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는 관계의 비밀 - 웹툰으로 알려주는 인간관계 심리 처방전
최리나 지음, 연은미 그림, 천윤미 일러스트 / 미디어숲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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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하나가 아닌 몇 가지 다채로운 인격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격이 제1 인격이다. 이는 작가이자 심리상담사, 글로성장연구소 대표인 저자의 책 ‘상처 받지 않는 관계의 비밀’이 말하는 주요 구절이다. 저자는 날 그대로 수용해주는 사람이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라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 속 마음을 알지 못한다.

 

건전한 남녀관계란 나와 상대의 만족이 서로 적절히 채워지는 관계다. 저자는 회피성 인격의 한 발 진보를 칭찬하는 쓰담쓰담 사랑법에서 회피성 인격의 사람에게 매일 거울을 보며 “난 사랑받아 마땅해”란 말을 되뇔 것을 주문한다. 편집성 인격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든 의심과 불안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책에는 여러 문제를 가진 유형들이 나온다. 관계 중독이란 유형도 있다. 사랑중독, 사람중독 등이다. 관계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자아를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사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관계가 깨질 것을 염려해 눈치만 보지 말고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힐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 치유에 집중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독서, 명상, 다양한 취미나 모임 등으로 유익하게 보내야 한다.

 

두 번째 챕터는 가족이라는 아프고도 아련한 이름이란 제목의 챕터다. 누구보다 가깝지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애증의 족쇄가 가족관계다. 저자는 우리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나만 존재하는 가족을 가짜 가족이라 말한다. 경계선이 사라진 아슬아슬한 부모 ? 자녀 관계라는 글이 관심을 부른다. 저자에 의하면 가족일수록 넘지 말아야 할 적정선이 있다.

 

저자는 가족 관계 문제를 해결할 책으로 ‘관계를 읽는 시간’ 등을 권한다. 저자는 폭력 편에서 나의 언행이 나의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폭력이란 언어나 물리적 힘을 행사해 상대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해를 주는 일이다. 부부관계에서 나의 문제를 파악해야 행복한 인생을 맞는다. 저자는 이혼 가정이 아닌 새롭게 시작하는 새 가정이란 말을 쓴다.

 

세상에 나쁜 부모는 없다지만 못된 부모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쁘다는 말은 옳지 않음을 의미하고 못되다는 말은 심성이 고약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상식의 영역에서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고질적 갈등이 있는 부모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부모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내 생각과 에너지의 방향을 나 자신과 내 가정을 향해 돌리자.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을 자책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자식도 부모를 미워할 수 있다. 가족은 물보다 진하다는 이유로 마음에 피명을 들게 하는 관계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나를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나라는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가족이라 말한다.

 

저자는 각자의 색이 모여 새로운 조화를 만드는 사회라는 울타리란 챕터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있다면 행복할까?라 묻는다. 관계의 물꼬를 트는 상호 존중의 언어가 필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존중하는 언어로 관계를 얻는다. 뒷담화는 감정의 찌꺼기로 주변을 오염시키는 행동이다.

 

상대를 험담해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낙인 하나다. 거절은 균형 잡힌 내 삶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히 행사해야 하는 나의 권리다. 예의를 갖춘 거절은 어디서나 통한다. 시의적절한 침묵에는 힘이 있다. 시의적절한 침묵은 수려한 말솜씨나 강력한 자기주장보다 훨씬 쓸모 있다. 침묵은 내 고유성을 지키며 관계를 유지하는 좋은 대화법이다. 감사 일기는 똑같은 일상을 반짝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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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종 인간
팻 시프먼 지음, 조은영 옮김, 진주현 감수 / 푸른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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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앞니가 없어 여러 도구를 만들었다. 이어 자신이 창조한 동물을 상대로 계약과 협약을 맺어 그들의 해부적 습성과 능력을 빌렸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시기가 유럽에 사피엔스가 등장한 시기와 겹친다고 말한다. 생태계란 협력, 공생, 상호 독립의 망이 교차하고 얽히는 복잡한 실체다.

 

침입종은 생태적 개념이다. 저자는 사피엔스를 침입종으로 규정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가 유적지를 번갈아 사용한 흔적도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전형적 도구 문화는 무스테리안 도구 문화 또는 아슐리안에서 무스테리안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도구 문화다. 전 세계를 향한 초기 사피엔스의 전례 없는 대규모 침입은 약 13만년전에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초기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대륙에만 머물렀다. 인간의 가까운 친척인 네안데르탈인은 레반트라고 불리는 중동 지역을 비롯 유라시아에 거주했고 아프리카에는 살지 않았다. 약 3만 9300년전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에서 캄파니아 이그님브라이트 폭발이라는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었다. 이 폭발이 환경에 미친 충격으로 네안데르탈인이 일부 유럽 지역에서 쫓겨나 현생인류가 침입할 빌미를 주었거나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하는 과정을 가속화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캄파니아 화산 폭발 훨씬 이전에 멸종했다. 저자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레반트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한 이유가 강수량, 기후변화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살기 좋아진 기후 덕분에 다른 곳을 알고 싶어 낯선 세계를 탐색하기 위해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피엔스는 아마 자신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 말한다.

 

스티븐 처칠은 네안데르탈인이 가까이에서 창을 찌르고 맞붙어 격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사냥했다고 주장한다. 매우 위험하고 힘이 많이 드는 방식이다. 현생인류는 자르고 으스러뜨리는 강한 이빨, 턱, 힘센 팔다리 같은 것이 없지만 행동은 포식성 동물들처럼 했다. 현생인류에게 도구는 그런 신체조건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종이 동식물을 얼마나 먹었는지는 음식을 구성하는 원자가 몸속으로 들어와 뼈, 치아 등과 결합하는 성질을 이용해 알 수 있다. 현생인류, 네안데르탈인 모두 단백질이 풍부한 밥상을 선호하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늑대는 아름답고 무리 사회는 유쾌하고 가족 생활은 평화롭다. 이는 침입자를 쫓는 그들의 치명적이고 무자비한 추격 습성과 지극히 대조적이다.

 

저자들은 기후변화 가설과 현생인류와의 경쟁가설은 배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기후가 달라져 네안데르탈인이 사냥하기 좋은 서식지가 축소되고 먹잇감이 귀해졌다면 왜 현생인류의 서식지와 먹이 개체군은 줄어들지 않았을까?라 묻는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보다 키가 작은 대신 몸은 단단한 근육질이어서 기초대사율과 활동대사량(실제 몸을 움직일 때 드는 에너지)이 더 높았다.

 

기초대사량과 활동대사량이 낮으면 생존에 유리하다. 현생인류는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남았다. 현생인류는 약 4만 5천년전부터 동물 뼈로 만든 바늘을 사용했다. 현생인류가 더 효율적인 화덕과 은신처를 보유했다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동굴곰은 몸집이 가장 큰 대형 포식자였다.(동굴곰을 Ursus Spelaeus라 한다. 그들의 화석이 주로 동굴에서 발견되어서 동굴곰이라 한다.)

 

현생 사자와 달리 갈기가 없는 동굴사자는 네안데르탈인과 직접적인 경쟁관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돼지 이야기와 비교하게 하는 부분이다. 포식자 길드의 모든 중대형 동물은 네안데르탈인 및 현생인류와 먹이를 두고 경쟁했을 것이다. 매복사냥꾼, 추적사냥꾼 개념은 흥미롭다. 네안데르탈인은 매복사냥꾼이었다.

 

해부학적으로 속도전이나 장거리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투척용 무기가 아닌 손에 들고 공격하는 무기를 썼기 때문이다. 네안데르탈인은은 몸무게가 어중간했다. 현생인류는 집단으로 행동하는 동시에 원거리 투척 무기를 소유해 대형포식자들 위에 군림했을 것이다. 완전히 초식성인 동굴곰은 현생인류와 먹이경쟁은 하지 않았지만 1차적으로는 식물, 2차적으로는 서식지인 동굴 등 다른 자원을 놓고 경쟁했다.

 

늑대의 주요 경쟁자인 코요테는 늑대의 공격으로 고통받았지만 늑대가 남긴 사체 덕분에 부분적으로는 불이익이 상쇄되었다. 현생인류가 매머드처럼 큰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을 익혔을뿐 아니라 사체를 관리하는 능력까지 갖춤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토종 포식자들은 남은 사체를 청소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체온유지능력이 부족했고 대사율이 높았으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활동을 했고 손에 들고 싸우는 무기를 사용했다. 자신들의 사냥방식에 적합한 숲 서식지가 소실되면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매머드를 죽이고 이용했을뿐더러 사체를 관리하는 능력까지 보유했던 현생인류는 이어 늑대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늑대는 네안데르탈인이 거의 손대지 않았던 종이다.

 

현생인류는 기후가 요동치던 유라시아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유라시아에 있으면서 기후 변화를 고스란히 겪어냈다. 현생인류는 유라시아에 도착해 크게 번성하여 빠른 시일에 네안데르탈인을 추월했다. 네안데르탈인의 사냥 방식에 적합한 임야지대가 줄어드는 바람에 네안데르탈인 인구는 이미 줄어드는 중이었고 유전적 다양성도 낮아졌다.

 

약 40만년전 이후 그들은 소수만 살아남았거나 거의 남지 않았다. 현생인류를 특별히 강력한 최상위 포식자로 만든 것은 또 다른 최상위 포식자와의 동맹이었다. 다른 어떤 포식자도 이 정도 수준으로 동맹한 적은 없었다. 흥미롭게도 인간과 개는 서로 필요했다. 개들은 인간이 나눠주는 음식 덕분에 식량 부족에 덜 시달렸고 다른 육식동물의 공격과 경쟁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은 가축화의 훌륭한 후보다.

 

늑대는 서열에 따른 질서가 무리를 지배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들은 무리 지어 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함께 사는 것에 잘 적응되어 있다. 늑대는 조직적으로 사냥하고 무리 구성원 간에 우열이 분명하며 새끼를 함께 돌본다. 늑대가 인간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받아들이면 종 간 서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은 왜 늑대를 가축화하지 않았을까? 눈의 흰자위(공막)를 이야기하는 저자에 따르면 가축화된 개는 시선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늑대의 유전적 능력을 그대로 이어받았을뿐 아니라 인간을 응시하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늑대보다 두 배나 더 길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흰색 공막이 인간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확산된 이유는 이 형질이 인간 사이에서뿐 아니라 함께 생활하고 사냥하는 늑대 개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기후 변화는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1차 원인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동물을 처음으로 가축화한 것은 인간 진화 과정에서 커다란 도약이었다. 기후변화와 새로운 능력을 갖춘 현생인류의 출현이 시너지 효과를 내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으로 몰아갔다.(개가 인간에게 길들여진 시점은 1만 8천년전보다 훨씬 앞선 3만 6천년전이다. 이 시기는 포식자 길드 내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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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 사직상소, 권력을 향한 조선 선비들의 거침없는 직언직설
김준태 지음 / 눌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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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명 조식의 단성 현감 사직소가 계기가 되었다. 김준태의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를 읽는다. 책의 첫 순서는 바로 남명의 그 소(疏)다. 남명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 시험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현실 정치에 뜻이 없지는 않았으나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혼탁하다고 생각했다. 명종대는 외척의 전횡이 극심하던 때다.

 

출처(出處)란 말이 있다. 전자는 상황이 좋아 공직 생활로 나아가 활동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상황이 나빠 자연으로 돌아와 은둔하는 상황이다.(‘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262 페이지) 중요한 점은 남명이 대비(문정왕후)를 과부라 한 것, 임금(명종)을 고아라 한 것이 아니라 출처간에서 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자는 남명의 상소에 한 가지 단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나치게 날을 세워 명종으로 하여금 반성게 하기는커녕 반감을 갖게 했다는 점이다. 순조의 장인이자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이 외척인 자신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 공론이 오염되고 정치가 타락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제수(除授)된 군부의 핵심 요직을 거절했다.

 

여헌 장현광은 공조판서 사직상소를 했다. 그는 퇴계학파로 분류되지만 이이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여든 셋의 노구를 이끌고 선비들을 모아 적과 맞서 싸우자는 통문을 각 지방에 돌렸다. 하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절망에 빠져 산속으로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고 생을 마쳤다.

 

대동법 시행을 청원한 김육도 상소했다. 우의정 사직상소다. 대동법 전국 실시 주장에 김집이 반대하자 우의정을 사직하겠다며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 바치게 하고 가구가 아닌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하는(소득수준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김육이 좌의정, 우의정 등을 거치며 올린 상소는 모두 십여 차례로 전부 대동법과 관련된 상소였다.

 

구언(求言)이란 말이 있다. 정치의 잘잘못에 관해 널리 의견을 묻고 청책에 반영하는 행위다. 임금이 구언을 지시하면 어떤 말을 해도 가했다. 임금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해도 되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해도 된다.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실시한 구언에서 박상과 김정은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상소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중종이 그 말을 수용한다면 단경왕후를 폐위시킨 공신들의 죄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중종이 두 사람에게 죄를 묻자 조광조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박상, 김정을 용서하자는 여론이 있었음에도 대간이 죄를 묻자 조광조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없다며 자신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대간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했다. 정언 사직상소다.

 

미수 허목은 장령(掌令) 사직상소를 했다. 허목은 빈번하게 사직상소를 했다. 허목은 자서에서 특별히 임금(효종)께서 따라주었다는 말을 했다. 1659년 장령 사직상소다. 여기에서 허목은 네 가지를 거론했다. 1) 둔전 폐지, 2) 예 강조, 3) 법질서 확립 주장, 4) 시사(市肆) 강조 등이다.

 

공한지(空閑地)를 개간해 군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둔전에 대해 태조 때부터 내려온 제도이므로 함부로 폐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허목은 둔전 폐지를 밀어붙였다. 허목은 국민의 복리가 시사(市肆; 시장)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허목은 장사꾼들이 시세를 틈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점하여 팔지 않으며, 없는 말을 만들어 법을 어지럽히고 사욕만 채운 것에 대해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관에 의한 시장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재화가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도록 나라에서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를 보자. 아이러니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강화(講和)를 주장한 사람들은 전쟁 중 지휘부를 구성했던 대신들이고 한 걸음 물러섰던 사람들, 임금을 따라 후방의 안전지대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일본에 복수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재상으로서 전시 군수 보급을 책임졌던 서애 류성룡, 도체찰사가 되어 직접 전선을 누비며 백성과 병사들을 독려했던 이원익, 병조판서로서 군부를 총괄한 이항복 등이 강화를 찬성했다. 강화반대론자들은 강화찬성론자들을 매국노로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는 전쟁이 끝나려 하자 그간의 잘못을 덮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결과로 보인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는 이 때 나왔다.

 

에둘러 표현되어 있었지만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적 없이 극단의 현실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항복, 이원익 등은 왜군과의 강화에 찬성한다는 이유로 홍문관으로부터 탄핵 받았다. 이항복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 이항복은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는 고금(古今)의 도리는 전(戰), 수(守), 화(和) 셋인데 지금은 화가 최선이라고 했다.

 

이항복은 자신이 우물쭈물하여 구차하게 용서를 기다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이는 자신에게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사직하고자 하니 재가를 바란다고 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동안 다섯 번 넘게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전쟁 수행에 헌신한 이항복에게 척화는 훨씬 쉬운 선택지였을 것으로 누가 보아도 충분한 자격을 가진 이항복이 척화를 주장했다면 대의명분의 수호자로 추앙받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포구에 박세채로부터 유래한 현석동이란 동이 있다. 현석(玄石)은 남계(南溪)와 함께 박세채의 호다. 그는 숙종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내수사(內需司) 폐지도 건의했다. 내수사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임금은 이곳을 통해 신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치자금을 사용했다. 박세채는 내수사 혁파를 통해 왕의 공공성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박세채는 서열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임기를 늘려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임시기구인 비변사를 없애고 왕 - 재상 - 6조로 이어지는 의정부서사제를 재건하여 현명한 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하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정시한은 숙종의 환국정치를 목숨 걸고 비판한 신하다.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경신 환국(남인 몰락), 기사 환국(서인 제거), 갑술 환국(남인 숙청)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당이 조정을 독점하도록 정국을 운영했다. 이 결과 각 당파가 상대당의 전멸을 의도하게 되었고 보복과 보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정시한은 옛말에 편벽되이 한쪽 말만 들으면 간악한 일이 생기고 한쪽에만 맡기면 혼란하게 된다고 하였다며 전하께서는 사람을 좋아할 때는 무릎 위에 안아줄 것처럼 하다가 물리칠 때는 깊은 못에 밀어넣는 것처럼 하여 마음이 일정하지 못하며 주고 빼앗음에 번복이 많다고 썼다.

 

이조판서 사직상소를 쓴 강희맹은 사숙재(私淑齋)란 호를 썼다. 세종의 조카이고 세조와는 이종사촌간이다. 그는 시서화 3절로 알려진 형 강희안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에 큰 자취를 남겼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정언, 지평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는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에 차례로 제수되자마자 바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자신은 성균관 시절부터 규장각 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성장해왔고 지금도 스승이나 다름 없는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쓰고 있으므로 강하게 간언하고 때로는 임금을 신랄하게 비판해야 하는 간관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해 다른 신하들의 견제가 심했고 이것이 정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다. 사직서가 수리되기 전까지는 해당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정약용은 과거제도 개선 방향을 담아 상소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에는 과거만 있고 천거(薦擧)가 없음을 지적했다.

 

정약용이 천거 병행을 주장한 것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기에 사장될 수 있는 인재를 천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다. 과거 시험은 사람들에게 시험합격을 위한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기에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를 도입해 선비들이 학문 도야와 자기 수양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구조상 답안지 전체에 대한 세심한 채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선착순 300명의 답안지만 평가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답안지 제출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인 선접꾼, 답안지 내용을 구상하는 사람인 거벽(去闢), 답안을 작성하는 사람인 사수(寫手) 등의 용어가 나온 것이다.

 

정약용은 응시인원을 대폭 줄여 과거 시험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여 편법과 부정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주장은 인재선발제도의 다양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맞춰져 있다.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는 큰 자료거리다. 남명 조식, 미수 허목, 잠곡 김육, 백사 이항복(과 오리 이원익), 현석 정시한, 다산 정약용 등에 대해 많이 알았다. 특히 현석 정시한을 처음 알아 큰 도움을 얻었다. 신을 부르지 말라는 말은 물러난다는 의미이지만 정책을 채택하라는 의미의 배수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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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오신 세 여자분께 방문자센터 해설을 했습니다. 일행중에 답사도 많이 하셨고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도 많은 의상학 전공자가 계셔서 즐거웠습니다. 전공 이야기를 듣고 네안데르탈인이 귀가 있는 바늘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발굴 이야기를 하니 의상학 전공자들도 무덤속 옷을 확인하고 복원하는 등의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엄청난 냄새가 난다고 하네요. 저는 의상의 상이 치마 상(裳)이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적상산(赤裳山) 사고 이야기도 했습니다.

 

동굴 이야기를 하시기에 저는 동굴에 그려진 손 이야기와 함께 손은 정신의 칼날이라는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말을 했습니다. 숭의전에 다녀오셨다기에 8대 임금 현종이 경기(京畿)제를 처음 시행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다른 곳과 달리 경기는 두 고을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 아니라 서울을 지원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가령 경기 기(畿)의 밭 전(田)과 창 과(戈)가 그 증거입니다.

 

오늘 한 것처럼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넘나들며 하는 해설이 좋습니다. 오늘의 수확은 전공자를 통해 나비 박사 석주명의 여동생 석주선씨가 전통 의상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해설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말을 듣고 점심 맛있게 드세요 라고 했습니다. 의상학 전공자이신 고창 출신의 그분은 저희보다 선생님이 더 잘 드셔야겠습니다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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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이란 두보(杜甫)의 시 한 구절이 인용된 시는 조용미 시인의 ‘探梅行‘이다. “병중 매화를 보려 나선다/ 매화 보려면 아픈 것일까...“로 시작하는 시다. 시인에게는 ’탐매‘란 시도 있다. ”..멀리서, 내게 맞는 봄을 찾아, 해마다 이 늙은 매화나/ 무 아래 서 있다 가느라 나도 모르게 나이를 먹었다...“란 구절이 있는 시다.

 

탐매행은 한자로, 탐매는 한글로 쓴 데 어떤 이유가 있을까? 두보의 시가 인용된 ’探梅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暗香에 病이 깊어가는 것인가/ 매화나무에 흰 나비가/ 꽃잎인 듯 나비인 듯/ 날아다닌다“ 암향에 병이 깊어가는 것인가...

 

이를 보며 李白의 ’정야사(靜夜思)‘란 시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床前明月光/ 疑是地上霜...”(상전명월광/ 의시지상상); “침대 머리 맡으로 흘러든 밝은 달 빛/ 땅에 서리가 내렸나 했네..” 흰 나비와 꽃잎 vs 달빛과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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