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의 송아지 -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
임택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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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아론의 송아지는 시내산 정상으로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모세가 사십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아론(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자 모세의 형)을 부추겨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말한다. 저자 임택규는 우주와 지구의 기원과 관련해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는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현대 과학에 대해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창조과학을 현대판 아론의 송아지로 규정한다.(28, 29 페이지)

 

엔지니어(토목공학 석사)이자 기독교인인 저자 임택규는 중부 캘리포니아에서 남부 캘리포니아까지의 13만 평방 km에 이르는 곳에 전력을 공급하는 전기회사에 근무한다.(103 페이지) 이런 특성이 반영된 까닭이겠지만 저자는 현장 상황에 밝다. 가령 저자가 언급한 '세계에서 지질학 연구를 가장 많이 진행하는 곳이 석유회사다'(198 페이지)란 말은 저자의 현장 상황에 대한 해박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닐 슈빈이 틱타알릭 화석을 발견한 데에 석유 회사의 도움이 작용했다는 사실도 그렇다.(198 페이지) 닐 슈빈은 3억 8천 5백만년전에는 육상 척추 동물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양서류 같은 육상 척추 동물들의 화석은 2천만년이 지난 3억 6천 5백만년전 지층부터 발견된다는 점에 착안해 석유 회사의 도움을 받아 두 연대의 중간인 3억 7천 5백만년전 지층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했다. 육상 동물로 전이되는 변이를 지니고 있는 물고기 화석을 찾으려면 지층 생성 연대도 중요하지만 위치가 더욱 중요하다.

 

만일 실제 이런 동물이 살았다면 심해 대신 얕은 물가에 살면서 육지로 기어나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닐 슈빈은 북극점에서 950km 떨어진 춥고 황량한 캐나다의 엘즈미어섬(북극해에 위치한 섬의 한 지층)을 5년간에 걸쳐 철저히 조사해 틱타알릭 화석을 발견했다. 저자는 만일 창조과학회에서 주장하는 홍수 지질학에 기반한 이론들이 타당하고 현재 지질학보다 더 정확한 석유 매장지 및 매장량에 대해 예측한다면 석유 업계에서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채산성 있는 석유 매장지를 찾으려고 전 세계의 창조과학 전문가를 영입하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203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닐 슈빈의 발견은 우연한 발견(serendipity)이 아니라 바른 안목에 기반한 치밀한 계획과 탐구 정신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아론의 송아지‘는 우연히 알게 된 책이다.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를 읽고 서평을 쓴 이후 좀더 상세한 내용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페이스북에서 발견한 책이 ’아론의 송아지‘다. 저자는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문자 하나 하나가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서의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8 페이지) 하나님의 메시지는 완전하나 인간의 언어나 문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저자의 책을 읽는 데뿐 아니라 기독교의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문자적 성경 무오설에 입각해 성경에서 과학적 사실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버리는 것이다. 성경과 현대 과학을 문자적으로 일치시키려는 태도를 일치주의라 한다.(33 페이지) 지구 나이를 6천년으로 규정하는 1) 젊은 지구론, 지구와 우주가 6천년전에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이 지구와 우주를 오래된 것처럼 만드셨다고 주장하는 2) 성숙한 지구론, 창세기 1장 1절이 지시하는 우주와 지구의 태동은 까마득한 과거에 일어났지만 큰 시간적 간격 이후 알 수 없는 대파국이 일어나 창세기 1장 2절의 표현대로 혼돈스럽고 공허한 지구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일으켰다는 3) 간격이론, 창조 기사를 설명하는 최초의 7일이란 말에 쓰인 욤이라는 히브리어가 물리적인 24시간이 아니라 굉장히 긴 시간대를 의미한다는 4) 날(day) 시대(age) 이론 등은 일치주의적 해석이다.

 

하나님의 반복되는 생명 창조 사역을 주장하는 1’) 점진적 창조론,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틈새에 하나님이란 존재를 놓아두는 2‘) 지적 설계론, 진화적 창조론이라고도 하는 3 ’) 유신 진화론 등은 비일치주의적 해석이다. 1)은 과학과 너무 거리가 멀다. 2)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3)은 오래된 지구와 오래된 우주라는 과학 이론들을 상당히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는 창조과학의 한 형태다. 4)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 할 만하다.(셋째 날 지구상의 식물들이 창조되었는데 태양은 넷째 날 창조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1‘)은 화석 기록이 지구상에서 전개된 생명현상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는 고생물학의 설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생명의 진화라는 생물학적 설명은 수용하지 않는다. 이는 과학적 일관성과 거리가 먼 설명이다. 2’)는 틈새가 좁아질수록 하나님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설명이다. 3‘)은 자연선택에 의한 우연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을 위한 의도된 우연으로 본다. 진화가 우리에게 함의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신론(理神論)적인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는 기계적으로만 작동하는 자연법칙에만 의존하지 않는다.(64 페이지)

 

저자는 창발(創發) 또는 창발성(emergence)을 설명한다. 전체의 성질이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성질을 뛰어넘어 전혀 다르게 발현하는 것이 창발이다. 공히 연소(燃燒)라는 속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산소, 수소가 만남으로써 연소를 막는 작용을 하는 물이 만들어지는 현상을 우리는 창발의 예로 들 수 있다. 진화에는 창발적 성질이 담겨 있다.(66 페이지) 중요한 것은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구별하는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 이론이고 진화주의는 진화론을 이용해 무신론적인 신념이나 세계관을 확증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과학은 그저 설명일뿐이다.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자연히 과학과 신앙은 갈등 관계도 아니고 독립적인 관계도 아닌 대화해야 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론의 송아지‘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와 과학 또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바른 관계만이 아니다. 의미 있는 여러 과학 지식들을 얻을 수 있다.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창조과학 진영에서 일상적으로 과학과 거리가 먼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저자는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최초의 여성이 아닌 추적이 가능한 모계 유전 경로를 보여준다는 말도 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105 페이지)

 

’아론의 송아지‘를 읽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상식은 진화의 구별이다. 진화는 종 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소진화,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종으로 분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대진화로 나뉜다.(133 페이지) 창조과학회에서는 대진화를 반대한다. 종 분화란 서로 교배하지 못하는(유전자를 교환하지 못하는) 집단들이 진화하는 현상을 말한다.(제리 코엔 지음 ’지울 수 없는 흔적‘ 30 페이지)

 

저자가 노아 홍수 기사를 사실 그대로 믿는 창조과학 진영의 논리를 깨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의 종수는 150만종에 이른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기사가 나온다. 길이가 135미터이고 흘수(吃水)가 7미터인 작은 선박(노아 방주)에 150만종의 지구상의 동물을 암수 한 쌍씩 태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노아 방주는 길이 300 규빗, 넓이 50 규빗, 높이 30 규빗이다. 규빗은 45cm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종류대로가 종의 상위 단계인 속을 넘고, 속의 상위 단계인 과 또는 그 이상의 분류 기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창조과학 진영의 설명을 풀이하면 개과에 해당하는 모든 동물 즉 35종의 현생종과 147종의 멸종한 동물들을 합한 182종의 개과 동물들이 암수 한 쌍씩 총 364 마리가 승선할 필요 없이 노아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개과의 대표 동물 중 한 쌍만이 승선했으며 이후 이 한 쌍으로부터 총 182종의 개과 동물들이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후 4000년의 세월이 지났음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시간은 여러 개과의 동물들(여우, 늑대, 너구리, 코요테, 승냥이 등)이 분화할 수 없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종 분화는 수십만년에서 수백만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이다. 단속평형 이론에 의하더라도 수만년이 걸리는 사건이다.

 

단속평형 이론은 급격한 종 분화를 주장한다. 이는 수십만년 내지는 수백만년에 걸쳐 서서히 분화가 일어난다는 점진주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인 과정으로 진화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급속한 종 분화가 몇만년 안팎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243, 244 페이지) 창조과학 진영은 노아 홍수 때 격변적으로 대륙들이 움직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말한다.(272 페이지) 2016년 9월 12일 경주에서 일어난 리히터 규모 5.8의 강진은 단층대가 1미터나 2미터 정도 떨어져나간 것이 아니라 단지 지각 속의 탄성 에너지가 단층대를 통해서 방출되었기에 일어났다. 당시 지붕 파손 2,333건, 건물 균열 1,494건, 담장 파손 848건, 도로 실금 21건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하나였던 지구를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게 해 10, 000km 이상 이동시킨 막대한 에너지가 지질학적으로 찰라에 불과한 노아 홍수 기간(40일)에 집중되었다면 지구는 수십, 수백번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273 페이지) 물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해 지구가 산산조각 나지 않게 붙잡아 주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과학을 벗어난 설명이다. 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인과 관계를 다루는 영역이기에 인과율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273 페이지)

 

법칙과 이론을 헤아리는 것도 중요하다. 전미과학교육센터에 의하면 법칙은 한 가지 양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이론은 추론, 검증된 가설 및 법칙 등 다양한 명제들을 포함한 더욱 포괄적인 설명 체계다.(181 페이지) 저자의 설명은 균형잡혔다. 모든 과학 이론이나 법칙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철저한 검증 절차를 거치며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경륜과 섭리에 대한 인류의 지혜와 통찰을 담고 있으나 특정한 과학 이론이나 법칙이 영원히 변치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기에 자연에 대해 더 나은 이해가 나타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제한적 성격을 갖는다는 설명이 대표적이다.(182 페이지)

 

기독교 변증에서 엔트로피 증가 법칙 때문에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물학의 진화론이 물리학의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위배된다면 우주 전체에 어떤 별도 은하도 존재하지 못한다. 무수한 별과 은하를 만든 우주의 거시 구조 형성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법칙은 중력 법칙이다. (전자기력이 중력보다 강하다.) 중력이라는 실체가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의해 중구난방으로 퍼져나가려는 물질들을 끌어모아 천억 개의 별을 거느린 은하를 천억 개 이상 거느린 우주의 거시 구조를 탄생 시킨 주인공이다.

 

’아론의 송아지‘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과학 분야는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등이다. 저자는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비타민 C를 체내 합성하지 못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논의를 펼친다. 사람 외에 비타민 C를 합성하지 못하는 동물들로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과일(먹는) 박쥐, 기니피그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이 체내에서 비타민을 합성해내지 못하는 것은 GLO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킨 8번 염색체 때문이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는 변이를 수반한 유전을 의미한다. 인간과 침팬지에서 GLO 유전자가 고장난 구조는 상당히 흡사하다. 오랑우탄과는 좀 더 차이가 크다. 과일 박쥐나 기니피그와는 현저히 다르다. 이는 공통 조상을 보여주는 강력 증거다.

 

인간 세포 속의 염색체 개수는 23쌍(46개)이다. 23개는 아버지에게서, 23개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아 23쌍을 이룬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같은 거대 유인원들은 모두 48개(24쌍)이다. 이는 공통 조상 이론에 대한 강력 도전이었다. 인간 세포 속 두 개의 염색체가 하나로 들러붙어 한 개의 염색체가 되었다는 가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들이 2번 염색체를 발견했다. 이 염색체에는 텔로미어(염색체 양 끝에 존재)가 양 끝단뿐 아니라 한 가운데에도 자리잡고 있다. 센트로미어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정상 염색체는 센트로미어는 하나, 텔로미어는 두 개를 갖는다.)

 

제리 코인의 ’지울 수 없는 흔적‘에 의하면 공통 선조를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바이러스를 들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종의 죽은 유전자인 바이러스도 가지고 있다. 내생성 레트로바이러스는 자신의 게놈을 복사한 뒤 숙주종의 DNA에 끼워넣는다. 바이러스가 정자나 난자를 감염시킨다면 미래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다. 사람의 게놈에 그런 바이러스가 수천 개 있다. 대부분 돌연변이로 무해하게 변한 것들이다. 이는 고대에 우리 선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일부는 사람과 침팬지의 염색체에서 정확히 같은 위치에 존재한다. 두 종의 공통 조상을 감염시켰던 바이러스가 두 종 모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110 페이지)

 

임택규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가 출현할 수 있도록 매우 긴 시간에 걸쳐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고 관장하셨다고 말한다.(219 페이지) 이를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이란 말(예레미야 33장 25절)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책을 통해 정상(定常)우주론을 퇴출시킨 우주배경복사 등 천문학 이론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고 인상적으로 만날 수 있다. 우주배경복사는 빅뱅 당시 발생했던,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이 차디차게 식은 화석이 되어 광활한 우주에 십만분의 1도의 편차로 거의 균일하게 분포하는 빛이다.(263 페이지)

 

생명 또는 생물학에 대한 이론이 마음을 많이 끈다. 인간과 침팬지의 공통 조상설을 뒷받침하는 두 개의 이론(2번 염색체, 8번 염색체)이 특히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고대인들이 물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물을 가두어두는 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유럽 성당의 돔형의 거대하고 투명한 하늘 구조물을 궁창이라 불렀다는 점이다.(277, 278 페이지) 수심이 깊어질수록 태양빛이 물입자에 흩어져버려 전달되는 태양빛이 감소하기 때문에 제한된 태양빛으로 광합성을 하기 위해 깊은 곳에 사는 해조류일수록 진한 붉을 빛을 띤다는 사실도 그렇다.(283, 284 페이지) 중세 연금술사들은 모든 금속을 완벽한 금속인 금이 병에 걸린 상태로 보고 그 병을 치료해 완벽한 상태로 되돌리면 어떤 금속이든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그렇다.(289 페이지)

 

방사성 붕괴 현상으로 한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하는 현상(한 물질의 원자핵이 깨져 완전히 다른 물질이 되는 현상)을 보면 옛 사람들의 생각을 아주 이상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방사성 붕괴의 원인이 되는 힘 가운데 하나가 약한 핵력이다. 저자는 동일과정은 반격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우리 몸의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 동일과정과 격변은 인류가 지구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중요 방법론이라 말한다.(3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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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 금요일엔 역사책 2
문경호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기획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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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는 고려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사회 현실과 내 개인적 호감을 반영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첫 번째 내용은 바다와 강은 곡물이 화폐 역할을 하던 시기에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던 중요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고선박(古船舶)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침몰한 배는 화려한 도자기에서 느끼는 감동과 다른 유형의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보란 듯 곧게 자란 나무들은 목재로 잘려나갔지만 구부러진 나무들은 둥글고 곧게 다듬어져 돛대가 되었다는 말을 한다.

 

본문에는 출수(出水)된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홍수를 뜻한다고 사전에 나오지만 저자는 침몰한 배에서 물건이 건져진 것이란 의미로 썼다. 그런데 저자는 출토(出土)라는 말도 몇 번 썼다.(53 페이지, 197 페이지) 국내에서 처음 출수된 고선박은 1323년 원나라에서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다가 침몰한 것으로 알려진 신안선이다. 도자기와 공예품 27, 000점, 동전 약 28만톤(800만개), 불상을 만드는 고급 향나무(자단목) 1, 100여점 등 박물관 한 개 규모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저자는 출수된 물품들 중 빗<즐; 櫛>과 장기알을 이야기하며 그 가운데 빗을 예로 들어 조선사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가령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는 말을 한다. 얼레빗은 엉킨 머리를 초벌로 빗는 빗이고 참빛은 초벌로 빗은 머리를 곱게 빗거나 이를 훑는 데 쓰던 빗이다. 저자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강조가 적을 얕보고 장기를 두다가 성이 함락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거론한다.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장군이다.

 

저자는 무신들의 물자 수탈이 증가하면서 의도적인 파선이 늘어났을 수 있다는 추정을 했다. 조선 시대에 출발할 때부터 이미 세곡을 빼돌리고 고의로 조운선(漕運船)을 침몰시킨 예가 종종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 추론이다. 조(漕)는 선박을 이용해 서울에 조세를 상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운(漕運), 조전(漕轉), 조만(漕輓) 등은 같은 의미다. 고려 후기 조운을 가장 힘겹게 한 것은 왜구의 침입이었다. 왜구는 단순히 노략질을 하던 도둑이 아니라 일본 남조(南朝)의 정예군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거세지자 우왕은 1376년 조운을 금지했다. 고려의 조운이 재개된 것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였다.(82 페이지) 이성계 일파가 조운을 재개한 것은 경제기반 확립을 위한 조치였다.(161 페이지) 고려 정부와 개경의 관리들은 지방에서 나는 생산물을 쉴 새 없이 수도로 실어날랐다. 무신정권이 1232년 강도(江都)로 천도(遷都)한 후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이나 몽골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삼남에서 강도로 이어지는 뱃길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91, 92 페이지)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은 연구자들에 따라 30년에서 40년까지 다양하게 설정되지만 그 기간 내내 전쟁이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몽골의 고려 침입 목적은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서이지만 고려가 남송 및 일본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몽골은 고려를 맹렬히 공격했다가 홀연 군사를 되돌리곤 했다. 고려 농민들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산성이나 섬으로 집단 이주하여 몽골에 맞서면서도 틈틈이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다. 그렇게 농사짓고 물질을 하여 마련한 곡물과 어물이 배에 실려 강도로 보내졌다.

 

고려에는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이 있어 조운선이 모두 그곳으로 모였다. 충주 일대에서 남한강을 따라 내려온 곡식은 동강(임진강)으로, 서남해 지역에서 올라온 조운선은 서강(예성강)의 광흥창에 짐을 풀었다. 우리나라 지형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산과 강이 많아서 이동하거나 물자를 운송할 때 수레보다 선박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은 두 차례 파견된 원의 사신을 살해했다. 여몽 연합군은 두 차례 일본 원정에 나섰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태풍, 그리고 일본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로 끝났다. 일본은 당시 여몽연합군에 타격을 입힌 태풍을 신풍(神風; 가미카제)이라 불렀다. 여몽연합군의 사령관이 김방경이었다. 숭의전에 모셔진 16공신 중 한 분인 김방경은 충렬왕 대의 공신이다. 삼별초를 토벌했고 일본 원정을 위한 고려와 몽골(원나라)연합군의 사령관 역할을 했다.

 

고려, 조선시대에 운하 시공 역사가 있다. 운하는 굴포(堀浦), 하거(河渠)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 시대에는 서산과 태안 경계, 부평에서 김포까지 굴포를 시도했고 조선 시대에는 서산과 태안 경계, 태안의 의항, 안면도 등지에서 굴포를 시도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제작한 지질도에 따르면 운하 굴착이 시도된 태안과 서산의 경계는 모래와 토지, 자갈 등으로 이루어진 충적층과 석질이 단단한 흑운모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흑운모 화강암은 굴착이 어렵다. 당시 사람들은 불을 지펴 돌을 익힌 다음 정으로 깨트리는 방식으로 바위를 제거했다. 구간이 길면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와 송은 광종대에 국교를 맺었고 거란 침입 이후 문종 대에 국교를 재개했다. 국교 재개 후 송은 고려 사신을 예우하는 데 매우 극진했다. 1084년 고려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밀주 판교진에 고려정을 건립했고 1117년 명주에 고려사라는 관청과 영빈관을 설치했다. 1085년 동주 지사로 부임하던 소식(蘇軾)은 화려하게 지어진 고려장을 보며 오랑캐에게 모든 것을 대주어 백성들은 노비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소식이 이렇게 고려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송은 당시 3용(冗)의 폐단(弊端)이라는 구조적 문제로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冗은 쓸모 없을 용이다.) 3용의 폐단이란 무리한 군대 증강 즉 용병(冗兵)의 폐단, 지속적으로 늘어난 관리로 인한 용관(冗官)의 폐단, 무리한 재정 즉 용비(冗費)의 폐단 등이다. 3용의 폐단으로 인한 만성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신종이 왕안석을 부재상으로 삼아 1069년부터 1076년까지 신법을 추진했으나 사마광, 소식 등 구법당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었다. 이때 농민들은 흉년이 지속되면서 기아에 허덕였다.

 

그러나 송 정부는 빈민 구제보다 고려 사신 접대에 더 정성을 기울였다. 송이 고려를 두텁게 대우한 데에는 신법당이 추구한 연려제요(聯麗制遼) 정책이 있었다. 고려와 송이 연합하여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받아가던 거란을 견제하자는 것이다. 고려 또한 송으로부터 들어오는 문물들이 필요했기에 겉으로는 거란을 상국으로 섬겼지만 송과의 교류를 은밀히 이어갔다. 신법당의 정책이 눈엣사기 같았던 소식의 눈에 고려의 이중 외교가 곱게 비칠 리 없었다. 구법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요구는 지속되었다.

 

소식은 거란이 송과 고려의 관계를 알고 있다가 훗날 트집을 잡는다면 난처해질 것이라 경고했다. 고려인들은 소식(蘇軾; 소동파)을 크게 사랑했다.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입(제3차)으로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인 와중에 소동파의 문집(‘동파문집’)을 발간(경향신문 기사 참고)했을 정도다. 언급한 기사는 소식을 혐한파라 칭했다. 혐고파나 혐려파라 해야 하지 않을지? 어떻든 소동파가 고려를 혐오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이중적 정책을 편 고려와 손잡고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송나라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고려 사신들을 과하게 대접한 현실을 비판한 것이라 해야 하지 않을지?

 

저자는 조선이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것은 조선의 중화주의 탓이라 말한다. 조선은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을 정벌하여 중화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이 중화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을 통해 전해받는 물자와 문명조차도 배격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선은 명이 멸망한 후 명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그 땅에 살았는데 명과 청은 완전히 다른 나라라 인식했다.(192 페이지) 사람이 물건을 나르는 것을 1이라 하면 말은 2, 수레는 10, 선박은 30이라는 주장이 있다.

 

저자는 19세기 말까지 포구마다 빼곡이 정박해 있던 그 많은 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는다. 개항 후 30년이 되지 않아서 국내 선박들은 일본이 들여온 증기선에 그들의 기능을 빼앗겼다. 외국 자본으로 가설한 철도가 포구와 포구를 잇게 되면서 선박의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다. 경강 상인들을 비롯하여 포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선상들이 몰락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저자는 선상의 몰락과 함께 맥이 끊긴 조선 기술을 이야기하며 박물관이나 유명 관광지에 복원된 황포돛배들은 국적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지적한다. 고려 시대 해양사를 재조명하자는 것이 저자의 결론격의 이야기다. 흥미롭게 읽히는 책,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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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4-01-17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재밌네요. 고려거란전쟁 덕분에 확실히 고려사에 관심이 커진 거 같습니다. 고선박 연구자시라 해서 책 내용이 지엽적이고 딱딱할 줄 알았더니 조운선 침몰같은 국내 문제부터 당시 지정학적 정세까지 종횡무진이네요.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했고 그 이유가 신법당과의 갈등과 지나친 고려 사신 접대와 당시 국제관계 때문이었고...리뷰를 훑다가 처음부터 정독했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4-01-17 07:02   좋아요 0 | URL
네.. 얇은 책이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치밀하고 재미 있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DMZ 접경 지역 기행 시리즈를 쓴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DMZ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조배준 교수가 첫 단독 저서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를 냈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DMZ 연구팀은 지난 2020년 연천 지질해설사들을 대상으로 16주 일정으로 통일인문학 강의를 했던 팀이다.

 

축하 인사를 드렸더니 ‘출간을 어떻게 아셨는지요?’라 하셨다. 내가 책을 사 읽겠다고 하자 읽을 만하지 않은 부끄러운 작품이라고 하셨다. 베버 관련 책이기에 베버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책 제목을 삼은 한 문학평론집을 소개했다.

 

베버의 글이란 종교 개혁의 문화적 영향은 상당 부분 종교개혁가들 활동의 예상치 못했던 혹은 심지어 원하지 않았던 결과였으며 때로는 그들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동떨어졌거나 심지어 대립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글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37 페이지) 책 제목은 문학평론가 오문석의 책 ’현대시의 운명, 원치 않았던’이다. 저자 오문석은 자신의 책은 설계 도면 없이 진행된 연구 내용의 사후적 구성물에 가깝기에 굳이 따지자면 원치 않았던 혹은 예상치 못했던 결과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를 훤히 분석해도 미래를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쉽게 통찰을 얻는다 해도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는 어렵다. 원치 않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시인 조지훈의 삶이 아닐지? 조지훈 시인의 경우 수업 시간에 장난삼아 쓴 고풍의상은 등단작이 되었고 심혈을 기울여 쓴 세기말적 탐미의식 및 자의식 계열의 작품들은 제외되었다.

 

기이하지만 묵묵히, 예상을 벗어나는 진폭이 크지 않기를 기대하며 또는 바라며 내 읽기와 쓰기의 루틴을 이어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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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 신앙과 과학의 통합을 추구한 우리 시대 기독 지성 25인의 여정
리처드 J. 마우 외 지음, 캐서린 애플게이트 외 엮음, 안시열 옮김 / IVP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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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의 원제는 ’How I changed my mind about Evolution‘이다. ’나는 어떻게 진화에 관한 생각을 바꾸었나?‘다. 이 책은 신앙과 과학의 통합을 추구한 우리 시대 기독 지성 25인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 주제에 걸맞게 책에는 여러 성경 구절들이 인용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시편 19편 1절, 7절이다. 1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이고 7절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다. 관건은 성경과 자연이고 이는 모두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이다.

 

25인의 필자들 중 한 분인 4번 논자 데보라 하스마(Deborah Haarsma; 물리천문학부 교수)의 책(‘창조, 진화, 지적 설계에 대한 네 가지 견해‘)이 말해주듯 세상의 기원에 관한 견해는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진화창조론, 지적 설계론으로 크게 나뉜다. 1번 논자인 철학 교수 제임스 스미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과학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치르는 지적 수고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함께 산다는(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장 17절) 핵심적 확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문 분야는 과학이 아니라 성경이라 말하는 2번 논자인 스캇 맥나이트(신학 교수)는 과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신은 성경에 대해 덜 과학적으로가 아니라 더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다. 침례교회 목사인 3번 논자 켄 퐁은 창세기는 언제와 어떻게가 아닌 누가와 왜를 논한 책이라는 말을 한다.(50 페이지) 이는 장로교회 목사인 11번 논자인 존 오트버그가 한 어떻게와 얼마나 오래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탐색은 과학이 담당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말(133 페이지)과 상응한다.

 

켄 퐁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셨다는 믿음을 촉구하지만 산더미 같은 증거는 그 기적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빅뱅과 진화를 이용하셨음을 보여준다는 말을 한다.(52 페이지) 이는 다시 데보라 하스마의 글을 인용하도록 한다. 데보라 하스마는 예레미야 33장 25절(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이 천지의 법칙을 만들었음을 언급한다. 데보라 하스마 글의 핵심은 빅뱅과 진화라는 도구와 진화적 생물학과 판구조 운동을 이용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천지의 법칙이란 말이다.

 

데보라 하스마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화적 메커니즘과 풍성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스템을 설계하셨다.(61 페이지) 데보라 하스마의 글이 빛나는 것은 그가 과학적 설명은 우주에 관한 영적 시각을 지워버리기는커녕 사실상 자신을 더 큰 경이(驚異)와 경외(敬畏)로 인도해간다는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5번 논자인 성서학 석좌 교수 트렘퍼 롱맨 3세는 성경의 창조 기사들은 다윈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누가 세계를 창조하였는지에 대한 고대의 개념들을 반박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한다.(69 페이지) 트렘퍼 롱맨 3세는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이 부정된다 해도 성경기자가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라 말한다. 메시지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6번 논자인 목회학 석사 제프 하딘은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의 다양한 답안을 고려하면서도 여전히 신실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81 페이지) 7번 논자인 영화 및 TV 프로그램 제작사 사장인 스티븐 애슐리 블레이크는 진화론을 파고들자마자 대번에 추론의 뛰어난 논리적 흐름에 탄복했고 과학적 데이터로부터 이끌어진 합리성에 의표를 찔렸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스티븐 애술리 블레이크는 중요한 말을 한다. 우주의 구조와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무작위적 사건의 발생으로 보이는 미시적 차원이 실은 질서와 안정의 구성 요소라는 거시적 차원이라는 것이다.(94 페이지)

 

8번 논자로 나선 임상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진화는 인류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우아한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다. 프랜시스 콜린스 역시 중요한 말을 한다.“하나님이 우주와 그것을 다스리는 법칙들을 창조하셨다면, 그리고 그분이 인간들에게 그 법칙들의 작용을 알아낼 지적 능력을 주셨다면 그분은 과연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무시하기를 바라실까?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위축되거나 위협받으실까?”(102, 103 페이지)

 

프랜시스 콜린스가 설명하는 진화창조론은 주목할 만하다.“공간이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칙들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척박한 불모지로 남을 뻔했던 우주를 생명체들로 채우고자 진화라는 우아한 메커니즘을 통해 모든 종류의 미생물과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바로 그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지능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특별한 생명체를 만들기로 선택하셨다"(103 페이지)는 것이다.

 

조직 신학 교수 올리버 크리스프는 9번 논자로 나서 자신은 중요한 세 가지 원칙에 의거해 신앙과 진화의 연결성에 대해 숙고했다고 말한다. 1)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2)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3) 하나님은 신비로우시다 등이다. 올리버 크리스프는 진화와 성경적 기독교는 이따금 특정 시각에서는 갈등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언정 원칙적으로는 반드시 서로 조화로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12, 113 페이지) 올리버 크리스프는 하나님이 자연 선택을 포함한 자연적 과정들을 예정하신다고 말한다.

 

10번 논자인 천문학 박사 제니퍼 와이즈먼은 성경은 우리가 먼지와 같고 자라났다가 곧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다고 상당히 명쾌하게 선언(시편 103편 14절, 베드로전서 1장 24절)하는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거듭 말한다고 말하며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우주에서 차지하는 작은 시공간에 있지 않고 우리가 존재하며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이 관계가 영원히 존속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전한다. 앞에서 언급한 존 오트버그는 신앙은 책에 적힌 것을 무조건 믿고 이성에 귀를 막는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다고 말하며 과학적 증거는 절대 신앙의 합리성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136 페이지)

 

12번 논자인 생물학 교수 데니스 베니머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창세기에 대한 특정 해석이나 문자적 성경 해석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학과 교수 프러빈 셋후파티는 13번 논자로 나서 자신에게 진화 창조론은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자로 받아들이고 그 창조에 생물학적 진화가 이용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53 페이지) 프러빈 셋후파티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물리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靈), 그분과 교제하기를 갈구하는 마음, 그분이 임명하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베드로전서 2장 19절)이다.(153 페이지)

 

14번 논자인 생물학 교수 도로시 보오스는 자신이 생태학을 연구함으로써 누리는 특권을 넷으로 정리했다. 경쟁, 공생, 자연선택, 적응 등이다. 자신이 이해하는 과학이 자신의 소중한 신념들과 이루는 조화가 내적 통일성을 선사한다고 말하는 도로시 보오스는 자연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 일과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일을 수행하자고 제안한다.(163 페이지) 바이오로고스(BioLogos) 편집장인 15번 논자 짐 스텀프는 존 월튼의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라는 책을 읽고 무질서의 꾸러미들이 고립적으로 산재했던 마음속에 질서가 자리 잡히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바이오로고스 재단은 신이 다른 종의 진화를 메커니즘으로 사용하여 세상을 창조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기독교 옹호 단체다.

 

존 월튼은 ’기원 이론‘(2023년 2월 출간)의 여러 공저자들 중 한 분이다. ’기원 이론‘은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화학, 생물학 등 현대 과학의 성과들 안에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책이다. 수학의 분석 도구가 문학의 위대한 사상을 만나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고 말하는 짐 스텀프는 존 월튼의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를 통해 구약 본문을 해석할 때 반드시 고대 근동 세계를 고려해야 함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168 페이지) 짐 스텀프는 존 월튼의 논의에 의거해 바벨탑은 땅의 그 지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짐 스텀프는 우리 문화에서 진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뛰어난 말솜씨로 진화를 모든 형태의 악과 하나로 묶는 일을 워낙 능숙하게 해낸 덕분에 단지 과학적 증거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진화 창조론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174 페이지) 콜로니얼 교회 담임 목사인 대니얼 해럴은 16번 논자로 나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은 우리 자신의 무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로 포문을 연 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학문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든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라 말했다.(182 페이지)

 

대니얼 해럴은 신학은 하나님이 손수 하신 일을 드러내는 과학적 발견을 경축해야 하는데 단순히 그럴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신약학 교수 톰 라이트는 17번 논자로 나서 오늘날 자신이 느끼기에 영국에서는 과학이 하는 말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말을 했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알리스터 맥그래스, 존 폴킹혼 같은 과학자겸 신학자들이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두 세상을 슬기롭고도 풍성하게 통합시키는 사고방식의 본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192 패이지)

 

18번 논자인 옥스퍼드 대학교 인류학과 연구원인 저스틴 배럿은 자신이 언제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가 현재로서는 증거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석이라는 최종 결론에 도달하였는지 특정하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점진적 과정이었다. 저스틴 배럿은 그리스도인이나 무신론자나 우쭐대면 꼴불견이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을 한다. 과학과 종교를 가르치는 교수 데니스 래머로는 19번 논자로 나서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흔들린 자신의 여정에 대해 논했다. 진화가 거짓임을 밝힐 과학적 증거를 수집해 진화를 격파할 책을 쓰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데니스 래머로는 진화의 과학적 증거가 압도적인 현실과 마주쳐야 했다.

 

데니스 래머로에 의하면 과학에서 진화에 대한 논쟁이 없고 진화와 경쟁하는 이론도 없다. 데니스 래머로는 진화가 참임을 가리키는 전이(轉移) 화석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데니스 래머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머니의 태에서 배(胚) 발생이라는 하나님의 자연 과정을 이용하여 창조하셨음을 믿는다고 말한다.(211 페이지) 데니스 래머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창조주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발생 중인 우리의 몸에 온전한 팔이나 다리를 척척 가져다 붙이는 기적을 행하신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것도 진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덧붙인다. 데니스 래머로는 과학을 기독교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정의한다.

 

러셀스트리트 교회 담임 목사 로라 트루액스는 20번 논자로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 하나의 완고한 이해의 틀 안에 전능자를 감히 가두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 앞에서 자신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졌다고 말한다.(219 페이지) 로라 트루액스에 의하면 우주의 경이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인간의 유전 암호와 진화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인간 기원의 길고도 복잡한 이야기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는 지금은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창조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들과 교류하면서 감탄과 기쁨의 소리를 외칠 때다.(221 페이지)

 

21번 논자 로드니 스콧은 생물학 교수다. 그는 진화 이론이 사람이 신심을 가질 수 있거나 가져야 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대학원에 들어가 성경 교회라는 모임에 출석하던 로드니 스콧은 그 시기가 놀라운 성장의 시기였던 동시에 약간의 영적, 지적 혼란을 겪은 시기였다고 설명한다. 선택한 직업인 생물학과 신앙이 어떻게 관련되는지와 관련하여 혼란스럽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많이 접하던 순간 하나님께서 척이란 사람을 멘토로 붙여주셨다고 말한다. 척은 과학과 신학 모두 인간의 노력과 시도로 이루어지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결함이 겉보기 갈등을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두 학문의 연구 대상인 창조 질서와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서로 조화로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227 페이지) 로드니 스콧은 진화는 하나님이 하셨고 어떻게 하셨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말을 던진다.(230 페이지) 선교학 교수 아모스 용은 22번 논자로 나서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은 어떻게 성경이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와 보완적이지는 않더라도 양립가능한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237 페이지)

 

23번 논자인 성경 교사이자 목회자인 리처드 딜스트롬은 하나님은 두 권의 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말을 했다. 리처드 딜스트롬은 하위문화에는 강력한 자기 준거성이 펴지게 된다고 말한다. 폐쇄적 모임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 자신과 생각과 신념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는 우리들의 관점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245 페이지) 리처드 딜스트롬은 프리먼 다이슨의 말을 전한다. 다이슨은 ”우주와 그 설계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떤 의미에서 우주가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증거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246 페이지) 자연과학과 해석학(성경을 해석하는 과학)은 겸손과 상호 의존 자세를 가져야 한다.(248 페이지)

 

겸손과 상호 의존이 부족하면 영혼 없는 물질주의에 빠지거나 자연과학의 발견들과 끊임없이 마찰하는 근본주의에 발목을 잡힐 것이다. 바이오로고스 프로그램 디렉터 캐서린 애플게이트는 24번 논자로 나서 과학을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무신론을 신봉하게 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들 들려주었다. 과학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된 캐서린 애플게이트는 자신의 연약한 신앙의 관(棺)에 마지막 못을 박을 것만 같은 분야는 피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진화였다.(254 페이지) 진화는 생물학의 이론적 토대라는 말(138 페이지)과 비교할 만하다.

 

세포 골격 역학 공부 길에 들어선 케서린 애플게이트는 거의 매일 진화에 관한 무지를 마주하면서 진화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캐서린 애플게이트는 무작위적 돌연변이에 따른 자연선택이 진화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가 묻는다. 캐서린 애플게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창조 질서의 구조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증거를 거부하지 않고 창조주이신 놀라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말을 한다.(257 페이지)

 

풀러 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신학교 교수 리처드 마우는 마지막 25 번 논자로 나서 총장 시절 겪은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주었다. 풀러 신학교의 한 교수가 지적 설계 운동의 한 측면을 비판하는 글을 쓰자 그간 수백만 달러를 누적 기부한 한 부유한 기부자가 학교측에 그 교수에게 종신 재직권을 부여한다면 앞으로 풀러 신학교에 한 푼도 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리처드 마우는 죄송합니다만 정 그렇게 느끼신다면 다른 신학교를 찾아서 기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란 말을 했다. 느껴지는 바가 많은 이야기다.

 

리처드 마우는 극도로 중요한 이슈를 토론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십자가 아래에 마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271 페이지) 상징적인 말 같다. 스물 다섯 논자는 하나 같이 열린 사고, 진지한 사고의 담지자들이다. 신앙과 과학 또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경우도 많지만 모두 지혜롭고 조화롭게 문제를 해결한 분들이기도 하다.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필자(논자)들을 보며 지적 자극을 많이 받았다. 아쉬운 점은 창조론과 지적 설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을 했다면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어렵지 않게 주요 논지들을 잘 설명한 글이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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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성, 권력으로 읽다 금요일엔 역사책 6
권순홍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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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 출판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권순홍의 ‘고대 도성, 권력으로 읽다‘는 자료 부족으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려고 가상의 마을 고도를 내세워 서술한 역사서다. 저자는 고도를 古都로 설정한 뒤 거기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논증들을 덧붙였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저자가 윌리엄 조지 호스킨스다. 역사 지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호스킨스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인공물은 물론 자연의 풍경까지도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불평등의 기원, 권위의 창출’이란 챕터에서 저자 권순홍은 잦은 전쟁과 교역을 통해 인근의 잉여 소출을 취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커진 고도를 통해 전쟁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고도의 지도자는 자신의 자리가 하늘이 정해준 자리라고 선언한다. 책에 의하면 사람이 모여 산다는 이유만으로 도시라 부를 수 없다. 계층의 분화, 권력의 출현을 매개로 한 지배계층의 집주(集住)가 필요조건이고 자급자족성을 배제함으로써 필요해진 외부 의존성이 충분조건이다.

 

도시는 차별과 서열화에 근거하는 조직이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종묘와 선군(先君)의 주(主)가 있으면 도(都)이고 그렇지 않으면 읍(邑)이다. 주(主)는 위패를 말한다. 주대(周代)의 혈연적 종법 질서에서 대종(大宗)은 천자이고 그 지위는 적장자에게 이어지며 나머지 자식들은 제후로 봉(封)해진다. 적장자는 본처를 의미하는 적실(嫡室) 또는 정실(正室)의 장자를 의미한다. 왕의 권력은 설화나 상징이라는 관념적 장치뿐 아니라 무력에 바탕한 강제력이라는 실제적 장치를 통해 행사된다.

 

저자는 구금시설과 공적 세금이 어떤 과정과 배경에 따라 비롯되었는지 설명한다. 고도는 차별과 구분에 따라 운영된다. 처음에 전리품은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지만 점차 공을 세운 순서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율령과 불교가 절대적 권력의 장치로 기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400여년의 집안(集安) 생활을 뒤로 하고 평양으로 천도했다. 국내성은 집안의 도성이었다. 도읍을 옮긴가는 의미의 천도는 遷都라 쓴다.(흥미롭게 옮길 ‘천; 遷‘은 낭떠러지의 의미도 갖는다.)

 

집안 지역의 왕릉급 고분은 도성 경관에서 빠질 수 없는 마루지(識)였다. 마루지는 랜드마크의 순화어다. 저자는 집안 지역과 달리 거대한 고분들이 도성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진 평양에 대해 그것은 도성 경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초대형 고분들의 상징적 기능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궁금한 것은 집안의 초대형 계단식 적석총을 대신할 평양의 새로운 경관은 무엇일까?다.

 

평양 천도 전후 고구려 도성 경관은 왕릉급의 초대형 고분을 대신한 불교사원의 밀집, 평지 성곽을 대체한 격자형 가로구획으로 마무리되었다.(105 페이지) 격자형 가로구획은 서열을 시각화하는 것이다.(113 페이지) 격자형 가로구획은 지배질서로서 예제(禮制)를 구현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예란 친소(親疎; 친함과 친하지 않음)를 정하며 혐의(嫌疑; 꺼리고 싫어함)를 결단하며 동이(同異; 같음과 다름)를 구분하며 시비(是非; 옳고 그름)를 명백(明白)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란 권력의 범주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이다.(115 페이지) 

 

삼국사기 권 18에 광개토왕 2년(392년) 가을 백제가 남변(南邊)을 침입하자 왕이 장군에게 명하여 그를 막았고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이를 후일의 평양 천도와 무관할 수 없는 일이라 설명한다. 전기 평양에는 평지 성곽이 없었다. 물론 성곽의 부재가 경계의 부재나 공간의 평등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고구려 도성은 배타적인 권력 공간으로 궁실(宮室) 및 종묘 등을 내포해야 했다.(96, 97 페이지)

 

성(城)은 군(郡)을 위요(圍?)하기 위한 것이라면 곽(廓)은 민(民)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고구려는 화폐경제가 성장할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중심지를 위협 받는 외부의 침입을 겪지도 않았다. 곽(廓)이 필요 없었던 이유다. 342년 고구려가 전연의 침공에 대비해 세운 국내성은 집안 평지성일 가능성이 크다. 247년에 조영(造營)한 평양성의 성벽을 공유하는 가운데 더 두텁고 견고하게 새로 쌓는, 수즙(修葺)이 아닌 축(築)일 수 있었다. 수즙(修葺)의 즙은 수선(修繕)의 의미를 갖는다.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저자에 의하면 천도에는 국내외적 조건이 두루 관계했다. 저자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에 대해 논한다. 장안성에는 전기 평양 도성에 없던 평지 성곽이 등장했다. 그것은 고구려가 북위 낙양성의 도성 체제를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그 점이 천도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기 평양 도성과 달리 장안성에는 도성 내 성벽에 의한 관민의 공간적 구분이 이루어졌고 추정이지만 높은 담을 통한 방장제(坊墻制)가 시행되었다.

 

방장제란 곽(郭) 안을 벽(墻·장)으로 분할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주민들이 방의 문이 열리는 낮에는 자유롭게 외부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기 전 모두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는 유목민족이 가축을 기르는 것과 유사했다. 저자는 우리의 근현대사는 권력의 폭력성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역사였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몇 권의 책이 읽고 싶어진다. 이기봉의 ’임금의 도시‘, 김용만의 ’숲에서 만난 한국사‘,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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