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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 사직상소, 권력을 향한 조선 선비들의 거침없는 직언직설
김준태 지음 / 눌민 / 2017년 11월
평점 :
상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명 조식의 단성 현감 사직소가 계기가 되었다. 김준태의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를 읽는다. 책의 첫 순서는 바로 남명의 그 소(疏)다. 남명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 시험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현실 정치에 뜻이 없지는 않았으나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혼탁하다고 생각했다. 명종대는 외척의 전횡이 극심하던 때다.
출처(出處)란 말이 있다. 전자는 상황이 좋아 공직 생활로 나아가 활동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상황이 나빠 자연으로 돌아와 은둔하는 상황이다.(‘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262 페이지) 중요한 점은 남명이 대비(문정왕후)를 과부라 한 것, 임금(명종)을 고아라 한 것이 아니라 출처간에서 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자는 남명의 상소에 한 가지 단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나치게 날을 세워 명종으로 하여금 반성게 하기는커녕 반감을 갖게 했다는 점이다. 순조의 장인이자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이 외척인 자신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 공론이 오염되고 정치가 타락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제수(除授)된 군부의 핵심 요직을 거절했다.
여헌 장현광은 공조판서 사직상소를 했다. 그는 퇴계학파로 분류되지만 이이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여든 셋의 노구를 이끌고 선비들을 모아 적과 맞서 싸우자는 통문을 각 지방에 돌렸다. 하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절망에 빠져 산속으로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고 생을 마쳤다.
대동법 시행을 청원한 김육도 상소했다. 우의정 사직상소다. 대동법 전국 실시 주장에 김집이 반대하자 우의정을 사직하겠다며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 바치게 하고 가구가 아닌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하는(소득수준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김육이 좌의정, 우의정 등을 거치며 올린 상소는 모두 십여 차례로 전부 대동법과 관련된 상소였다.
구언(求言)이란 말이 있다. 정치의 잘잘못에 관해 널리 의견을 묻고 청책에 반영하는 행위다. 임금이 구언을 지시하면 어떤 말을 해도 가했다. 임금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해도 되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해도 된다.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실시한 구언에서 박상과 김정은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상소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중종이 그 말을 수용한다면 단경왕후를 폐위시킨 공신들의 죄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중종이 두 사람에게 죄를 묻자 조광조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박상, 김정을 용서하자는 여론이 있었음에도 대간이 죄를 묻자 조광조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없다며 자신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대간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했다. 정언 사직상소다.
미수 허목은 장령(掌令) 사직상소를 했다. 허목은 빈번하게 사직상소를 했다. 허목은 자서에서 특별히 임금(효종)께서 따라주었다는 말을 했다. 1659년 장령 사직상소다. 여기에서 허목은 네 가지를 거론했다. 1) 둔전 폐지, 2) 예 강조, 3) 법질서 확립 주장, 4) 시사(市肆) 강조 등이다.
공한지(空閑地)를 개간해 군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둔전에 대해 태조 때부터 내려온 제도이므로 함부로 폐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허목은 둔전 폐지를 밀어붙였다. 허목은 국민의 복리가 시사(市肆; 시장)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허목은 장사꾼들이 시세를 틈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점하여 팔지 않으며, 없는 말을 만들어 법을 어지럽히고 사욕만 채운 것에 대해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관에 의한 시장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재화가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도록 나라에서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를 보자. 아이러니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강화(講和)를 주장한 사람들은 전쟁 중 지휘부를 구성했던 대신들이고 한 걸음 물러섰던 사람들, 임금을 따라 후방의 안전지대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일본에 복수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재상으로서 전시 군수 보급을 책임졌던 서애 류성룡, 도체찰사가 되어 직접 전선을 누비며 백성과 병사들을 독려했던 이원익, 병조판서로서 군부를 총괄한 이항복 등이 강화를 찬성했다. 강화반대론자들은 강화찬성론자들을 매국노로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는 전쟁이 끝나려 하자 그간의 잘못을 덮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결과로 보인다. 이항복의 우의정 사직상소는 이 때 나왔다.
에둘러 표현되어 있었지만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적 없이 극단의 현실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항복, 이원익 등은 왜군과의 강화에 찬성한다는 이유로 홍문관으로부터 탄핵 받았다. 이항복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 이항복은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는 고금(古今)의 도리는 전(戰), 수(守), 화(和) 셋인데 지금은 화가 최선이라고 했다.
이항복은 자신이 우물쭈물하여 구차하게 용서를 기다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니 이는 자신에게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사직하고자 하니 재가를 바란다고 했다. 저자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동안 다섯 번 넘게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전쟁 수행에 헌신한 이항복에게 척화는 훨씬 쉬운 선택지였을 것으로 누가 보아도 충분한 자격을 가진 이항복이 척화를 주장했다면 대의명분의 수호자로 추앙받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포구에 박세채로부터 유래한 현석동이란 동이 있다. 현석(玄石)은 남계(南溪)와 함께 박세채의 호다. 그는 숙종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이다. 그는 내수사(內需司) 폐지도 건의했다. 내수사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임금은 이곳을 통해 신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치자금을 사용했다. 박세채는 내수사 혁파를 통해 왕의 공공성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박세채는 서열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임기를 늘려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임시기구인 비변사를 없애고 왕 - 재상 - 6조로 이어지는 의정부서사제를 재건하여 현명한 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하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정시한은 숙종의 환국정치를 목숨 걸고 비판한 신하다.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경신 환국(남인 몰락), 기사 환국(서인 제거), 갑술 환국(남인 숙청)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당이 조정을 독점하도록 정국을 운영했다. 이 결과 각 당파가 상대당의 전멸을 의도하게 되었고 보복과 보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극단적인 양상을 보였다.
정시한은 옛말에 편벽되이 한쪽 말만 들으면 간악한 일이 생기고 한쪽에만 맡기면 혼란하게 된다고 하였다며 전하께서는 사람을 좋아할 때는 무릎 위에 안아줄 것처럼 하다가 물리칠 때는 깊은 못에 밀어넣는 것처럼 하여 마음이 일정하지 못하며 주고 빼앗음에 번복이 많다고 썼다.
이조판서 사직상소를 쓴 강희맹은 사숙재(私淑齋)란 호를 썼다. 세종의 조카이고 세조와는 이종사촌간이다. 그는 시서화 3절로 알려진 형 강희안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에 큰 자취를 남겼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정언, 지평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는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에 차례로 제수되자마자 바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자신은 성균관 시절부터 규장각 생활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가르침과 격려 속에서 성장해왔고 지금도 스승이나 다름 없는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쓰고 있으므로 강하게 간언하고 때로는 임금을 신랄하게 비판해야 하는 간관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해 다른 신하들의 견제가 심했고 이것이 정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다. 사직서가 수리되기 전까지는 해당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정약용은 과거제도 개선 방향을 담아 상소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에는 과거만 있고 천거(薦擧)가 없음을 지적했다.
정약용이 천거 병행을 주장한 것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기에 사장될 수 있는 인재를 천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다. 과거 시험은 사람들에게 시험합격을 위한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기에 인재를 천거하는 제도를 도입해 선비들이 학문 도야와 자기 수양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구조상 답안지 전체에 대한 세심한 채점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선착순 300명의 답안지만 평가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답안지 제출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인 선접꾼, 답안지 내용을 구상하는 사람인 거벽(去闢), 답안을 작성하는 사람인 사수(寫手) 등의 용어가 나온 것이다.
정약용은 응시인원을 대폭 줄여 과거 시험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여 편법과 부정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주장은 인재선발제도의 다양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맞춰져 있다.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는 큰 자료거리다. 남명 조식, 미수 허목, 잠곡 김육, 백사 이항복(과 오리 이원익), 현석 정시한, 다산 정약용 등에 대해 많이 알았다. 특히 현석 정시한을 처음 알아 큰 도움을 얻었다. 신을 부르지 말라는 말은 물러난다는 의미이지만 정책을 채택하라는 의미의 배수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