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분석의 기법 중 하나인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이 생각난다. 특히 정치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언어, 자유연상을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것으로 강조했다.

 

자유연상의 관건은 두서 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소망과 기억 등을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도 자유연상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합리적인 생각, 책임감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들에 잠식되었다면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을 사명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기야 머리에 온통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들어차면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오류가 (개인의) 진실을 알게 하는 수단이 되지만 공공의 장에서의 그런 자유연상적인 발언은 양식(良識)있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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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음력 7월 보름)가 백중(百中)이었다. 백중은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한,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의 효성(孝誠)으로부터 비롯된 절기가 우란분절이다.

“오늘은 우란분절. 효성 깊은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고통 받는 어머니를 위해/ 고귀한 불공을 드린 날이었다지, 그후/ 여러 가지 음식을 盆에 담아 조상의 영전이나/ 부처께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네./ 우란분. 우란분. 심한 고통이라는 뜻이지...

아니면 어머니, 우란분 우란분/ 그 화분 속에 심어/ 내 두개골의 대지 그 아늑한 밀실 속에/ 보관하여 세상풍파 더 이상 미치지 못하도록/ 어머니를 한번 잉태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오랜만에 다시 읽는 김승희 시인의 ‘우란분절‘의 주요 부분이다.

이 시를 보며 종법질서와 장자 우선 원칙을 고수했던 유교의 효는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자현스님에 의하면 유교의 효는 아버지에 대한 효, 남성 중심의 효라면 불교의 효는 어머니에 대한 효, 여성과 관련된 효이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김승희 시인의 ‘유서를 쓰며’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다.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 모성에 대한 인식이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자리매김된 모성성의 시인이라는 말이 묘하게 불편했다고 말하는 나희덕 시인은 ‘모성성 – 불모성을 건너는 다리’에서 모성도 분명히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이 든 예는 모성성을 상징하는 여신 데메테르나 그녀의 할머니 가이아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64, 65 페이지) 보라는 칸딘스키가 “냉각된 빨강”이라 표현한 색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57 페이지)

티에리 베제쿠르는 유럽의 회화는 무엇보다 동일 계열 색의 끝없는 뉘앙스와 미묘한 색조의 변화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풍경의 감각’ 133 페이지)

세상을 고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효율성과 게으름, 상투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유연성과 새로운 시각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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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윤선(允善)님이 올린 실상사(實相寺) 사진을 보고 정끝별 시인의 ‘여운(旅雲)’이란 산문집을 찾아보았다.

5월을 맞이하는 실상사, 지리산 뱀사골 아래의 그 절 연못에 수련(睡蓮)이 떠 있는 사진을 보고 경복궁 향원정, 종묘(宗廟)의 하지(下池), 중지(中池), 상지(上池) 등의 연못 생각을 했다.

여담이지만 내 사는 연천을 漣川이 아닌 蓮川이라 쓴 현판을 단 한 문화 단체를 보고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맞거나 말거나..

‘여운’에는 우포 이야기도 있다. 실상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들렀다. 마음으로만. 실상사는 지리산 뱀사골 아래에 있는 절이다. 고정희 시인이 이곳 뱀사골 계곡에서 실족사했다.
‘2003년에 나온 ‘여운’이란 책은 여행지와 관련된 시를 소개하는 책이어서 시도 익히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게 한다.

손남숙 시인의 시집(‘우포늪’)과 산문집(‘우포늪, 걸어서’)이 반영되기에는 너무 앞서 나온 책이다.

‘우포늪’이란 시집에 실린 시 제목들만 보아도 우포늪의 정경이 그려지는 듯 하다. ‘늪의 수레바퀴’, ‘꽃과 새들이 열람하는 우포늪’, ‘달에 가는 달뿌리풀’, ‘새들의 배경은 물결’....

여름 우포늪의 백미(白眉)라는 가시연꽃을 보려면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없겠다. 아니 내 사정이 되어야 여행도 할 수 있겠다.

그제는 숲해설사 공부를 하는, 나의 문화해설사 동기가 레이첼 카슨의 ‘잃어버린 숲’을 숲해설사들의 바이블 같은 책이라 이야기하기에 숲 공부를 하지 않지만 참고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트리스탄 굴리(작가이자 내비게이터, 탐험가)의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우리 주변에 널린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을 알아보는 법’이다.

말하기, 듣기, 보기 등 세 가지 핸디캡을 가졌던 헬렌 켈러가, 못 보는 것은 자신을 사물과 멀어지게 했고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사람과 멀어지게 했다며 듣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이란 말 때문에 생각해낸 사실이다. 자연(自然)을 생각으로만 향유(享有)하는 버릇은 깨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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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에 실린 나희덕 시인의 ‘흔적’이란 시는 시인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란 궁금증을 풀고자 여기 저기에 자신의 몸을 대보는 상황을 노래한 시이다.

시인은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 저기에 대본다. 시인은 열무잎, 흰누에나방의 날개, 헝겊조각, 어린 나뭇가지, 검은 해초 뿌리, 조개의 둥근 무늬, 딸아이의 머리띠 등에 몸을 대본다.

이 상황이 특별한 것은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을 자신의 몸에 대보는 것이 아니라 몸을 무엇인가에 대보기 때문이다.

해설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흔적‘이란 시를 떠올려본다.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어딘가에서 가져온 글감들을 내 글의 전개에 끼워 맞춰 보는 일이 아닐지?(물론 머릿 속에서)

덕수궁을 제외한 경복, 창덕, 창경궁 시나리오를 대충 완성했다며 동기 신** 선생님이 이것 저것 보고 마구 써서 다시 차근 차근 고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한 것은 지난 8월 초였다.

그는 지난 8월 2일 내 해설 컨셉이 새로와 좋았다고 평하며 자신도 완전 새로운 컨셉으로 경복궁 외전(外殿)을 준비했다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자신이 없어 그냥 일반 버전으로 해설했다며 아쉬움을 표했었다.

‘브레너(Brenner)의 빗자루’(Sidney Brenner’s Broom)란 개념이 있다. 자신이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과감히 발표한 뒤 해결되지 않은 것이나 이해되지 않은 것은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버리듯 아이디어를 버리면 되는 상황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이에 비해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란 개념도 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면도날은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는 도구를 의미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처음부터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들을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고, 브레너의 빗자루는 먼저 쓰고(포함시키고) 나중에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나 이해되지 않은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

절제와 균형의 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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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恩惠)를 뜻하는 일본어 메구미(めぐみ)를 닉네임으로 설정한, 이름에 은혜 은(恩)자가 있는 한 동기를 보며 나도 빼어난 나무를 뜻하는 수수(秀樹)의 일본어인 히데키(ひでき)를 닉네임으로 하려다가 그냥 수수(秀樹)라 하기로 했다.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데 더구나 빼어난 나무이니 더 없이 의미 있는 말이다. 히데키는 ‘한글의 탄생‘을 쓴 일본인 학자 노마 히데키이다.(のま ひでき이고 한문으로는 野間秀樹이다.)

캘리그라피를 하는 페친이 있고 타이포그래피를 하는 페친이 있는데 노마 히데키 교수는 1977년 현대일본 미술전 가작상을 수상하는 등 미술가로 활동하다가 한국어와 한글에 매력을 느껴 독학으로 한글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학을 전공했다. 글과 그림의 밀접한 연관을 알게 하는 사례이다.

캘리그라피는 아름다운 서체를 표현하는 예술이고 타이포그라피는 문자 조형을 형상화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지나친 단순화일까?)

히데키가 한글에 대해 한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글이란 문자는 음의 세계에 있는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음과 모음을 나타내는 자모를 문자의 세계에서 조합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히데키는 에크리튀르(ecriture)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쓰는 것, 쓰여지는 것, 문자, 필적, 문체 등을 의미한다.

히데키는 세종(世宗)의 훈민정음 창제를 정음(正音) 에크리튀르 혁명이라 부른다. 한글 창제는 정음 혁명파와 한자 한문 원리주의의 투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한글이 반포된 지 300년 정도가 지난 시점의 조선의 지식인들/ 실학자들인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등조차 한글 사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학문이나 공적인 용도로의 사용은 거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정조 역시 비슷하다. 몇 통의 한글 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은 문체반정을 통한 한문 문체 개혁에 있었지 한글의 보급에 있지는 않았다. 한글이 널리 보급되게 한 일등 공신은 소설이다.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서학(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내가 소설(小說)에 대해서는 한 번도 펴본 일이 없으며, 내각에 소장했던 잡서도 이미 모두 없앴으니, 여기에서 나의 고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정조실록‘ 참고)

김만중이 정조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조선 시대의 한글 소설 가운데 최고의 구성력을 자랑하는 ‘구운몽(九雲夢)‘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구운몽‘은 숙종 시대의 작품이다.)

정조가 소설을 한번도 펴본 일이 없다고 하니 ‘구운몽‘도 펴보지 않았겠지만 만일 보았다면 어떤 평가를 했을지 궁금하다. 정조의 심정이 되어 재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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