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도성, 권력으로 읽다 금요일엔 역사책 6
권순홍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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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 출판사의 '금요일엔 역사책'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권순홍의 ‘고대 도성, 권력으로 읽다‘는 자료 부족으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하려고 가상의 마을 고도를 내세워 서술한 역사서다. 저자는 고도를 古都로 설정한 뒤 거기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논증들을 덧붙였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저자가 윌리엄 조지 호스킨스다. 역사 지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호스킨스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인공물은 물론 자연의 풍경까지도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불평등의 기원, 권위의 창출’이란 챕터에서 저자 권순홍은 잦은 전쟁과 교역을 통해 인근의 잉여 소출을 취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커진 고도를 통해 전쟁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고도의 지도자는 자신의 자리가 하늘이 정해준 자리라고 선언한다. 책에 의하면 사람이 모여 산다는 이유만으로 도시라 부를 수 없다. 계층의 분화, 권력의 출현을 매개로 한 지배계층의 집주(集住)가 필요조건이고 자급자족성을 배제함으로써 필요해진 외부 의존성이 충분조건이다.

 

도시는 차별과 서열화에 근거하는 조직이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종묘와 선군(先君)의 주(主)가 있으면 도(都)이고 그렇지 않으면 읍(邑)이다. 주(主)는 위패를 말한다. 주대(周代)의 혈연적 종법 질서에서 대종(大宗)은 천자이고 그 지위는 적장자에게 이어지며 나머지 자식들은 제후로 봉(封)해진다. 적장자는 본처를 의미하는 적실(嫡室) 또는 정실(正室)의 장자를 의미한다. 왕의 권력은 설화나 상징이라는 관념적 장치뿐 아니라 무력에 바탕한 강제력이라는 실제적 장치를 통해 행사된다.

 

저자는 구금시설과 공적 세금이 어떤 과정과 배경에 따라 비롯되었는지 설명한다. 고도는 차별과 구분에 따라 운영된다. 처음에 전리품은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지만 점차 공을 세운 순서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율령과 불교가 절대적 권력의 장치로 기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400여년의 집안(集安) 생활을 뒤로 하고 평양으로 천도했다. 국내성은 집안의 도성이었다. 도읍을 옮긴가는 의미의 천도는 遷都라 쓴다.(흥미롭게 옮길 ‘천; 遷‘은 낭떠러지의 의미도 갖는다.)

 

집안 지역의 왕릉급 고분은 도성 경관에서 빠질 수 없는 마루지(識)였다. 마루지는 랜드마크의 순화어다. 저자는 집안 지역과 달리 거대한 고분들이 도성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진 평양에 대해 그것은 도성 경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초대형 고분들의 상징적 기능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궁금한 것은 집안의 초대형 계단식 적석총을 대신할 평양의 새로운 경관은 무엇일까?다.

 

평양 천도 전후 고구려 도성 경관은 왕릉급의 초대형 고분을 대신한 불교사원의 밀집, 평지 성곽을 대체한 격자형 가로구획으로 마무리되었다.(105 페이지) 격자형 가로구획은 서열을 시각화하는 것이다.(113 페이지) 격자형 가로구획은 지배질서로서 예제(禮制)를 구현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예란 친소(親疎; 친함과 친하지 않음)를 정하며 혐의(嫌疑; 꺼리고 싫어함)를 결단하며 동이(同異; 같음과 다름)를 구분하며 시비(是非; 옳고 그름)를 명백(明白)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란 권력의 범주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이다.(115 페이지) 

 

삼국사기 권 18에 광개토왕 2년(392년) 가을 백제가 남변(南邊)을 침입하자 왕이 장군에게 명하여 그를 막았고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는 이를 후일의 평양 천도와 무관할 수 없는 일이라 설명한다. 전기 평양에는 평지 성곽이 없었다. 물론 성곽의 부재가 경계의 부재나 공간의 평등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고구려 도성은 배타적인 권력 공간으로 궁실(宮室) 및 종묘 등을 내포해야 했다.(96, 97 페이지)

 

성(城)은 군(郡)을 위요(圍?)하기 위한 것이라면 곽(廓)은 민(民)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고구려는 화폐경제가 성장할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중심지를 위협 받는 외부의 침입을 겪지도 않았다. 곽(廓)이 필요 없었던 이유다. 342년 고구려가 전연의 침공에 대비해 세운 국내성은 집안 평지성일 가능성이 크다. 247년에 조영(造營)한 평양성의 성벽을 공유하는 가운데 더 두텁고 견고하게 새로 쌓는, 수즙(修葺)이 아닌 축(築)일 수 있었다. 수즙(修葺)의 즙은 수선(修繕)의 의미를 갖는다.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저자에 의하면 천도에는 국내외적 조건이 두루 관계했다. 저자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에 대해 논한다. 장안성에는 전기 평양 도성에 없던 평지 성곽이 등장했다. 그것은 고구려가 북위 낙양성의 도성 체제를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그 점이 천도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기 평양 도성과 달리 장안성에는 도성 내 성벽에 의한 관민의 공간적 구분이 이루어졌고 추정이지만 높은 담을 통한 방장제(坊墻制)가 시행되었다.

 

방장제란 곽(郭) 안을 벽(墻·장)으로 분할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주민들이 방의 문이 열리는 낮에는 자유롭게 외부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기 전 모두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이는 유목민족이 가축을 기르는 것과 유사했다. 저자는 우리의 근현대사는 권력의 폭력성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역사였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몇 권의 책이 읽고 싶어진다. 이기봉의 ’임금의 도시‘, 김용만의 ’숲에서 만난 한국사‘,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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