행위가 허망한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단순히 안락을 추구하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봄과 동시에 건축 역시 인간에게 안락을 보장하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215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간이 지상에 본래적으로 거주할 경우 건축은 그런 수단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상에 거주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상은 우리가 본래 거주해야 할 고향으로서의 근원적 세계를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농부들의 일에 상응한다고 느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뿌리 내리고 있는 대지에 대한 순박하면서도 확고한 신뢰 속에서 사물들을 온몸으로 접하며 그것들과 교감하고 또 그것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발현하게 한다고 여겼다.(230 페이지)

 

하이데거의 사상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사상은 매우 유사하며 메시지 역시 거의 동일하다.(234 페이지) 소로에게 농사는 단순한 생계수단이기보다 사물들을 온몸으로 직접 경험하기 위한 길이었다. 소로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대지에 영혼이 있다고 여겼으며 이 대지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솟아나는 근원이라 생각했다.(236 페이지)

 

소로는 자연을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자연 속의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했다.(237 페이지) 소로가 본 자연은 하이데거가 경이(驚異)라는 기분 속에서 경험하는 자연과 같다.(243 페이지) 소로는 근대과학이 자연 전체와의 교감을 상실하고 지나치게 전문화되는 것을 우려했다.(250 페이지)

 

하이데거와 소로는 세계와 사물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감응력의 회복을 주창했다.(255 페이지) 하이데거의 사상은 노장사상이나 불교와 같은 동양사상에 근접해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가 되고 무엇이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 했을 뿐이다.(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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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감응(感應)이라는 말을 들었다. 스피노자의 개념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스피노자의 affect를 우리나라에서는 정서, 감응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반면 affection은 변용으로 사용하는 듯 하다.

전문 용어이기에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는데 다만 문학평론가 최현식 교수가 ‘감응의 시학’이란 책에서 인상적인 용례를 선보여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나는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타자로 존재하는 동시에 나의 내면과 쓰기를, 기록되는 문자들에 의해 관찰되는 타자로 서 있었던 셈”이기에 “이 양가의 타자성을 생각하면 우울한 감응(affection)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내면과 쓰기를‘이란 문구 다음의 콤마는 내가 한 것.) 문장이 복잡하고 장황하다.

a. ‘나는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타자로 존재하는 동시에 나의 내면과 쓰기를 기록되는 문자들에 의해 관찰되는 타자로 서 있었던 셈이기에 이 양가의 타자성을 생각하면 우울한 감응이 아닐 수 없다.’는 최현식 교수의 이 문장을
b.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생각이 관찰되는 나는 우울한 감응을 느낀다.‘ 또는 ’나는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생각이 관찰되기에 우울한 감응을 느낀다.‘로 고치면 어떨까?

문장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보다 사유 자체가 복잡하기에 저런 문장을 쓰는 듯 하다. .양가의 타자성이란 문구를 고집하다 보니 저런 문장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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