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6일 일산의 책방이듬에서 있었던 문보영 시인의 강의 때도, 그 다음 날 있었던 용산 도서관에서의 이혜미 시인의 강의 때도 나는 리듬감 있는 행동 예컨대 춤이나 운동이 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물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즈음 읽었던 레진 드탕벨의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가령 이런 문장. “버지니아 울프는 맨 처음 영감이 떠오르면 그것을 탯줄로 삼아 자신의 내부에서 움직이며 새롭게 형성되는 모든 생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씨앗, 즉 독창적인 착상의 배아가 자신의 몸 전체에 영향을 끼쳐 두 다리로 박자를 맞추게 된다고 했다.”(96 페이지)

작곡(석사)과 물리학(박사)을 공부한 존 파웰은 리듬을 특정 시간 동안 짧은 음과 긴 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유형으로 정의했다.(‘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244 페이지)

파웰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리듬이란 말은 사실상 템포(빠르기), 박자(힘을 주어 강조하는 주기), 리듬을 포괄하는 말이다.

내 의문에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종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김리영 시인의 시집 ‘춤으로 쓴 편지’에 실린 동명의 시에 이런 구절을 보았다.

“금박쾌자에 가슴띠 두르고 등장하면/ 어깨에 긴장쯤 녹아내려야 해/ 낯선 관객 앞, 어색한 기분 가라앉히고/ 손끝이 자유롭게 움직일 거야...단 한 장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들/ 3분 34초 공연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다시 불 켜져도 읽을 수 없을 거야// 참을 수 없게 차오른 숨/ 춤으로 맥박을 바치는 편지를 전한다”
이 시가 시집 전체 가운데서 리듬과 생각의 밀접한 연관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란 생각을 한다.

“함(doing)이 곧 앎이며, 앎이 곧 삶”이라는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명제(신승철 지음 ‘구성주의와 자율성’ 19 페이지)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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