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처님 공부
김정아 / 문학아카데미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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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종일 백지 공책에 금강경을 베껴 쓸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온 종일 백팔배, 천팔십배, 절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사경(寫經)을 한다거나, 기도(祈禱)를 한다거나, 참선수행을 하기 위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내 앞에 닥쳐온 고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것 밖에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는 원망이나 기원, 황홀경 같은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내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따뜻하게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 나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 없으리라 생각한다."

 

시인 김정아 님의 '나의 부처님 공부'의 서문격인 '독자를 위하여'란 제목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불교방송 구성 작가로 일하며 쓴 글이다.('나의 부처님 공부'가 출간된 지 23년이 지났다.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다. 2003'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을 쓴 시나다 히로코 님의 근황을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한 이번 달 초의 일이 생각난다.)

 

제목이 인상적인 '나의 부처님 공부'는 불경의 주요 구절들을 일상의 일들로 쉽고 친절하게 풀어쓴 책이다. '독자를 위하여'의 일부이지만 꽤 긴 글을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 '나의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유의미하지만 닥쳐온 고통 앞에서 작가가 취한 실존의 몸짓을 알 수 있는 글이고 시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온 종일 백지에 금강경을 베껴 쓰고 백팔배, 천팔십배를 하고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사경도, 기도도, 참선수행도 아닌 것이었고 선택의 여지 없는 어떤 행동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경이고 기도이고 참선이 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의미의 사경을 세속적으로는 필사(筆寫)라 할 수 있다. 필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놀라울 정도로 문장력이 좋아진다고 한다.(해본 적이 없는 나는 확언하지 못한다.) 그럼 사경은 어떨까?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이 커지는 한편 문장력도 좋아지지 않을까? 기도나 면벽 참선도 내가 말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종교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부처님 공부'를 선뜻 산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펴보기 위해. 작가는 그런 무목적적 행위의 결과 놀랍게도 그런 행위에는 원망, 기원, 황홀경 등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자신의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따뜻하게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적이기보다 내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나도 같은 유의 체험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냥 쓰고 절하고 앉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부처님 공부'의 구성은 동화 속 부처님 일화 한편, 살며 생각하며 한편, 경전 한 말씀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작가는 동화집을 낸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경전 속 한 말씀은 불경의 말씀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편 어디서부터 읽어도 좋을 독립적인 글들이라는 특성이 있다. '별점'이란 글에서 작가가 인용한 말씀은 '전생담(前生譚)'의 한 구절이다. "행복은 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 인용에 덧붙여 작가는 불교가 점을 봐주거나 운명론을 믿고 따르는 종교라는 인식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는 설명을 한다.

 

작가는 그렇게 점을 보거나 운명론에 빠지는 원인을 분석한다. 그것은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지나간 일이 알고 싶으면 지금을 보고 앞으로 올 날이 알고 싶으면 지금을 보라는 부처님 말씀을 덧붙임으로써 깨어 있어야 할 당위를 깨닫도록 유도한다.(97 페이지)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은 지난 일의 거울이고 미래의 씨앗이다.

 

'별점'이란 글의 서두는 "지금은 그런 인식이 많이 사라졌지만..."란 글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읽힌다. 나 역시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이란 전제를 한 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우울증 당사자들에게 호손의 주홍글자를 새긴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라는 보적경(寶積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 '괴로움과 맞서는 용기'라는 글은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즉 생각을 일으키기 전 깨끗한 우리의 본래 마음을 의미하는 본바탕 진심('선가귀감' 참고)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망상일 뿐 정진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한 글이기에 그렇다. 이는 금강경의 무주상(머물지 않는 마음)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작가는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돌아보는데 이는 스스로 자신을 포기했음을 의미하고 뒤돌아 본다는 말은 과거의 어느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순간적으로 괴로운 마음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작가의 결론이 압권이다. "사실 마음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 괴로움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기도 하고 악수도 하고 같이 뒹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괴로움은 실체가 없는 일이어서 정면으로 마주보기만 해도 그 힘이 약해져 결국 흔적없이 사라지고 맙니다."(115 페이지)

 

'날마다 좋은 날'이란 글도 의미심장하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못이 없으면 망치는 망치로서의 제일 큰 기능 하나를 잃는 것처럼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도 피아노 조율사가 있어야 빛나고 훌륭한 의사도 환자를 운반할 구급차 운전기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119 페이지)

 

작가는 아무리 자기 존재를 무가치하게 낮추려 해도 우리는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으며 단지 그 일을 떠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날마다 편안한 날, 날마다 좋은 날이 될 것이라 말한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이란 작가의 모토가 생각난다.

 

'평등'이란 글은 파격적이다. '보문문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녀는 모두 평등하다. 하늘과 땅, 천지가 낳은 것이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작가에 의하면 부처님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두지 않으며 다만 불성만을 가장 존귀하게 여긴다고 가르치셨다.(213 페이지)

 

살며 생각하며의 한편인 '마음의 힘을 기른다'도 작가의 지론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문학작품 읽기, 공연예술 감상하기, 사색, 자연과의 교감, 경건함에 대한 외경심, 참선과 명상, 아름다움에 대한 황홀감.. 등이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진정한 교재이며 영양식이라는 글을 인용하며 작가는 아침 저녁으로 모든 생각을 놓고 단 10분만이라도 앉아볼 것을 권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공부이리라.

 

작가는 스승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스승인 부처님을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속가(俗家)에 사는 저희 또한 인류의 큰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나 자신을 찾는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그 은혜로움이 한이 없고(219 페이지)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많은 인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믿고 의지한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깨우쳐 보게 된다(231 페이지)는 것이다. 시간 날 때 틈나는대로 힘들 때 찾아 읽을 책으로 '나의 부처님 공부'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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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 님(1)의 따님인 윤정(Djong Yun) 님의 싱글곡인 Du Sollst Lieben(2)를 생각한다.

그룹 포폴 부(Popol Vuh)의 보컬과는 별개로 1972년 발표한 솔로 곡이니 나온 지 50년이 다 된 작품이다.(3)

생각만 하다가 유튜브를 통해 듣는데 Du Sollst Lieben 다음에 자동으로 그 분이 속했던 Popol Vuh의 대표작 Hosianna Mantra로 넘어간다.(친절하다.)

어제 올린 맹추위에 대한 포스팅에 시인 이령 님께서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 “아ㆍ봄은 오겠죠ㆍ오고야말겠죠.˝(4)

이에 나는 We shall overcome이란 댓글을 달고 바로 당신은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Du Sollst Lieben이란 곡을 떠올렸다.

포폴 부의 곡들은 지금도 변함 없이 신비하고 주술적이고 영적으로 들린다.(5)

나는 신성(神性)을 찬미하는 진언(眞言)이란 의미의 Hosianna Mantra도 좋지만 이별이란 뜻의 ‘Der Abschied’도 좋다.(6)

(1) 윤이상 님이 윤동주 시인과 같은 해에 태어난 분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윤이상 님의 유해(遺骸)를 고향 통영에 이장(移葬)하려는 움직임을 보도한 신문 기사 가운데 제목을 ‘윤이상 유해 이장 놓고.. 쪼개진 통영’으로 설정한 곳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바로 조선일보...
(2) You shall love.
(3) 2005년 ‘55세에 이른’이란 제목의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그러니 윤정 님은 곧 70세가 되신다.
(4) ‘무엇 무엇에 대한‘이란 말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여성신문’의 현송월 관련 기사를 읽었다. ‘현송월 보도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여성 관음증’이란 제목의 기사이다. 여성에 대한 관음증이라 해야 정확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게 된다.
(5) 교회 청년회에서 배운 가스펠송인 ‘호산나 호산나‘란 곡과 Hosianna Mantra는 너무 차이가 난다. ’호산나‘는 밝고 Hosianna Mantra는 현묘(玄妙)하다. 독일어인 Hosianna, 이탈리아어인 Osanna, 영어인 Hosanna. Osanna라는 이름을 한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 있다.
(6) 한무숙 님의 ‘축제와 운명의 장소‘란 작품에 ˝결별의 눈으로 볼 때 그 풍경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다.˝란 글이 있다. 결별의 눈으로 볼 때 사람이든 사물이든 상황이든 아름다울 수도 있고 욕망을 내려 놓고 볼 수 있기에 실상을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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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시베리아보다 온도가 낮게 기록될 정도로 연일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 사상 최강의 한파(寒波)는 온난화의 역설적 결과라고 한다.

북극해의 얼음이 급격히 사라져 대기로 많은 양의 열과 수분이 방출된 탓에 추운 공기를 북극에 가둬두었던 극 소용돌이가 약해졌고 이로 인해 매서운 한파가 중위도를 강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을 빙하기라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 목요일(1월 25일) 아침 소요산에서 출발한 1호선 전철에서 나도 고스란히 한파에 노출되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불어닥친 칼바람은 단연 최고였다.

물론 그럼에도 바깥 추위에 비하면 참을 만 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날 얼마나 추웠는지 손과 발이 시려웠다. 이런 일은 근래에 없었는데 난방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대로 가동했지만 추위에 힘을 잃은 탓이었다.

(우리가 날씨를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위와 좋은 공기 질’ vs ‘따뜻함과 나쁜 공기 질’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전에는 ‘추위와 좋은 공기 질’을 고르겠다고 했지만 지난 목요일 추위를 겪다 보니 그런 생각이 주춤해진다.

지금의 이 상황을 우리의 무분별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온난화의 결과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과 무관하게 자체의 순환 주기를 따르는 자연의 질서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든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파 때문에 생각도 멈춰선 것 같았던 시간을 보냈다. 모두 이 극강(極強)의 추위를 잘 견디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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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1-2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재의 서재글에서 윤정 님 얘기 읽으러 들어왔다가 내친 김에 다른 글도 몇 개 읽고 고마워서 댓글 남깁니다.
벤투님이 쓰신 김정아 님의 <나의 부처님 공부> 독후감 읽고 요즘 제 고민의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예요.
윤정님 이야기도 좋았고 벤투님이 소요산발 1호선 얘기하시니 더욱 반가웠어요.
저도 집값 때문에 서울에서 밀려나 동두천 산 지 한 해 다 돼 가는데 차 없어서 어디 가려면 늘 소요산발 1호선을 타거든요.
벤투님도 경기북부에 사시나 봐요.
추운 날씨 건강하시기를.

벤투의스케치북 2018-01-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연천 삽니다.. 제 글을 읽고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시라니 다행입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8-01-2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
이미옥 지음 / 박문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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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옥(李美玉)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는 구성주의, 유동(流動) 의식을 가진 디아스포라, 현상학 등 세 단어를 키워드로 하는 책이다. 구성주의란 타자 체험과 관계된 말로 타인의 시점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현재를 수렴해가는 것, 자신의 좌표를 설정해 나가고 주체를 구성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유동 의식은 고향 상실이 아닌 고향을 설정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현상학이란 주체의 의식을 흐름을 추적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그간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시인, 저항 시인 등으로 알려져 왔고 분석되어 왔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한 작업은 윤동주 시인의 의식의 변모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윤동주는 북간도 시인이다. 북간도는 윤동주의 물리적 고향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그는 북간도 이후 평양, 경성(연희전문), 동경에 이르는 이동 궤적을 보였다. 저자는 윤동주가 저항 시인이라는 연구에 대해 실제 그가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없음을 설명하며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점은 물의 심상에 주목한 연구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본격적 작품 분석에 앞서 시대적 상황을 해석에 개입시키면 온당한 해석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윤동주 시인을 디아스포라란 키워드로 분석한 시론들도 식민지 문제를 강조하고 있음을 주지시키며 식민지 문제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디아스포라 의식의 측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고 전제한다.

 

저자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디아스포라 정체성보다는 디아스포라 의식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주요 이론 틀로 세워 전개해 나갔다고 밝힌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디아스포라 개인의 상황과 환경 등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구분할 수 있는 분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디아스포라 의식은 디아스포라 개인이 경험한 사유의 모든 지점을 포괄할 수 있는 수렴적 특성을 갖는다.(17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 개인과 타자가 한 공간에서 만나 발생할 때 생성되는 의식의 변용을 디아스포라 의식으로 설명한다.(22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에게 있어서 타자는 일상화된 개인이 아닌 거대한 구조 체계라 말한다.(23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의식의 작용은 내재적임을 언급한다. 즉 그것은 디아스포라가 처한 세계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생성, 발전하며 그 자체의 의식 자기의식의 뿌리와 연동하여 작용하는 것이다.(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디아스포라 의식의 확대는 공간이나 시간, 가치 조망의 확대를 가져온다. 이런 확대는 시적 언어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26 페이지) 저자는 모국이라는 상상적 질서가 결코 현실에서는 질서화될 수 없음을 식민지라는 극단적 경험을 통해 확인한 윤동주는 자기 소외를 통해 만주에서도 모국 조선에서도 충족되지 못한 자기성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27 페이지)

 

윤동주의 디아스포라 의식은 디아스포라 경험에 기초하여 발현되는데 초기에는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순수의식을 보여준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자기 부정의 균열과 모순을 드러냈다.(28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방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난점이 대두됨을 언급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현상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30 페이지)

 

윤동주의 정신적 모태인 명동촌이 북간도에 세워진 것은 1899218일의 일이다.(36 페이지) 윤동주는 만주를 거쳐갔던 다른 국내 시인들(백석, 이용악, 유치환, 이육사, 서정주 등)에 비해 오히려 만주에 대한 의식이 덜 반영되어 있다.(3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윤동주의 만주에서의 삶에는 유랑의 고통이 체험되어 있지 않다. 환경이 넉넉했고 일제 식민지의 영향을 덜 받았고 북간도가 민족 공동체적 공간이었다는 점 등 때문이다.

 

윤동주로 하여금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게 한 평양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이에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가 광명학원에 입학하는데 이 학교는 철저한 친일 학교였다. 연전(延專: 연희전문)으로의 유학, 모국과의 만남은 윤동주 일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53 페이지)

 

연전에 오기 전까지 윤동주는 상상적 고향에 대한 추구를 보여왔다.(61 페이지) 윤동주는 자화상이후 12개월 간 절필한다. 이 시에는 우물 물 즉 거울이 나온다. 저자는 라캉의 견해를 받아들여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자기의 모습이지만 이 바라봄을 통해 주체는 안과 밖을 구분하고 타자와 그 타자들로 구성된 세상을 응시한다고 말한다.(70 페이지)

 

저자는 욕망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과정은 죽음과도 맞닿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81 페이지)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를 상실한 실재계는 주체의 결여를 뜻하며 이는 자아의 죽음이란 측면에서 죽음의 충동과도 이어진다.(81 페이지) 이 상황에서 윤동주는 희생을 선택한다. 이는 윤동주가 외적 인격 즉 페르소나를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페르소나는 타인과의 관계설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격의 또 다른 모습이다.(82 페이지)

 

윤동주가 모델로 삼은 예수(‘십자가’)와 프로메테우스(‘’)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로 개념화된 수많은 시간 가운데 윤동주는 항상 밤에 주목하고 있다. 밤은 윤동주에게 있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시간이다.(93 페이지) 윤동주에게 있어 출구가 없는 현실은 모국에 와서도 정작 모국을 되찾을 수 없는 시대적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의미한다.(94 페이지)

 

저자는 평양 만주 경성 일본 등으로의 이동을 통한 물리적인 거리는 상대적인 그리움을 유발시킨다고 말한다. 영원한 고향이란 없으며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존재론적인 탐험과도 같다.(107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이란 시어를 디아스포라적인 원류인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한다.(110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디아스포라 의식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한다.(121 페이지) 이 시에는 윤동주의 전체 시 가운데 가장 많은 대상들이 등장한다.(122 페이지)

 

저자는 시공간적인 움직임이 급류처럼 흘러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자신의 고정된 위치가 없이 눌 불안하고 초조한 헌대인들 또한 넓은 의미의 디아스포라라 말한다. 저자는 그런 이유로 윤동주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고 결론짓는다.(131 페이지)

 

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는 문제의식이 참신하고 논의가 성실한(설득력 있는) 책이다. 물론 윤동주가 사랑받는 이유는 디아스포라적 공통성 때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적 시인임은 분명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항, 순수 등의 키워드로 인해 지지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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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6일 일산의 책방이듬에서 있었던 문보영 시인의 강의 때도, 그 다음 날 있었던 용산 도서관에서의 이혜미 시인의 강의 때도 나는 리듬감 있는 행동 예컨대 춤이나 운동이 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물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즈음 읽었던 레진 드탕벨의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가령 이런 문장. “버지니아 울프는 맨 처음 영감이 떠오르면 그것을 탯줄로 삼아 자신의 내부에서 움직이며 새롭게 형성되는 모든 생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씨앗, 즉 독창적인 착상의 배아가 자신의 몸 전체에 영향을 끼쳐 두 다리로 박자를 맞추게 된다고 했다.”(96 페이지)

작곡(석사)과 물리학(박사)을 공부한 존 파웰은 리듬을 특정 시간 동안 짧은 음과 긴 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유형으로 정의했다.(‘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244 페이지)

파웰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리듬이란 말은 사실상 템포(빠르기), 박자(힘을 주어 강조하는 주기), 리듬을 포괄하는 말이다.

내 의문에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종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김리영 시인의 시집 ‘춤으로 쓴 편지’에 실린 동명의 시에 이런 구절을 보았다.

“금박쾌자에 가슴띠 두르고 등장하면/ 어깨에 긴장쯤 녹아내려야 해/ 낯선 관객 앞, 어색한 기분 가라앉히고/ 손끝이 자유롭게 움직일 거야...단 한 장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들/ 3분 34초 공연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다시 불 켜져도 읽을 수 없을 거야// 참을 수 없게 차오른 숨/ 춤으로 맥박을 바치는 편지를 전한다”
이 시가 시집 전체 가운데서 리듬과 생각의 밀접한 연관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란 생각을 한다.

“함(doing)이 곧 앎이며, 앎이 곧 삶”이라는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명제(신승철 지음 ‘구성주의와 자율성’ 19 페이지)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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