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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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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애틀랜타, 세인트루이스, 앨커트래즈, 워싱턴 DC, 뉴욕 등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다룬 ‘도시로 보는 미국사’는 도시를 혁신과 투쟁의 공간, 인간과 상호 작용을 통해 항상 변화해가는 혁신의 공간으로 본 책이다. 혁신과 투쟁의 공간이라는 말이 제시되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을 보며 투쟁, 정확하게는 폭력이 문제가 되는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박진빈 교수의 책은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저자는 20세기 초 미국 연방정부 임대 주택 정책의 역사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필로그에 소개된 바대로 미국의 주요 도시들은 개발을 위한 개발을 되풀이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중심지가 되었다. 뤼도빅 루블레르가 ‘달라이 라마와 히치하이킹을’에서 중국을 전역에 걸쳐 낙후된 지역을 일사불란하게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짓는 미친 속도의 나라라 정의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책을 좋아해 도서관을 자주 찾는 나는 도서관이 문화 컨텐츠의 관점이 아닌 토건(土建)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곳이란 말을 듣고 잠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딱 적당한 만큼의 초록이라는 의미의 just green enough란 말이 있다. 중도란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첫 도시로 설정된 필라델피아는 상징적이다. 우애의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필라델피아는 그에 걸맞게 이질적인 이민자들로 홍역을 앓는 곳이 되었다. 균형을 잃은 결정이지만 국민 투표로 브렉시트를 감행하게 된 영국의 사례를 생각할 만한 부분이다.


필라델피아는 가장 부패한 자족적인 도시로 불렸다. 책은 필라델피아의 자구책을 보여준다. 저자는 필라델피아가 초기 이민자의 증가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1876년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통해 주변 도시의 급성장으로 인해 서서히 잃어가던 전국적 관심을 되찾아 역사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새로이 정립한 것에 그친 것을 작은 관심이 부족한 결과로 본다. 대도시의 우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다. 시카고 역시 갈등을 빼놓을 수 없다. 흑백갈등이다.


도시는 갈등과 투쟁, 문제해결의 반복으로 점철된 공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차 대전 특수(特需) 속에서 급성장한 애틀랜타도 문제의 도시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애틀랜타는 인종 통합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백인들이 대도시 외곽에 대대적인 주거지 개발이라는 교외화(郊外化)로 맞섰다. 세인트루이스는 애틀랜타와 반대로 문제를 안았다. 팽창 도시로서 애틀랜타가 홍역을 치루었다면 세인트루이스는 공장이 버려지고 주택이 새 주인을 찾지 못하는 현상 등으로 낙후(落後) 일로를 걸었다.


모든 도시가 팽창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공동화(空洞化)가 현안(懸案)이 된 것이다. 물론 공동화의 대안은 재개발이다. 1970, 80대년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전체 인구는 감소하는 가운데 흑인 인구는 증가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나쁜 것은 흑인 인구가 증가했음에도 흑인 분리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지역에서 흑인이 얼마나 빠져나가야 정상적인 인구 분포 수준이 되는가, 란 지수가 설정된 결과이다.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미국 도시들에서 확인되는 인종 분리의 정도는 인종 분리가 완화되고 인종간 평등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란 세간의 믿음을 배반한다고.


“여전히 흑인 게토가 있고 백인들의 교외가 있으며 도심지 슬럼은 빈민 혹은 최하위 계층의 전유물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분리가 단지 인종과 인종을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하는 일종의 사회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181 페이지) 미국의 역사는 정복(을 위한 학살)과 무단점거의 역사이다. 이는 이와사부로 코소의 관점으로 누구나 공감할 주지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사부로의 주장이다. 그는 도시를 거리의 꿈틀거림, 웅성거림, 시끌벅적함을 통해 춤을 추는, 움직이는 신체 즉 유체(流體)로 본다.


‘도시로 보는 미국사’는 용산 참사를 보며, 파괴적 결과라는 점에서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도시의 무분별한 상업화를 보며 죽어가는 도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나라에도 시사적인 책이다. 1964년 독일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가 런던 시내에서 노동자 계급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유입되면서 기존 거주자들인 노동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붙인 젠트리피케이션은 역사가 꽤 긴 이름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결국 도시 공간이 계급적으로 독점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인류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닐 스미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하는 도시 정부의 특성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도시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주도하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를 포함한 철저한 불관용 정책이다.


저자는 어디서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떠밀려 다니다가 결국 도시의 언저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가 진단했듯 상황은 대단히 어렵다. 인상적인 것은 마이클 카츠(Michael B. Katz)의 주장이다. ‘왜 미국 도시들은 불타지 않는가?’란 책에서 그는 그렇게 차별받고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20세기 내내 인종 분리가 진행된 결과 흑인들이 분노를 쏟아 부을 백인이 존재하지 않아 흑인들 서로 분노의 총구를 겨눈다는 것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주의가 맹신되는 탓에 사회 구조의 변화를 위한 투쟁에의 의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카츠의 주장 중 하나이다. 군대화한 경찰이 마약과의 전쟁을 구실로 사소한 마약 관련 범죄에 연루된 흑인을 대규모로 투옥하는 등의 이유로 불을 지를 만큼의 정치화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지적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 카츠는 혹시 우리가 그동안 도시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데 너무 애쓴 것은 아닌지, 실패 담론에 가려진 성공한 공공 임대주택의 예들이나 연방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사적 재원을 구축해 도시 주택 문제에 접근한 예들을 언급한다. 저자의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던) 신자유주의의 뿌리나 현재를 다룬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망의 증거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 이후 최신 흐름을 반영한 ‘도시로 보는 미국사’는 그 만큼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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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결국 흥행을 우선시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지만 대중적인 작가들을 저는 반기지 않습니다. 작품성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데 그들도 작품성에 비중을 두었다면 흥행이 잘 안 되는 작가들 이상으로 잘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성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론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기도 있으면서 작품성도 갖춘 작가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기 작가들이 대중에 영합하느라 작품성을 발휘할 여력이 없는 것과 실제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올해 한강 작가의 수상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20년 전부터 그 작가의 작품을 아끼듯 읽어온 저로서는 숨겨둔 애인을 빼앗긴 것 같기도 합니다.(오늘 경복궁 공부를 함께 한 한 여자분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남자들 중에서 그런 감정을 갖는 경우는 아예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더군요.) 참 많은 사람들이 그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급(?)해 읽는 것을 보며 보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강, 채식주의자 깊게 읽기’ 같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성과는 별개로 한강 작가와 함께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가를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작가를 찾아 읽는 것도 창의적으로 해야겠지요? 오늘 이정우 교수의 ‘소은(素隱)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를 읽다가 “어떨 때는 엘레아학파를, 어떨 때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써먹는 소피스트들의 양동작전을 분쇄하는 길이기도 하다.”(13 페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지난 해 읽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떠올렸습니다. 상반되는 아르미니우스적 가치관(자유주의)과 칼뱅주의(예정론)를 널뛰듯 오가는 기회주의적 신앙의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복궁 어디 어디인가를 넘어서는데 선생님께서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경계인 문지방을 밟는 것은 중간자적 존재 즉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존재도 아닌 좀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창의력(이라고 할 것까지 없겠지만)은 이런 방식으로 건져올리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엘레아학파의 사상은 다(多)와 운동(運動) 즉 물리적 세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상이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만물유동론(萬物流動論)이다.: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참고)


수상을 계기로 그간 작품성이 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많이 읽히지 않은 작품들이 읽히고 한국 문학 - 한강 작가의 수상이 한국 문학의 영광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무리한 끼어 맞추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 도 더불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랜 즉 선호(選好) 즉 노쇠함 때문인지 이제 (한강 작가 본인이 이런 글을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한강 작가가 소설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도 자주 출간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대체로 흥행과 관계 없는 장르인) 시를 쓰시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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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랑한 클래식 - 영화로 보고, 글로 읽고, 귀로 듣는 클래식의 세계
최영옥 지음 / 다연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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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클래식 음악의 관계를 해명한 책을 읽는다.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이다. 영화와 그림(한창호 지음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와 정신분석(김서영 지음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영화와 인문학(김영민 지음 '영화인문학'), 영화와 경제학(박병률 지음 '영화 속 경제학') 등 영화와 함께 생각하는 또는 영화로 만나는 다양한 전문 분야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영화보다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이겠지만 최영옥 저자의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을 클래식에 비중을 두고 대하게 된다.


최근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초기 작 중 하나인 '여수의 사랑'에는 비제의 칼멘 중 하바네라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자흔이라는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여수(麗水)에 가면, 나한테도 음악 같은 건 필요 없어요"란 답을 한다. 영화화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중편 소설이고 드라마틱한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관련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영화 제작자들도 내가 그랬듯 자신의 영화를 빛낼 클래식 음악들을 고르고 생각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리라.


말했듯 클래식 음악보다 영화를 덜 좋아하는 나는 클래식 음악이나 작곡가들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들을 공부하듯 들으려는 나는 그의 교향곡 54악장이 수록된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토마스 만 원작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아직 감상하지 못했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2악장이 아름답게 흐르는 '엘비라 마디건'을 보며 비슷한 듯 다른 투명한 슬픔이 인상적인 같은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32악장을 영화에 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 최영옥 님은 음악전문지 기자, 음악칼럼니스트, 음악 평론가, 공연 기획자 등 음악 전문가이지만 강의를 위해 클래식 음악들이 흐르는 영화를 찾고 훑는 등 노력을 기울이느라 가끔 자신이 클래식 음악 전문인지 영화 전문인지 헷갈린다고 말한다.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은 저자의 말에 의하면 영화들 중에서도 클래식이 될 영화들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흔히 클래식이라면 고전 또는 낭만 음악 위주로 생각을 하지만 고전(古典)이란 말이 의미하듯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명작들을 의미한다.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은 클래식 음악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다. 거기에는 작곡가, 연주자, 영화감독 등과 관련된 다양한 사연들이 있다. 지난 2000년 바흐 서거 250주년 기념으로 일본의 NHK가 방영한 어느 사찰에서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 전곡 연주를 들으며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영화였다면 그렇게 고즈넉한 분위기에 투박한 첼로 선율을 수십 분씩 담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영화 이야기는 이런 방식으로 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영화는 당연히 스토리가 위주이다. 거기에는 사람들의 삶과 사연이 깃들어 있다. 나는 아직 영화를 뇌과학을 이해하기 위한 또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물론 이는 인간과 삶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 가운데 하나가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을 여의고 기쁨을 얻는 것(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191 페이지)이듯 내가 영화를 통해 뇌과학을 이해하려는 것도 삶과 사연들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더 잘 어울려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도로 올해 초 읽은 책이 제프리 잭스의 '영화는 우리를 어떻게 속이나'이다. 잭스에 의하면 뇌가 진화해온 오랜 시간 동안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뇌의 인식 시스템은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한다.('영화는 우리를 어떻게 속이나' 16 페이지) 음악은 그렇게 영화가 우리를 교묘히 속이는 것을 돕는 보조 장치가 아닐지?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이 다룬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46편의 영화 중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이 나오는 '쇼생크 탈출'부분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나온다.


프랭크 다라본트가 감독한 이 영화에는 수감자 앤디가 교도소 방송실의 문을 닫아걸고 음반을 트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모차르트의 여성 이중창 곡인 '저녁바람 부드럽게'로 수감자들은 느닷없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잊고 있던 바깥 세계의 자유를 떠올린다. 음악은 우리를 속이는 영화를 돕는 조력자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매개체이기도 한 것이다.


앞서 정신분석 이야기를 했지만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에는 "괴이쩍은 사랑의 정신분석학적 보고서"인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와 그 영화에 수록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이야기가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김서영 교수의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에도 이 영화가 나온다. 김서영 교수는 "정신분석이란 바로 이렇게 드러난 이야기와 함께 또 다른 이야기를 읽어 내게 만드는 도구"('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204 페이지)란 말을 한다.


최영옥 저자는 "난해하고 모호하기 그지 없"는 영화라는 평과 함께 감독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마다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피아니스트'란 말을 던진다. 저자는 세상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을 겪은 슈베르트의 삶을 생각하면 해답이 나올 것도 같다는 말을 한다. 영화에는 이렇듯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제 영화들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어쩌면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 영화를 감상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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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특성은 명쾌함과 단순함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2016년 6월 10일 한겨레신문)는 문강형준의 말에 김재인은 “니체의 말을 빗댄 뻘소리. 인문학은 명료하다.“(2016년 6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는 말로 응수했다. 흥미롭다. 내가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판단할 여력은 없다. 다만 인문학자들 사이에도 관점의 차이는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문강형준은 영문학, 독문학, 사회학을 공부했고 김재인은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겠다. 덧붙인다면 그들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인문학을 체계 없는 학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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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쌩 2016-08-24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무엇으로 삼고 출발했냐에 따라, 이런 인식의 차이를 불러온게 아닐까요?
제가 아는 모교수도 철학적 아포리즘이 매혹적인 이유는 그것이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명석함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기하학 공준이 다섯개가 아니라, 오십개였다면 유클리드체계의 우아함은 증발했을 것이라고...

벤투의스케치북 2016-08-24 20:45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저는 세상이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인문학은 그런 점을 최대한 명료하게 다룰 줄 알고 분석하고 견해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려주신 말씀과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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