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恩惠)를 뜻하는 일본어 메구미(めぐみ)를 닉네임으로 설정한, 이름에 은혜 은(恩)자가 있는 한 동기를 보며 나도 빼어난 나무를 뜻하는 수수(秀樹)의 일본어인 히데키(ひでき)를 닉네임으로 하려다가 그냥 수수(秀樹)라 하기로 했다.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데 더구나 빼어난 나무이니 더 없이 의미 있는 말이다. 히데키는 ‘한글의 탄생‘을 쓴 일본인 학자 노마 히데키이다.(のま ひでき이고 한문으로는 野間秀樹이다.)

캘리그라피를 하는 페친이 있고 타이포그래피를 하는 페친이 있는데 노마 히데키 교수는 1977년 현대일본 미술전 가작상을 수상하는 등 미술가로 활동하다가 한국어와 한글에 매력을 느껴 독학으로 한글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학을 전공했다. 글과 그림의 밀접한 연관을 알게 하는 사례이다.

캘리그라피는 아름다운 서체를 표현하는 예술이고 타이포그라피는 문자 조형을 형상화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지나친 단순화일까?)

히데키가 한글에 대해 한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글이란 문자는 음의 세계에 있는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음과 모음을 나타내는 자모를 문자의 세계에서 조합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히데키는 에크리튀르(ecriture)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쓰는 것, 쓰여지는 것, 문자, 필적, 문체 등을 의미한다.

히데키는 세종(世宗)의 훈민정음 창제를 정음(正音) 에크리튀르 혁명이라 부른다. 한글 창제는 정음 혁명파와 한자 한문 원리주의의 투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한글이 반포된 지 300년 정도가 지난 시점의 조선의 지식인들/ 실학자들인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등조차 한글 사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학문이나 공적인 용도로의 사용은 거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정조 역시 비슷하다. 몇 통의 한글 편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은 문체반정을 통한 한문 문체 개혁에 있었지 한글의 보급에 있지는 않았다. 한글이 널리 보급되게 한 일등 공신은 소설이다.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서학(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내가 소설(小說)에 대해서는 한 번도 펴본 일이 없으며, 내각에 소장했던 잡서도 이미 모두 없앴으니, 여기에서 나의 고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정조실록‘ 참고)

김만중이 정조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조선 시대의 한글 소설 가운데 최고의 구성력을 자랑하는 ‘구운몽(九雲夢)‘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구운몽‘은 숙종 시대의 작품이다.)

정조가 소설을 한번도 펴본 일이 없다고 하니 ‘구운몽‘도 펴보지 않았겠지만 만일 보았다면 어떤 평가를 했을지 궁금하다. 정조의 심정이 되어 재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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