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결국 흥행을 우선시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지만 대중적인 작가들을 저는 반기지 않습니다. 작품성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데 그들도 작품성에 비중을 두었다면 흥행이 잘 안 되는 작가들 이상으로 잘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성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론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기도 있으면서 작품성도 갖춘 작가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기 작가들이 대중에 영합하느라 작품성을 발휘할 여력이 없는 것과 실제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올해 한강 작가의 수상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20년 전부터 그 작가의 작품을 아끼듯 읽어온 저로서는 숨겨둔 애인을 빼앗긴 것 같기도 합니다.(오늘 경복궁 공부를 함께 한 한 여자분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남자들 중에서 그런 감정을 갖는 경우는 아예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더군요.) 참 많은 사람들이 그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급(?)해 읽는 것을 보며 보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강, 채식주의자 깊게 읽기’ 같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성과는 별개로 한강 작가와 함께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가를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작가를 찾아 읽는 것도 창의적으로 해야겠지요? 오늘 이정우 교수의 ‘소은(素隱)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를 읽다가 “어떨 때는 엘레아학파를, 어떨 때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써먹는 소피스트들의 양동작전을 분쇄하는 길이기도 하다.”(13 페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지난 해 읽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떠올렸습니다. 상반되는 아르미니우스적 가치관(자유주의)과 칼뱅주의(예정론)를 널뛰듯 오가는 기회주의적 신앙의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복궁 어디 어디인가를 넘어서는데 선생님께서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경계인 문지방을 밟는 것은 중간자적 존재 즉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존재도 아닌 좀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창의력(이라고 할 것까지 없겠지만)은 이런 방식으로 건져올리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엘레아학파의 사상은 다(多)와 운동(運動) 즉 물리적 세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상이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만물유동론(萬物流動論)이다.: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참고)


수상을 계기로 그간 작품성이 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많이 읽히지 않은 작품들이 읽히고 한국 문학 - 한강 작가의 수상이 한국 문학의 영광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무리한 끼어 맞추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 도 더불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랜 즉 선호(選好) 즉 노쇠함 때문인지 이제 (한강 작가 본인이 이런 글을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한강 작가가 소설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도 자주 출간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대체로 흥행과 관계 없는 장르인) 시를 쓰시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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